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캡틴 마블: 말썽쟁이 중위님들을 위한 영화 [영화]

글 입력 2019.03.10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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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봉 전부터 국내외를 막론하고 캡틴 마블을 향한 팬보이들의 별점 테러와 악담이 쏟아졌다. 브리 라슨의 외모부터 맥락 없는 작품 비방까지. 이는 남성들의 여성 혐오가 어느 한 국가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이들의 극성맞은 행동을 보다 못한 로튼토마토 측은 평가 페이지를 막아놓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예매율은 마블 무비 중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막상 영화관을 가보니 생각보다 많은 남성들이 자리를 차지한 게 아닌가. 보통 여성이 주연인 영화는 여성 관객의 비율이 남성의 두 배 이상인 경우가 대다수다.

반면 캡틴 마블의 예매 현황은 여성이 50% 이상, 남성은 45% 이상으로 비슷한 성비를 유지 중이다. 팬보이들의 앙칼진 반응은 기실 감추고 싶은 관심에서 비롯되었나 보다. 남성이 중심이던 세계관을 페미니즘에 침범 당한 억울함보다 마블에 대한 충성심이 앞서는 듯하다. 나도 어린 시절부터 캡틴 마블, 원더우먼, 제시카 존스 같은 작품을 보고 자랐다면 저들처럼 마블 시리즈에 열광하지 않았을까. 나는 액션 히어로 무비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남성만이 주연이고 여성은 남주의 각성용 매개체로 소비되는 서사에 질렸을 뿐이다. 그래서 여성이 단독 주인공인 영화는 힘이 있다. 신비한 능력을 지닌 히어로가 세상을 구한다는 고전적인 클리셰도 신선해 보이기 때문이다.



캡틴 마블에 없는 두 가지


캡틴 마블은 성적 대상화와 로맨스가 빠진 담백하고 깔끔한 영화다. 남성의 성적 쾌감을 위해 여성 캐릭터를 자위 도구처럼 묘사한 부분이 없다. 손바닥 만 한 옷을 걸친 여성을 관음적으로 연출하여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외적 매력이라는 해로운 의도를 포함하지 않는다. 튼튼해 보이는 수트를 입고 가공할 힘으로 탄도 미사일을 막는 여성, 조종석에 앉아 헬기를 다루는 여성의 노련함만이 빛난다. 캐럴은 남성이 구해주기만 기다리거나 민폐를 끼치는 여성이 아니다. 스크롤에게 포로로 붙잡힌 상황에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 자신만의 힘으로 적지를 탈출한다. 그를 보면 당장 근육 운동에 돌입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충만해진다. 또한, 남성과의 로맨스를 인생에 있어 중대한 부분으로 설정하지도 않고 이로 인해 판단력을 상실하지도 않는다. 대신 마블에는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들이 곳곳에 스며들어있다.

문서를 살피던 캐럴에게 어떤 남성이 슬쩍 다가와 말을 건다. 그는 무슨 심각한 일이 있냐고, 웃어보라고 한다. 처음 보는 여성에게 권위적인 상사처럼 지시 내리지만 남성은 대화의 시작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캐럴이 어떠한 미소도, 호의도 보이지 않자 남성은 또라이라는 말을 읊조린 후 사라진다. 여성이 일상에서 부지불식간에 맞닥 들이는 캣콜링, 남성에게 무조건적인 호의와 상냥함을 베풀길 바라는 압력이 담긴 장면이다. 그리고 그 기대가 어긋날 때 보이는 공격성은 여성을 위협한다.

실제로 남성들은 영화의 홍보 포스터에서 브리 라슨이 지은 무표정을 마구 비난했다. 심지어 그의 표정을 웃는 모습으로 편집하는 정성까지 내보인다. 이에 브리 라슨은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의 심각한 표정이 미소로 바뀐 포스터를 SNS에 공유한다. 브리 라슨이 유쾌하면서도 날카로운 미러링으로 대응하듯이 캐럴 또한 남성의 무례함과 적대감에 전혀 위축되지 않는다. So what? I don't care. 그래서 어쩌라고. 네가 어떤 말을 내뱉던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로 남성의 오토바이를 갈취해 유유히 제 갈 길을 떠난다. 그는 히어로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덕목을 갖췄다. 쓸모없는 말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살포시 즈려밟는 자질 말이다.

