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하거도, 씁쓸하고도 불편한 우리의 모습; 연극 <하거도>

연극 <하거도> 리뷰
글 입력 2019.03.11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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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연극 관람에 관심이 솔솔 솟아나는 요즘이다. 새내기 시절 대학로에서 관람한 첫 연극에 흠뻑 빠져든 것을 계기로 대학로 근처에서 학교를 다니는 친구 덕에 대학로 코미디 연극을 많이 보곤 했다. 그러다 연극 동아리에 들어갔고, 코미디에 이어 정극 연극 대본을 읽어보기도 하고 직접 공연도 해보며 연극에 입문했었다.

 

그러다 동아리를 나오고 현실에 지치며 내 삶 속 연극의 자리 또한 점점 좁아졌다. 일상은 바쁘고, 그건 함께 연극을 보곤 했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렇다고 짬을 내어 혼자 보러 갈 정도로 연극을 사랑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지난 겨울 아트인사이트의 에디터를 할 때도 연극 초대가 많이 들어왔지만 돌이켜보니 도서 초대만 많이 받았지, 공연 초대는 클래식과 뮤지컬 단 두 개뿐이었다.


그렇다, 연극은 하나도 없었다. 흥미를 돋우는 공연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시험을 핑계 삼아 주말에 나가기 귀찮다는 이유가 지배적이었을 것이다.


 

하거도_포스터(원본).jpg
 


그런 면에서 <하거도> 관람은 크게 두 가지를 깨우쳐주었는데, 하나는 옛 연극 동아리 시절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며 다시 연극 관람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했다는 것이다(이번 연극은 친구와 함께 관람했고 다다음 주에 볼 연극도 그렇지만 왠지 앞으로는 공연장에 혼자 서성이는 나를 많이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하나는 역시 내 취향은 코미디보다는 정극에 가깝다는 것이다. 코미디를 싫어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울림의 깊이가 다르다고나 할까? 유쾌하게 웃는 것도 좋지만 이것저것 생각하게 만드는 콘텐츠를 좋아해서 그런 듯싶다.

 

연극의 제목인 <하거도> 또한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섬의 이름이자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용은 그야말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시간 순도, 시간의 역순도 아닌 하거도의 머릿속 환영으로 펼쳐지는 재판을 중심으로 그와 섬에 얽힌 모든 이야기가 핑퐁처럼 왔다갔다하며 전개된다. 110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찰나도 집중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이야기의 흐름을 놓칠 수 있으니까.

 

가장 짜릿한 반전은 26-7284를 죽이고 이 재판을 하게 만든 진짜 범인은 하거도가 아닌 그의 아들이었다는 점이었다. 부모자식도, 동료도 없는 삭막하고 메마른 수용소. 그곳만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자랐던 그들에게 외부에서 온 하거도는 희망인 동시에 이용대상이었다. 26-7284에게는 그랬는데, 아들에게 하거도라는 존재는 어땠을까. “너는 늘 나를 아버지라고 불렀지.”라는 하거도의 대사를 통해서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끈이 있는 것 같지만, 아들도 결국 규율을 어긴 어머니를 밀고하고 자신의 이득을 취한 인물이었다. 아니, 아들뿐만이 아니다. 배급이 끊긴 후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누군가가 죽기만을 노리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이곳과 세상을 나누는

담장 따위는 없었어!”


 

살인을 저지른 아들의 목을 조르며 하거도는 처절하게 외친다. 너희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바깥세상도 욕망에 사로잡혀 피로 물드는 이곳과 똑같다고. 스스로 목소리를 숨기고 벙어리로 살며 물드는 것을 거부했지만 하나뿐인 아들마저 그들과 똑같이 변했고, 어릴 적 자신을 지켜주던 유일한 동무는 자신을 이용하려 했을 뿐. 하거도는 스스로 수용소에 불을 지르고, 그에 수감자들을 모조리 죽게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였던 관계자들은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한다.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가 되어 기억하는 이 없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현실을 꼬집는다기에는 과장된 면이 있지 않나 싶다가도 최근 불거진 여러 사태를 지켜보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걸 말하는 것 같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조차도 우리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아니, 이미 벌어지고 있다. 마치 아주 오래 전 하거도의 도민들을 쫓아내고, 반항하는 이들을 가차 없이 죽이고, 수용소를 세워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마지막에는 그들을 죽이려 잔혹한 꾀를 냈던 인간이기를 포기한 ‘인간’들에 의해 이 모든 일이 시작된 것처럼.


 

131.jpg
 


나 같은 쫄보에게는 살짝 무섭기도 했지만 <군함도>의 황정민을 떠올리게 하는 하거도 역 배우님과 더불어 출연자가 많은 연극임에도 캐릭터 고유의 개성이 빛났던 연극이었다. 믿고 보는 창작산실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2019년, 어느덧 이 숫자가 어색하지 않은 3월이 되었다. 비록 현실은 하거도처럼, 때로는 하거도보다 더한 부정과 비리가 판을 치지만 그래도 나의 하루는 늘 떳떳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탄생부터 이름까지 끝내 ‘하거도’를 벗어나지 못했던 그를 기억하면서.

 





하거도
-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


일자 : 2019.03.08 ~ 03.17

시간
화-금 20:00
토 15:00, 19:00
일 15:00

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티켓가격
R석 40,000원
S석 30,000원

주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작
극단 작은신화

관람연령
만 16세 이상

공연시간
1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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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혜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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