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 인생은 언제쯤 빛날 수 있을까? [도서]

글 입력 2019.03.18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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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가 끝나자 내 방은 눈에 띄게 넓어졌다. 기쁜 마음을 추진력 삼아 그간 쌓아뒀던 물건들을 몽땅 정리하기로 했다. 새로 생긴 붙박이장의 길이를 재고, 플라스틱 수납장과 부직포 수납함을 사들이면서 조금씩 정리가 되는 듯 했다. 정리가 끝나고 깨끗해진 방을 보며 흡족했지만 뭔가 성에 차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그게 뭘까. 공간이 변화한 만큼 내 방도 완벽하게 정리하고 싶다는 욕망에 들끓었고 '정리의 왕도'를 배우고 싶어졌다.

문득 어디선가 자주 들어봤던 책 제목이 떠올랐다.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 방이 빛나는 것도 아니고 인생이 빛난다니! 저자 곤도 마리에는 일본에 '곤도 마리에 열풍'을 불러일으켰을 정도로 획기적인 정리법을 제시했다고 한다. 이 책이야말로 내가 다시는 방 정리에 실패하지 않는 길잡이가 되어줄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주저않고 이북으로 책을 구입해 읽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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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독자들에게 처음부터 단단히 각오를 다져준다. 이 책에서는 정석이 아닌 자신만의 정리법을 가르쳐줄 것이며, 이 방법을 따르는 여러분은 정리와 어지름과 다시 정리의 지긋지긋한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무한 신뢰가 갔다. 당장 메모장을 켜고 책 내용을 차근차근 기록해 나갔다.



STEP 1. 옷장부터 시작하다

 
책에서 소개하는 물건별 정리법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뭐든지 다 꺼내서 손으로 집어들어 본다.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2. 의류, 책, 서류, 소품, 추억의 물건 순으로 정리해라.
3. 옷은 몽땅 꺼내서 철 지난 옷부터 버려라. 걸기보다는 개고, 눕히지 말고 세워서 수납해라.
4. 책은 '언젠가 읽겠지' 싶은 건 다 버려라.
5. 서류는 전부 버려라. 정말 필요한 것만 남겨라.
6. 소품도 가능한 버려라.
7. 추억의 물건은 만지고 추억해본 후에 버려라.

사실 7번까지 읽을 필요도 없이 이 책을 한 줄로 말하자면 1번이다.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는 것이다. 그럴듯하다. 내 방을 설레는 물건들로만 가득 채운다니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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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실천에 옮기기 위해 옷장을 열었다. 첫번째 난관은 걸어두지도, 서랍과 수납장 안에 넣어두지도 못한 옷 무더기였다. 무더기의 정체는 책의 표현에 따르면 '실내복으로 강등된 외출복'들이었다. 1+1이라는 이유로 스파 브랜드에서 구입했던 티셔츠, 지하상가에서 구매한 면 반바지들, 아마도 중학생 때 엄마가 마트에서 사다 주셨던 민소매 티, 뭐 대충 그런 것들 말이다. 집에서 몇번 입다가 옷장 어딘가에 처박혀 존재가 잊혀진 녀석들도 있었다.

하나씩 집어들어 설레는지 확인했다. 전혀 설레지 않았다. 그렇지만 집에서 입기에 유용해 보이는 것들도 있었다. 문득 책에서 '유용하다는 이유로 남겨두지 마라! 설레는 것만 남겨야 한다!' 라고 강조했던 것이 떠올랐다. 망설여졌다. 그런 식으로 다 버리면 또 다시 사야 하지 않을까? 저자는 절대 그럴 일은 없으며, 아무리 정리해도 결국 입을 옷은 남게 마련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나의 의심병과 가성비에 대한 집착은 결국 몇 개의 옷을 남겨두었다. 사실 이때부터 나의 정리는 꼬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빨래 바구니에 가득 담긴 (버릴) 옷 무더기를 보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이렇게나 많이 버렸는데도 옷장의 풍경은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았다. 단지 그늘 속에 가려져 있던 무더기 하나가 사라졌을 뿐이었다. 먼지 알러지가 있는 나는 쉴새 없이 재채기가 나왔다. 마스크를 꺼내기도 귀찮아진 나는 결국 옷 무더기를 한 구석에 밀어넣고 옷장은 다음에 정리하기로 다짐했다. 그리고서 관심을 책장으로 돌렸다.



STEP 2. 책과 서류, 소품을 정리하다


책을 사랑하는 것에 비해 내가 보유한 책은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다. 책은 사면 살수록 공간을 무지막지하게 차지하는데, 넓은 집에 살아 개인 서재가 따로 있을 지경이라면 모르지만 나처럼 평범한 소시민에게는 골칫덩이에 불과하다. 그래서 중고서점에 몇 권씩 가져다 파는 습관이 생겼고, 새로 사더라도 읽고 나면 다시 팔았다. 그런데도 내 책장에는 꽤 많은, 읽지 않고 미뤄둔 책들이 쌓여 있었다.

