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누구나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 있다 <하거도> [공연]

글 입력 2019.03.16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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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하거도>를 봤다. 관람 후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 머릿속에서 <하거도>의 몇몇 장면들이 자꾸 스쳐지나간다. 마치 단케의 ‘신곡’에 등장하는 지옥을 연상케 했던. 좀비처럼 서로를 짓밟으며 위로 올라가려는 자들의 모습이, 그들의 신음과 절규가 날뛰던 모습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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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거도>는 ‘하거도’라는 고립된 섬에서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과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 작품을 보면 인간의 가장 어둡고 나약한 면들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다름 아닌 현재 수면위로 떠오른 충격적인 인간들의 모습과 같은 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자들



연극 <하거도>는 연쇄살인마 하거도를 재판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50년 전 ‘하거도’라는 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거도에 의해 죽었지만 그 날의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그 날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당시의 사람들과 하거도가 모인다. 물론 이미 모두 죽은 자들이었다. 이 재판은 하거도가 스스로 50년전 섬 ‘하거도’에서 벌어진 일들을 밝히기 위한 ‘환영의 재판’이었다.


50년 전과 현재가 번갈아가면서 극이 진행될수록 섬 ‘하거도’를 둘러싼 참혹한 진실들이 선명해진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섬 ‘하거도’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을 죽이고, 내쫓는 등 잔인한 행태를 일삼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발전소라는 이름으로 ‘거대수용소’를 세워 잡혀 온 사람들을 가축이나 다름없이 훈련시키고 노예처럼 부려먹었다. 성매매, 살인 등 이들이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저지른 모든 만행들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역겹고 추악했다. 이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권력 앞에서 흔쾌히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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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하거도’의 바다에서 의문의 시체들이 시민들에게 발견이 되자 관리자들은 발전소가 사실은 거대 수용소라는 사실이 밝혀질까 봐 수용소에 수감된 모든 사람들을 죽여 은폐를 감행하기로 한다. 그 방법이 바로 모든 수감자들의 식량 배급을 끊는 것이었다. 식량이 끊기자 배고픔에 굶주린 수감자들은 점차 인간성을 상실해간다.


조금의 음식이라도 얻기 위해 관리자들이 세운 원칙에 조금이라도 어긋난 행위를 한 동료를 혹은 가족을 고발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다.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죽은 동료의 인육을 먹는 행위까지. 마치 좀비처럼 서로에게 달려들고 물어뜯는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들이 끊긴 상황에서 이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잔인한 권력으로 인해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자들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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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이 끝으로 치달을수록 공연장을 드리운 어둠은 점점 짙어졌다. 앞에 서있는 존재들의 비명은 더욱 날카롭게 귀에 꽂혔다. <하거도>는 권력과 복종의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만행들을 극단으로 끌어올려 일말의 희망도 없이 절망만을 확장시켜갔다. 그 끔찍한 상황 속에서 인간에 대한 혼란은 찾아온다.


인간은 이토록 잔인하고 나약한 존재인가?




인간을 잔인하고, 나약하게 만드는 것은



<하거도>가 보여준 인간의 잔인함.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이 어떻게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 있는지, 인간의 나약한 면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개인의 의지와 변화를 무력화시키는 ‘상황’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하거도>를 보고 떠오른 실험이 있다. 유명하지만 악명 높은 심리 실험, 바로 ‘스탠포드 감옥 실험’이다. 자유가 결여된 상황에서의 인간을 연구하기 위해 설계된 이 실험은 일반적인 윤리의식을 가진 평범한 24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무작위로 ‘간수’와 ‘죄수’의 역할을 부여한 다음에 실제 교도소와 같은 환경에 그들을 방치했다. 평범한 학생들에 불과했던 이들이 보여준 결과는 대단했다. 권위를 가진 ‘간수’의 역할을 맡은 학생들은 점차 ‘죄수’들에게 가혹행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죄수들이 복종하지 않으면 단순한 체벌을 넘어 알몸으로 돌아다니거나 구강성교를 하는 척을 강요하는 등 성폭행까지 저질렀다.


