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름다움을 잡아먹는 영혼들 [도서]

정용준 - <먹이>를 읽고
글 입력 2019.03.20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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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준 프로필2.jpg
 
 


정용준 작가



정용준의 대표작이라고 알려진 소설은 단편집 <가나>의 표제작인 <가나>와 <떠떠떠, 떠>가 있다. 최근에 발표된 단편소설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와 장편소설 <프롬 토니오> 외에도 그가 잡지에 실은 단편 소설들은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나는 단편집 <가나>에 실린 <먹이>를 다루고자 한다. 나는 정용준의 작품세계를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언어, 죽음, 사랑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그의 소설은 특히 언어에 대한 사유가 돋보인다. 정용준의 소설에는 공통점이 있다. ‘언어’에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말더듬이, 실어증, 혹은 외부의 압력에 의해 말을 할 수 없게 되는 사람들에 대해 다루면서 자연스레 ‘언어’에 대한 작가의 고찰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런 추상적인 관념들을 작가는 공감할 수 있는 신선한 묘사가 어우러진 시적인 문체로 표현한다.


시적인 문체란 무엇일까. 소설을 시로 전개하지는 않지만, 그의 작품 속에서 서사가 진행될 때 돋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묘사이다. 인물이 처한 상황과 그에 따른 감정들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만, 흔하지 않은 문장으로 표현해 내는 것.


말하자면 우리 모두의 감각을 빌려서 그는 글을 쓰는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묘사에 동질감을 느끼는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서 엿볼 수 있는 낯선 감각 역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지점들이 시적인 묘사라는 표현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나 진짜 본 표지.jpg
 


가나 - <먹이>



<먹이>는 정용준의 소설 중 아주 드물게도 언어에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 소설이다.


소설은 검은 표범을 키웠다고 주장하는 남자와 그를 조사하고 있는 형사의 대화로 진행된다. 남자는 동물원에서 데려온 검은 표범과 자신이 함께 살았다고 주장한다. 검은 표범의 이름은 ‘먹이’이다.


‘밤에 먹이를 가만히 바라보면 어둠에 흡수된 것 같고 방 전체가 먹이로 가득찬 것 같다’고 표현된 부분에서 눈치 챌 수 있듯이, 먹이는 남자의 환상이 만들어 낸 동물이다. 그런 동물과 남자는 함께 살아간다. 소설 중간 중간에 쉽게 이것을 눈치 챌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긴장감이 흐트러지지는 않는다.


소설이 진행되고 후반부에 갈 수록 점점 더 결말을 예측할 수 있음에도 그렇다. 왜냐하면 소설을 읽는 내내 독자들은 어느새 아주 강한 어떤 대상을 동경하는 약자인 주인공과 동화되어 가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 번쯤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에 먹혀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나의 존재가 그것과 하나가 되고, 그 과정에서 내가 파괴되어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던.



독자의 예상은 적중한다. ‘먹이’는 애초에 없었고, 검은 표범에 동경을 품고 있는 심적으로 약한 남자는 숯을 자신의 몸에 바르고 자신의 검은 표범이라는 환상에 빠진 채, 자신의 손을 물어뜯고 실신한 채로 발견된 것이다.


구성도, 스토리의 진행으로 쉽게 알 수 있는 결말도, 전형적인 약한 인물과 강함에 대한 동경도 어떻게 보면 쉽게 예측할 수 있지만, 이 소설만이 갖춘 장점은 분명 존재한다. 그것은 검은 표범의 이름을 ‘먹이’라고 설정한 데에서 오는 역설적인 미학이다.



검은 늑대.jpg
 


인물은 자주 자신이 ‘먹이’에게 잡아먹히면 행복할 것 같다고 말한다. 강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동경이 너무 큰 나머지 자신의 최후까지 바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강하고 아름다운 존재의 이름은 ‘먹이’이다. 누군가의 음식, 누군가에게 잡아먹혀지는.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취하는 세상에서는 당연하게도, 남자가 ‘먹이’가 되어야 한다. 검은 표범에게 잡아먹히는 먹이 말이다. 그리고 결말에서 남자는 자신의 손을 물어뜯는다. 자신이 ‘먹이’와 동일시되어 자신을 먹이로 삼는 것이다.


자신이 동경하던 것에 자신이 잡아먹히는데, 그것은 사실 자신이 추악하게 여기던 ‘내’가, ‘내가 동경하는 것’을 잡아먹는 아이러니인 것이다. 이것은 이 인물에게는 하나의 큰 비극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남자는 마지막까지 이런 사실을 부정한 채 ‘먹이’의 아름다움에 대해 칭송한다. 남자의 캐릭터를 더욱 참담하고 안타깝게 느껴지게 한다.


‘먹이’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아름다움의 먹이가 되고 싶었으나, 오히려 추한 ‘나’의 먹이는 내가 생각하는 절대적이고 아름다운 대상이다. 내가 나의 비극을 물어뜯는 서사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강렬한 비극이 된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가 너무 아름답고 소중해서 닿을 수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먹어버렸을 때 우리는 어떻게 남은 생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 비극의 감각에 대하여 정용준은 서슴없이 치닫고 있다.




이정문-아트인사이트 명함.jpg
 

[이정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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