캐럴의 베스트 프렌드이자 동료인 마리아를 Young lady라고 부른 장면도 포인트다. 마리아는 한 번 더 Young lady라고 부르면 니 엉덩이를 차버릴 거란 대사로 응수한다. 어린 딸의 생계부양자인 가장에게 young lady가 웬 말인가. 성인 여성을 아이 취급하는 것은 여성의 나이 듦과 성숙함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강인한 여성도 타인의 손길이 필요해 보이는 미숙한 여성으로 축소시키려는 시그널이다. 그러나 마블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자신이 겪는 선입견과 부당한 대우에 순응하지 않는다. 캐럴이 마블의 히어로 중 가장 강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특별한 힘을 얻기 전에 이미 영웅적 면모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괴력이 없이도 주어진 현실을 바꾸고 개척해 나가는 용기를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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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썽쟁이 중위님들을 위한 영화


여자는 영업직에 안 맞죠. 여자는 수학에 약해요. 여자가 하긴 힘든 일이에요. 여자는, 여자라서, 여자니까 "안 돼" 여성의 성장을 가로막는 유리천장의 언어들이 스크린을 뚫고 나와 고막을 울린다. 넌 조종사가 될 수 없어. 여자와 조종석은 안 어울려. 너무 감정적이야. 분노를 다스려. 네가 가진 능력을 쓰지 않고 날 이길 수 있어야 해. 캐럴의 아버지, 크리족 사령관, 인간 남성 동료들은 한치의 망설임 없이 오만하게 여성의 한계를 규정한다. 하지만 캐럴은 좌절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어린 시절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호된 꾸짖음을 당해도 일어서고, 공군 훈련 중 쓰러진 그를 비웃는 남자 훈련생들 앞에서 당당히 일어선다. 캐럴은 투지 넘치는 눈빛으로 지긋이 정면을 응시한다. 그리고 말한다.

난 평생을 통제 당한 상태로 싸워왔어. 만약 내가 자유로워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많은 여성들이 이 부분에서 눈물 흘렸다고 증언한 것처럼 나 역시 벅차오르는 감정에 휩쓸렸다. 마치 가부장제가 조립한 허구의 인물에 갇혔던 여성이 자아를 깨닫고 발산하는 맹렬함과 같았다. 그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보였고 남성 중심 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이 투영 되었다. 드디어 공감할 수 있는 히어로가 등장한 순간이다.

과거의 기억을 되찾은 캐럴이 욘 로그와 벌이는 격투신에서는 Just a girl이 흘러나온다. 가사는 연약하고 수동적인 여자애로 머물길 바라는 시선이 지겹다고 전한다. 캐럴의 가차없는 주먹질은 남성의 세계가 박살 나는 해방감을 맛보게 해준다. 캐럴은 남성들이 일군 법칙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억압을 대물림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여성을 신뢰하고 각자가 지닌 잠재력을 믿는다. 마리아의 딸에게 말썽쟁이 중위님이란 별명을 붙여줌으로써 어린 아이의 가능성을 제한하지 않는다.

이처럼 어린 여성들의 성장력이 부정당하지 않고, 그들이 가진 실력을 백 퍼센트 발휘할 수 있다면, 아마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진 세상이 될 것이다. 가스라이팅보다 용기와 희망을 먼저 배우고 자란 여성이 어떤 삶을 영위하고 어떤 세상을 구축할지 궁금해지지 않나. 남자 주인공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창백한 백설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숲속의 공주 대신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올바름을 추구하며, 적을 제압하는 건강한 히어로가 아이들의 사고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하다. 그 어느 때보다 미디어의 영향력이 막강한 시대를 살아가는 어린 여성들에게 캡틴 마블은 여성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긍정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여성들이 삶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실행할 자신감과 롤모델을 심어준다. 저 아이의 활짝 웃는 모습을 보라. 이것이 우리에게 더 많은 여성 히어로가 필요한 이유다.

           
[장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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