책을 솎아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턱 집고 이건 팔자, 턱 집고 이건 남겨두자. 그렇게 버릴 책과 남길 책을 구분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는데, 다른 문제가 있었다. 버릴 책이 너무 많아진 것이다. 중고서점에 택배로 부치는 방법도 있겠지만 사실 난 택배를 부쳐본 경험이 없다. 그리고 택배를 부친다고 낑낑대며 우체국까지 찾아가느니 시간 날때마다 중고서점에 서너 권씩 들고 찾아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결국 책 무더기는 수납함에 다시 처박혔다. 책장의 모습은 조금 더 휑해지기는 했지만 그렇게 만족스러운 광경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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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서류였다. 통장이나 카드 외에 모든 서류는 쓸모없어 보여서 다 정리하기로 했다. 이 김에 '2년 전에 친구에게 주기로 약속했던' 이면지 묶음도 그냥 버리기로 했다. 또 문제가 생겼다. 버릴 종이가 너무 많아진 것이다. 옷도 버려야 하는데, 책도 갖다 팔아야 하는데, 이 종이는 또 어느 세월에 버려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새로 이사 온 아파트는 주말에만 분리수거할 수 있었다. 결국 이면지는 다시 조용히 원래 있던 곳에 쌓아뒀다. 이번에는 잊지 말고 꼭 친구 줘야지, 중얼거리면서. 서류를 많이 버리긴 했지만 그건 어차피 책장 어딘가에 잠자고 있던 녀석들이라 역시 방의 모습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소품은 정말 막막했다. 일단 100장에 육박하는 나의 CD 컬렉션엔 손을 대지 않기로 했다. 화장품은 이미 예전에 한 번 정리했기 때문에 딱히 버릴 것이 없었다. 화장품 샘플도 마찬가지로 정리한 적 있었고, 여분의 면봉이나 화장솜 같은 것은 버릴 수 없었다. 눈치챘겠지만 이미 '설레는 것만 남겨라'라는 책의 절실한 메시지는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용도 불명의 코드류가 제법 있었지만 더 이상 분리수거함을 과포화상태로 만들 수는 없었다. 결국 소품은 용도별로 분리해 수납함에 따로 넣는 데에 그쳤다. 이번에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STEP 3. 추억팔이로 마무리하다


드디어 마지막 단계, 추억의 물건을 정리할 차례였다. 사실 내 방에는 추억의 물건이랄 게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앨범과 사진 뭉치는 거실 한 구석에 박혀 있었다. 어차피 아버지가 사진들을 한 차례 정리하자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기 때문에 거실로 향했다. 사진들을 죄다 꺼내어 한 장 한 장 넘겨보다 보니 가족들이 관심을 보이며 거실로 하나 둘 모여들었고, 우리는 귀중한 유적을 발굴하는 고고학자마냥 사진 무더기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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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은 나와 오빠의 어릴 적 사진, 예전에 다함께 놀러다녔던 사진, 유치원 때 사진, 초등학생 때 사진, 졸업사진, 엄마의 어릴적 사진, 아빠의 대학생 때 사진, 부모님의 신혼여행 사진, 친척들 사진까지 들춰보면서 배를 잡고 웃었다. 어렸을 때는 저렇게 귀여웠는데 지금은 무뚝뚝한 딸내미가 되었다는 엄마의 공격을, 꼬질꼬질한 엄마의 어릴 적 모습을 놀리는 것으로 받아쳤다. 하얗고 멀끔했던 젊은 시절 아빠의 모습을 보며 새삼 놀라기도 했다. 신혼 여행 컨셉 사진들은 정말이지 눈물 쏙 빠지게 재밌었다.어느새 정리는 뒷전이고 가족들과 옛날 얘기로 웃음꽃을 피우느라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결국 추억의 사진들은 단 한 장도 정리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서랍장에 보관했다.

방에 돌아오니 벌써 12시다. 어질러진 것들을 대충 어딘가에 넣어 두고 버릴 것들을 문 밖으로 꺼내놓고 나니 어째 방 안의 모습은 정리하기 전과 한 치도 달라짐이 없었다. 달라진 건 버릴 것들만 엄청나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왠지 시간과 노력을 들어 쓰레기를 생산해낸 기분이 들었다. 몸과 마음이 지친 나는 아직 옷장 안에 쑤셔넣지 못한 양말 몇 켤레 위에 그냥 드러누웠다. 과연 내 인생은 언제쯤 빛날 수 있을까. 비몽사몽한 와중에 아주 잠깐 그런 생각을 했고,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아마 누군가는 이 책을 읽고 정말 빛나는 인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정리의 첫걸음은 버리기라고 했던가. 버리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나에게 정리의 힘을 빌려 인생을 빛나게 만들기는 영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다시 어지르고 또 정리를 반복하는 게 결국 내 인생이지 싶다.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한민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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