죄수들 역시 그런 상황에 몰입하여 간수들이 보여주는 권위와 힘에 복종하여 자신들이 실제로 죄수라고 착각하게 되었다. 단순히 ‘환경과 상황’을 바꿨을 뿐인데 평범한 사람들이 무절제하게 악행을 저지르거나 그 악행에 복종하는 인간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실험이 보여준 것은 ‘상황’에 따라 평범한 인간이 영웅 혹은 악마가 될 수 있다는 것과 특히 그것이 ‘권력’에 의해 더 쉽게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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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퍼드 간수 실험을 재현한
영화 <엑스페리먼트>의 한장면


<하거도>가 바로 인간의 이러한 면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와 같은 사실이 <하거도>의 연출과 설정이 다소 과하다고 생각은 되지만 결코 비현실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은 이유기도 하다. 인간이 너무도 쉽게 악의적인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 그렇기에 현실사회에서도 인간이라면 저지를 수 없을 것만 같은 부정부패가 난무하다는 것. 인상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로 거북하고 씁쓸하지만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또 하나 의문이 떠오른다. 이토록 우리가 상황에 지배받는다면 ‘권력으로 인해 자유가 결여’된 상황에서 우리는 이대로 복종 할 수밖에 없는가? 이것이 바로 ‘하거도’라는 인물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벙어리 하거도, 그가 입을 열 수 있었던 이유



하거도는 ‘수용소’의 안과 밖 모두 살아본 자였다. 그는 수용소 밖이 사실은 마냥 아름답지 않으며 안이나 밖이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벙어리인 척 입을 다물었다. 벙어리가 됨으로써 고립된 섬 ‘하거도’처럼 사람 ‘하거도’도 고립된 인간이 되었다.


“내 속에서 나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뱉지 않았다.”


그가 왜 벙어리를 선택했는지 작품은 확실히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에 하거도가 내뱉은 말을 보면 아마 그는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기 위해 속에서 나는 소리들을 삼킨 것은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다. 그는 인간의 권리를 알고 자신들의 권리를 빼앗은 이들의 추악한 행포를 아는 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고 싶은 욕망과 포기하고 싶은 체념이 뒤섞인 상황에서 체념을 선택했다고 본다. 그렇기에 수용소의 탈출구를 알았지만 그는 수용소를 나가지 않았고, 마지막에 불을 질러 수용소 내의 사람들과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것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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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보다 더 중요하게 다가온 건 50년 뒤 그는 ‘환영의 재판’을 열었다는 것이다. 비록 뒤늦은 고발이었지만 어찌됐던 꾹 닫혀있던 하거도의 입을 통해서 참혹한 과거의 진상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왜 하필 ‘하거도’라는 인물에 의해서 밝혀지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거도’라는 인물은 인간이기를 포기했지만 사실 가장 인간다운 존재였다. 수용소 내에서 태어난 자에게 바깥세상의 아름다움을 알려주었고,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잃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인간이기를 포기했지만 상황에 의해 폭력적이거나 악의적인 행동을 하지 않은 유일한 존재였다. 즉,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남아있던 것이다. 이것이 뒤늦게나마 그의 입을 열게 만든 것은 아닐까. 결국 아무리 진실을 은폐하려고 해도 ‘하거도’와 같이 진실을 알고 있는 자는 있고, ‘하거도’와 같은 자들에 의해 진실은 밝혀지게 된다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단서를 던져주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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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인간은 ‘상황’에 의해 누구나 악마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이 인간의 나약하고 잔인한 면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은 동시에 인간은 누구나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영웅이 될 수 있음을 나타나기도 한다. 악이나 복종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다만 스탠포드 실험을 실행한 필립 박사는 이를 위해서는 평소 우리가 수많은 상황의 특성을 파악하고 우리를 악하거나 잔인하게 만드는 상황 등을 식별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한다.


현재 ‘하거도’와 같은 비인간적인 현상들이 사회에 펼쳐지고 있다. 우리 역시 ‘하거도’와 같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수많은 상황들이 전개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확실하게 무엇이 우리를 악하고 잔인하게 만드는지 인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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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량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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