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인간이기를 고군분투하는 사람, <나, 다니엘 블레이크> [영화]

글 입력 2019.03.12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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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를 봤다.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인터넷 검색창에 ‘복지’를 쳐본 것이다.



"복지"


삶의 질에 대한 기준을 높이고,

국민 전체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어 노력하는 정책



이 영화를 본다면 아마 ‘복지’의 정의가 상당히 낯설게 보일 것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이러한 복지의 정의가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모순된 실상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인간의 삶과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는 ‘복지’가 관료제의 형태로 인간을 어떻게 훼손시키는지, 지극히 일상 속에서, 인간적인 존재들을 통해서 보여준다.




끊임없는 모욕의 굴레, ‘복지’에 잠식당하는 사람들



영화는 다니엘 블레이크와 한 의료전문가와의 통화로 시작된다.


통화의 내용을 들어보면, 다니엘 블레이크는 심장질환으로 '질병수당'을 신청했지만 심장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팔 다리를 움직일 수 있냐는 식의 질문들만 쏟아진다. 다니엘의 담당의가 일을 더 이상 하면 안 된다고 소견서를 썼음에도 이와 같은 질문들로 결국 다니엘은 ‘근로적합’판정을 받는다. 이에 굴복할 수 없어 항소를 준비해보려고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절차 때문에 일단은 ‘구직수당’이라도 받고자 한다.


그러나 이 역시 복잡하고 까다로운 절차로 다니엘은 곤욕을 면치 못한다. ‘연필 세대’인 56세 다니엘 블레이크에게 ‘복지’를 받기 위해 디지털을 이용하고 뭐든지 서류를 통해 증명해야 하는 복지제도는 거대한 벽이자 끝이 보이지 않는 굴레로 다가왔다. 관료제 아래에서 ‘원칙’대로 움직이는 관공서 직원들은 헤매고 있는 다니엘을 결코 돕지 않는다. 다니엘은 하라는 대로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매뉴얼을 지키지 않았다고 결국 ‘재재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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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주인공 케이티는 서로 다른 피부색을 가지고 있는 두 아이의 미혼모다. 생계가 어려운 그녀는 ‘생계보조수당’을 받아야 하지만 길을 잃어 센터에 몇 분 늦었다고 수당을 받지 못하게 된다. 이 모든 게 ‘원칙대로’라면서 말이다. 급격하게 생계가 어려워진 케이티는 항상 자신의 식사를 아이들에게 양보하다가 결국 식료품 지원소에서 이성을 잃고 통조림을 허겁지겁 먹게 된다.


지원소에서 지원해주지 않는 생리대를 마트에서 훔쳐 걸리기도 한다. 밑창이 다 뜯겨진 아이의 신발을 사준 돈조차 없어, 결국 케이티는 업소까지 가게 된다. 다시 대학을 가는 것이 꿈이라는 한 소녀가 다름 아닌 ‘복지’로 인해 처참하게 무너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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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의 변수도, 조금의 융통성도 허락하지 않는, 마치 기계처럼 원칙대로만 굴러가는 복지의 늪. 이에 다니엘과 케이티는 서서히 잠식당해간다.

“사람이 자존심을 잃으면

다 잃은 것이오.”


다니엘의 외침 속에는 복지제도가 사회적 약자이자 소외계층인 그들에게 부여한 ‘수치심’의 잔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이처럼 관료제의 폐해로 발생하는 일상의 잔인한 비극만을 그린 듯 보이지만 영화를 보면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극 중 케이티의 딸 데이지는 복지제도로 절망에 빠진 다니엘을 찾아와 말한다.


“우릴 도와주셨죠? 저도 돕고 싶어요.”


고용센터에서 케이티를 만나게 된 다니엘이 곤경에 처한 케이티 가족을 찾아가 베풀었던 따듯한 온정을 다시 받는 순간이다. 이 작품을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비극 가운데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해답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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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은 케이티의 집에 가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만들어주고, 전기세 낼 돈이 없어 난방을 못하는 케이티의 집에 자신도 부족한 돈을 몰래 놓고 가기도 했다. 케이티는 그런 그에게 자신은 먹을 음식이 없다는 사실을 숨기고 식사를 제공했다.


또한, 이들을 돕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곁에 있는 이웃들이나 같은 소시민들이었다. 서로를 도우며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다니엘과 케이티 가족은 부당한 일에 항의하기 위해서 서로 ‘같이 걸어준다’ 냉혹한 사회 시스템이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인간의 따듯함. 이로써 설명될 수 있는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 일상의 잔인함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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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소를 위한 재판에서 다니엘은 이러한 대목을 준비해갔다.


“나는 게으른 사람도 사기꾼도 아닙니다.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난 굽실대지 않았고,

이웃이 어려우면 그들을 도왔습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데이지가 다니엘에게 건넨 따듯한 말 한마디가 다니엘이 다시 삶의 용기를 낼 수 있게 만든 것처럼, 근본적으로 ‘복지제도’가 필요한 것은 이러한 ‘따듯함’을 줄 수 있는 ‘인간적 존중’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켄 로치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다니엘 블레이크와 케이티라는 캐릭터가 둘 다 완전히 허구인 동시에 우리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두 캐릭터에 스며들어있다고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캐릭터가 바로 문명의 격차를 따라잡을 수 없어 역경을 겪고 있는 노인분들을 실제로 보고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 영화의 배경은 지극히 현실이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이자 우리의 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에 영화가 비판하는 ‘시스템’에 대해서 진지하게 분노를 하고 변화를 모색하게 만든다. 또한, 급격히 변해가는 시대 속에서 ‘복지’의 올바른 방향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지 다시 한 번 일깨우게 해준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계속 다니엘 블레이크가 남긴 말들이 떠오른다.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이기에 존중되어야 할 권리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나’는 다름 아닌 ‘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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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량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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