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태권도를 배우는 중입니다 [스포츠]

처음 태권도를 배웠던 그날
글 입력 2019.03.13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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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학을 하고 나니 그동안 불규칙한 삶을 규칙적으로 해온 나를 위해 시간이 없더라도 일주일에 세 번은 꼭 운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운동을 시작하면 좋을지 고민하다가 성격상 매일 같은 운동을 하는 건 지루해서 도중에 그만두게 될 것 같고, 차라리 도장 깨기를 하는 것처럼 어떤 단계를 밟아나가는 운동이 더 잘 맞을 것 같았다. 순간 떠오른 것은 태권도였다.


사실 태권도는 내 어린 시절의 꿈이었지만 딸이 다칠 것을 염려했던 부모님의 반대로 할 수 없었다. 뒷북도 아니고 성인이 되어서야 태권도를 한다는 게 좀 우스웠지만, 무도인에 대한 꿈은 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고민 끝에 동네 성인 태권도장에 등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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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태권도를 시작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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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떨리는 마음으로 첫날 태권도 수업을 갔다. 도장을 들어서자 낯선 사람들이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 순간 모르는 사람과 인사를 나누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에게 당연하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을 무시할 수 없어 머뭇거리다 나도 인사를 건넸다.


이후, 사범님이 주신 도복을 받고 옷을 갈아입은 후 띠를 허리에 매는 법부터 배웠다. 그 와중에 주변을 살펴보니 도장에 흰 띠는 나밖에 없었다. 다들 숙련자인 듯해서 순간 환불을 받고 여기를 나갈까 하는 충동이 들었지만, 이제서야 시작할 수 있게 된 무도인의 꿈이 아까워 참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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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자기소개를 마치고 나니 사범님이 처음 온 나를 위해 태권도 수업방식에 관해 설명을 해주셨다. 품새를 일일이 암기해서 색색의 띠를 따는 방식은 지양하며, 도장의 다른 수련생들과 직접 동작을 맞춰가며 대련하는 겨루기를 위주로 수업한다고 하셨다. 또 한번 도망치고 싶었다. 이번엔 모르는 사람들과 대면하며 동작을 주고받는다는 방식에 몹시 당황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새로운 사람을 대하는 게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사회적인 풍조 때문일 수도 있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배워 왔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무엇이든 같은 공동체에 있어도 낯선 사람이기 때문에 대화 한번 하지 않고 그 공동체를 벗어나게 되는 일은 나에게 익숙한 일이 되어버렸다. 알지만 모르는 척 하는 것. 그게 지금까지의 내 모습이기에 운동할 때도 모르는 이와 대면할 필요가 없는 헬스를 가끔 나가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렇기에 가뜩이나 처음 하는 태권도인데 남과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하는 운동을 잘할 수 있을지, 태권도를 전혀 못 하는 내가 실력자들에게 민폐만 될까봐 생각이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사범님은 내 이름을 부르며 긴장을 풀라고 말해 주셨다.




몰라도 괜찮다



수업은 시작됐고, 간단한 몸풀기를 했다. 체력 운동을 빡빡하게 한다는 사범님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일까? 온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점점 강도가 세지는 운동에 정신을 못 차리고 헉헉거렸다.


네 발로 걷는 웅보부터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낯선 이름의 운동을 하면서, 다양한 신체 부위를 쓰는 운동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넘어지고 실수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사범님은 처음이니까 어렵고 동작도 당연히 잘 몰라야 한다며 힘들면 언제든 쉬어도 된다고 말해주셨다.


나는 남 의식을 많이 하다 보니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참 두려워했었다. 나에게 모르는 것이란, 내가 배우며 나아질 기회가 아니라 부끄러운 것이고 약점이었다. 누가 몽둥이를 들고 때리는 것도 아닌데 모른다고 말하는 게 죽기보다 싫었던 때도 있었다. 질문도 잘 안 했던 것 같다. 그런 태도는 사회 초년생이 되며 더욱 굳어졌다. 인턴 준비를 할 때도, 모르는 것은 죄였다.


