[Opinion] 결국 그들을 지탱하는 건 연대, 로마 [영화]

냉혹한 세상에서 여성과 아이가 살아가는 법
글 입력 2019.03.21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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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관객들에게는 ‘그래비티’로 유명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는 멕시코시티 내 로마 지역을 배경으로, 한 중산층 가족의 젊은 가정부인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의 시선을 따라 진행되는 영화이다. 감독 자신을 키워낸 여성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담은 이 작품은 1970년대 멕시코의 정치적 격랑 속에서 주인공들이 겪는 가정 내 불화와 사회적인 억압을 생생히 재현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멕시코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



영화를 보기 전, 내가 아는 정보라곤 위의 줄거리가 다였다. 그 누구의 평도 참고하지 않은 상태로 영화관에 들어선 나에게 영화의 초반부는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전작은 ‘그래비티’, ‘칠드런 오브 맨’ 이 두 작품이었다. 두 작품 모두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하는 SF기 때문에 ‘로마’가 SF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잔잔하게 일상적인 흐름으로 흘러갈 줄은 몰랐다. 스크린에 펼쳐진 ‘로마’는 마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보이후드’나 다르덴 형제 감독의 작품을 보는 것 같았다.


영화마다 그 영화에 맞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법이다. 공포영화를 볼 때는 공포를 마주할 준비, 슬픈 영화를 볼 때는 슬픔을 겪어낼 준비, 오락영화를 볼 때는 가볍게 오락을 즐길 준비. 나는 ‘로마’를 볼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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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다루는 인물들은 모두 살면서 만나봤을 법한, 평범한 인물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정부 클레오는 일반적인 영화 주인공과는 거리가 가장 먼 인물이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 그 평범한 가정 내에서도 변두리에 있는 가정부. 심지어 클레오는 성격마저도 특이하지 않다. 영화는 그런 클레오라는 인물을 따라가는 것에만 집중한다.


극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영화에 익숙해진 나는 로마의 진행이 처음에는 지루하게 느껴졌다. 무슨 사건에 집중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빨리 내가 신경을 쏟을 수 있는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영화가 중반부에 접어들자 나는 클레오의 삶에 완전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원래 사람의 삶이 한 가지 사건에만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하루에도 아침과 점심, 저녁과 새벽에 저마다 다른 사건을 겪는다. 그리고 그 저마다의 사건은 남들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당사자에겐 그 순간만큼은 가장 커다란 사건이 된다.

 

특정한 사건이 없다며 투덜거리던 나는 특정한 사건이 없기 때문에 더 인물들에게 감정 이입할 수 있었다. 영화 속 그들이 아침과 점심, 저녁과 새벽에 저마다 다른 사건을 겪는 평범한 사람이라서 더 멕시코 중산층 가정의 삶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영화가 다루는 인물들이, 사건들이 평범해서 그들이 마주하는 모든 순간이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영화는 클레오가 물청소하는 장면으로 시작해 클레오가 빨래를 너는 장면으로 끝난다. 가장 강렬해야 할 영화의 시작과 끝을 가장 일상적으로 장식하는 것을 보며 그 오프닝과 엔딩 장면이 곧 ‘로마’를 나타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키워낸 여성들


 

앞서 영화가 일상적인 흐름으로 진행된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굵직한 사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남편의 외도, 클레오의 임신이 그러하다. 그리고 그 굵직한 사건은 그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남편이 자식들과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가버리고, 예상치 못했던 갑작스러운 임신을 하는 상황은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모두가 납득할 만한 절망적인 상황이다.


영화 속 남성들은 자신이 그 상황을 만들었음에도 필사적으로 책임을 회피한다. 안토니오는 자신의 외도로 가정의 가계가 어려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내 소피아의 양육비에 대한 요구에 ‘돈이 부족하다’는 핑계만 댄다. 페르민은 클레오의 임신 소식에 곧바로 자취를 감추고 클레오가 자신을 찾아오자 자신이 아빠일 리가 없다며 부정하는 것으로 모자라 클레오를 무력으로 위협하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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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책임은 여성들의 몫이다. 그녀들은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도망칠 수도, 좌절할 수도 없다. 그녀들의 곁에 어린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소피아와 클레오를 보며 내 주변의 많은 여성이 떠올랐다.

 

친구로부터 가정을 두고 떠나버린 남편으로 인해 혼자 아이를 키우며 우울증에 걸린 지인 이야기를 들었다. 그 지인은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친하기는커녕, 대화도 제대로 안 해본, 지인이라는 단어 그대로 정말 알기만 하는 사람일 뿐인데도 그 짧은 이야기는 내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어 한동안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외에도 심심치 않게 예상치 못한 임신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임신이 여자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 버리는 모습을 쉽게 목격해왔다.


제3자인 내가 봐도 답답하고 막막한 상황인데 그들은 꿋꿋이 살아나갔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외로워도 누군가의 삶을 짊어진 그들은 오직 앞만 보고 나아갔다. 그들에겐 뒤를 돌아보는 것도 사치였다. 내게 그 모습은 안타까우면서도 숭고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소피아와 클레오가 내 주변의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이 가진 무게를 나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죽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필사적으로 아이를 낳으러 간 클레오가 사산한 뒤 울면서 사실 아이가 태어나지 않기를 바랐다고 말했을 때의 심정 역시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연대의 힘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여성이거나 어린 아이다. 대표적인 사회적 약자인 그들을 둘러싼 세상은 냉혹하기만 하다. 그러나 결국 그들을 연대의 힘을 통해 서로를 지탱해나갔다.

 

클레오가 임신 소식을 알렸을 때 페르민은 바로 도망가 버렸지만 소피아는 그녀를 위로해주고 병원까지 동행했다. 시위를 진압하던 세력이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했을 때, 페르민은 그 세력에 섞여 클레오에게 총구를 겨눴지만, 할머니는 필사적으로 양수가 터진 클레오를 병원에 데려갔다.


마찬가지로 안토니오는 가정을 내팽개쳐버렸지만 클레오는 소피아와 아이들에게 새로운 가족이 되어주었다. 그녀들이 남성들의 무책임함, 사회의 폭력성을 마주하며 살아가면서도 꿋꿋이 나아가는 이유는 서로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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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스터를 처음 봤을 때 한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포스터의 이미지가 정확히 어떤 모습인지 제대로 파악도 하지 않은 채 상영관에 들어갔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포스터의 장면이 스크린에 펼쳐지는 순간 내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수영도 하지 못하는 클레오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다에 뛰어 들어 아이들을 구하고 모든 가족들이 모여 부둥켜안는 그 모습이 곧 영화 ‘로마’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다.

 

소피아와 클레오는 모두 포기하는 대신에 새롭게 시작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이는 서로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마지막에 많은 일을 겪은 클레오가 담담하게 빨래를 널기 위해 옥상에 올라가는 장면에선 꿋꿋이 살아가는 자의 위엄이 느껴졌다.



P.S.

<로마>는 넷플릭스를 통해 감상할 수 있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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