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늘 나는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잃었다. [사람]

피할 수 없는 혐오사회의 고찰
글 입력 2019.03.06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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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남과 여, 여와 남의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이전에도 성별 간의 폭력적인 범죄와 문제들은 꾸준히 발생했지만 이렇게나 ‘성별’만으로 서로를 ‘혐오’하는 사회는 왠지 낯설게만 느껴진다. 이러한 혐오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차마 꺼림칙해 들여다보지 않았다. 나와는 상관이 없을 것이라는 냉소와 그 속에서 펼쳐지는 무한한 것들이 두려워 열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원하지 않아도 맞닥뜨릴 수 밖에 없는 문제들이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런 허무한 감정을 느끼게 된 데에는.




허무한 감정의 시발점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새 앨범이 발매되었다. 평소에 노래를 관심있게 찾아보고 듣는 편이 아니라 최신곡은 잘 모르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신곡은 꾸준히 찾아듣는다. 습관적인 행동처럼 재생버튼을 누르고 노래를 들어보았다. 역시나 만족스럽다. 현실공간을 밀어내 버리는 몽환적인 목소리.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듯한 멜로디.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전자악기소리. 시간이 흐를수록 빨라지는 비트에 좀처럼 즐거운 기분을 주체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의 감상평도 궁금해 포털사이트에 검색을 해본다. 그러나 원치 않던 글을 보게 되었다.


"여혐 논란"


전에 성별을 칭한 부정적인 노래 가사말로 여혐논란이 일었다. 쉽게 눈 돌릴 수 없었다. 자세히 찾아보면서 더욱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최근 들어 남자와 여자, 성별의 대립구도가 거세지고 있다. 개인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매체들이 발달하면서 익명으로서의 장점을 함부로 오용한다. 그리고 한동안 억눌려있던 불합리함을 소리높이고 사회적 관습이 사라지고 변하면서 그 대립이 싸움으로 번져나간다. 이제는 그저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혐오’를 한다. 이 혐오 사회에서 이제는 ‘함부로’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음악하는 여자는 징그러

시집이나 보면서 뒹굴어 아가씨


- 검정치마 2집 수록곡 <음악하는 여자> 가사 중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잃었다.



유명한 기업이나 인플루언서들이 옳지 못한 행동, 언행을 하였을 때 혹은 보편적으로 옳지 못한 사상이나 관념을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내면 많은 사람들의 뭇매를 맞는다. 그리고 사회적인 이슈가 되어 불매운동으로까지 퍼져나간다. 생각해보니 최근 들어 내가 지금까지 보고 느꼈던 많은 것들이 논란의 연속이었고 그런 것들은 내 가치관으로 판단한 후에 계속 소비하거나 중단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것은 상품, 브랜드, 미디어, 작가의 책, 연예인 등 다양하다.


지금까지 논란이 되었고 내 판단으로 계속 호감을 유지하거나 아니면 지워버렸던 수많은 것들에 대해 지나쳐 생각해본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한 명의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잃었다. 지금의 사회 분위기에서 충분히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가사였고, 그것에 대한 입장도 너무나 흐지부지 마무리됐다.



"<음악하는 여자>는 누굴 비난하려는 의도가 전혀 아니에요. 2009년에 있었던 일 중에 그런 영감을 주는 게 있었을 뿐이에요. 진심도 들어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썼다고 생각해주세요. 특히 후렴구는 기타를 치다가 저절로 나왔죠."


- 얼루어 2011년 8월 인터뷰



한 번이 아닌 여러 번의 논란이 일었고 이번 새 앨범의 수록곡에서도 여성을 낮잡아 비하하는 "계집아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쓰인 단어들이 지금은 잘못된 단어라는 것을 알았다면 여성혐오 논란이 일어날 것을 예상해야 하지 않을까?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어보인다.


하지만 이런 생각 또한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아티스트가 사회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불순한 의도 없이 자신의 가치관을 이야기하려던 것이고, 단순한 언어를 예술로 극대화된 표현을 하기 위해서 혹은 그로테스크함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자극적인 단어를 쓴 것이라면, ‘혐오’논란으로 한 사람이 특정성별 전체를 ‘혐오’하는 것으로 간주해버려도 되는 것일까? ‘혐오’라는 하나의 극단적인 단어에 갇혀 자신도 모르게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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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확실한 기준이 있지 않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자신도 모르게 잘못을 저지르거나 자신도 모르게 어떤 대상을 미워하게 될 수 있다. 사람마다 각각의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는 그것의 옳고 그름을 잘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에 던져지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주관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쉽게 판단해버린다.


우리는 대체 언제쯤 여자와 남자의 차이를 인정하고 배려하면서, ‘사람 대 사람’으로 들여다보게 될 수 있을까? 변화의 걸음을 옮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변화시켜야 본질에 집중하지 않고 너무나 편향된 시각으로 비난과 대립에만 집중하는 것이 조금 안타깝다. 오늘도 미세먼지 가득한 혐오사회에서 씁쓸하고 피곤한 하루를 보낸다.



[김혜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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