그렇기에 모르는 것이 당연하고 그래서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는 전제로 동작을 알려주시는 사범님에게 새삼 감사했다. 덕분에 몸에 조금은 힘을 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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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을 억수같이 흘리며 끝낸 체력운동 이후로 드디어 겨루기가 시작됐다. 부끄럽기도 하고 남들 앞에서 창피를 당할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태권도의 어떤 동작도 몰랐기에 다른 분들이 겨루기를 할 때 나는 사범님과 일대일로 겨루기를 배웠다. 기본적으로 내지르는 주먹 동작과 날라 오는 주먹을 막는 두 가지 동작을 배웠는데, 허둥지둥하는 꼴이 자신도 웃겨 부끄러웠다. 또, 남을 의식하는 버릇이 스멀스멀 올라와 부끄러울 때마다 웃어넘기기는 했지만, 사범님이 나를 태권도에 소질이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어떡하나 싶어 집중을 제대로 못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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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범님과 계속 겨루기를 배울 줄 알았는데 몇 번 동작을 내지른 후, 사범님은 나를 바로 도장의 처음 보는 사람들과 겨루기를 하게 시키셨다. 나는 얼떨결에 앞에 있는 빨간 띠의 남자분과 인사를 하고 띵- 하는 종소리에 맞춰 겨루기를 시작했다.


사범님은 나 이외의 수련생들에게 초심자인 나를 배려해 겨루기를 하라고 주의를 시키셨다. 그리고 나에게 일단 그냥 해보면 된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배운 것이 많지 않고, 동작을 많이 연습해본 것도 아닌데 겨루기를 한다는 게 이해가 안 돼서 사범님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겨루기를 하는 순간에는 내가 하기 싫어도 앞에 상대가 있고, 그 상대와 함께 훈련 하는 것이기에 내가 대충 겨루기에 임하면 상대는 나 때문에 귀중한 수련 시간을 빼앗긴다. 그걸 잘 알기 때문에, 동작에 서툴지만, 주먹을 내지르고 상대의 공격을 막아 내려고 노력했다. 상대 수련생은 처음인 나를 위해 나의 템포에 맞춰 겨루기에 임했다. 겨루기가 끝임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전까지 누구도 처음인 나를 보며 웃거나, 못하는 나와는 겨루기를 하기 싫어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돌아가며 나와 겨루기를 했던 사람 중 몇몇은 내가 잘못된 동작을 하면 고쳐주기도 했다. 잘못된 습관으로 굳어지면 안 되기 때문에 알려주고 싶었다는 친절한 설명을 해준 사람도 있었다.


그런 배려를 오랜만에 받아봐서였을까? 나만 가득했던 세상에서 벗어나 타인의 템포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순간, 일단 해보면 되는 것들을 겁내고 두려워했던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왜 그렇게 두려워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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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같이 즐거워하면 된다



될지 안될지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실전 감각을 기르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비단 태권도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잘할 수 있을지 걱정하는 많은 일들이 사실은 해보면 별거 아닐 수도 있다. 일단 해본 후, 버겁다고 느끼더라도 하다 보면 적응될 때도 있다.


그래서인지 태권도를 배우는 것이 부담 없이 다가왔다. 태권도가 직업이 아닌 이상은 언제까지 꼭 검은 띠를 따야 한다는 식의 마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나와 상대방의 템포에 맞춰서 수련하면 된다. 태권도를 하는 오늘의 내가 힘들면 좀 쉬어도 된다. 그러다가 실력이 조금 늘면 띠의 색깔이 바뀌는 정도일 뿐이다. 잘하지 않아도, 그냥 하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고 그 동안 다른 사람과 함께 재미를 찾는 게 정말 오랜만이라 간만에 행복했다. 어떤 대가나 목표가 없이도 즐거울 수 있고, 하는 것 만으로 즐거울 수 있으면 그게 바로 취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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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가볍지만, 온전히 내 마음을 줄 수 있는 일종의 도피처는 존재만으로도 큰 위안이 됐다. 나에게 태권도는 그런 존재가 됐다. 물론 아직도 새로운 동작을 배울 때는 내 한계를 느끼고 힘이 든다. 버거울 때도 있다. 하지만 상관없다. 그냥 그 순간에 집중하면 되고, 힘들면 옆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며 쉴 수도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적응된 지금은 내가 먼저 인사할 수 있게 됐고, 처음 온 수련생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건다. 나와 똑같은 마음을 갖고 흰 띠를 매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조급해하지도 않는다. 그냥 계속 지금처럼 즐겁게 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태권도를 간다.



[고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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