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천재, 그리고 나머지? [공연예술]

천재가 아닌 우리를 대변하는 연극, 뮤지컬 두 편
글 입력 2019.03.05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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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그리고 나?



누구나 어린 시절에는 천재를 꿈꿨을 것이다. ‘선천적으로 남보다 능력이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는 정의가 무색하게도 어렸던 우리는 모두가 누군가에게(주로 부모들에게) 천재였고, 자신도 어느 한 분야의 천재로 성장할 미래를 바랐을 테다. 과학자를 꿈꾼다면 세기의 발명을 하기를 바라지, 다른 누군가의 조수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 필자 역시도 어린 시절, 요리사부터 화가까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꿈꿨다. 물론 지금도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으나 어렸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막연히 황금빛 인생을 꿈꾸며 언젠간 나의 천재성이 발굴될 것이라 믿는 사람으로는 성장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필자는 길을 걷다 ‘10명 중 9명 합격’이라는 홍보 문구를 보는 순간 합격한 9명보다 탈락했을 1명에 공감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하필 필자의 전공은 미술이다. 예술은 천재에 열광한다. 물론 세상 전부가 천재에 열광하고 있고, 모든 분야에서 이름이 남는 사람들은 극소수의 뛰어난 사람들임이 자명하지만, 예술의 세계는 더욱더 그렇다. 어떠한 다른 분야들보다도 천재성이 덕목으로 여겨지는 분야임에는 부정할 여지가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스스로 자신의 재능에 만족하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예술가를 다룬 이야기에 필자가 심히 공감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뮤지컬 <랭보>의 베를렌느가 울 때 함께 울었고 뮤지컬 <서편제>의 송화가 힘들어할 때 함께 힘들어했다. 필자뿐 아니라 비슷한 생각과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뇌리에 깊이 박혀있을 명대사가 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 등장하는 비운의 음악가 살리에리의 말이다.



하느님께서 내가 주님을 음악으로 찬미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면, 왜 내게 그런 욕망을 심어주셨습니까, 욕망을 심으시고는 왜 재능은 주지 않으셨습니까. <1984, 영화, 아마데우스>



이 영화를 세 번쯤은 본 것 같다. 영화 내의 모든 화려한 장면들과 아름다운 모차르트의 음악들보다도 기억에 남는 것은 살리에리의 그 대사였다. 구체적으로 비슷한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어렴풋이 담고만 있던 말을 대신해 주는 것만 같았다. 공감에서 오는 위로가 있다. 가지고는 있지만, 선뜻 내보일 기회도, 마음도 없었던 불편한 이야기들을 누군가 대신해 준다면, 거기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공감과 위로를 얻을 수 있다. 많은 이야기가 그런 방법으로 우리의 마음을 달래주고는 하지만, 그중에서도 천재가 아닌, 평범한 우리를 대변하는 연극과 뮤지컬을 각각 한 편씩 소개한다.




평범한 우리를 용서하며

연극 <아마데우스>



앞서 언급하였던 영화는 사실 동명의 희곡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의 무대에도 올랐던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다. 극은 모차르트를 향한 경탄과 질투, 신에 대한 저주를 이야기하는 실리에리의 회고와 독백들로 이루어진다. 살리에리 증후군(Salieri syndrome)이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일인자를 향한 이인자가 가진 열등감의 상징이 되어버린 살리에리지만, 실제로 그는 당대에 굉장한 부와 명예를 거머쥔 성공한 음악가로 모차르트를 향한 강렬한 질투심은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한다. 어찌 보면 궁정 악사의 자리까지 올랐던 그가 재능이 없는 평범한 사람으로 그려지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누군가에겐, 적어도 필자에게는 천재의 곁에 있는 권력자이자 또 다른 천재 살리에리보다는 천재의 곁에서 괴로워하는 범재 살리에리가 더 매력적이다. 현실에서 같은 분야의 천재를 질투하는 권력자가 있다면 그는 비열하고 치졸해 보이기 마련이지만, 이야기 내에서라면 다를 수 있다. 가지지 못한 재능을 질투하고 신을 원망하는 살리에리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일면과 닮아있다. 우리 역시 한 번쯤은 타고나지 못한 외모나 재능 혹은 물려받지 못한 재력 탓에 신이나 세상을 원망해 본 적이 있지 않은가? 지금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아마데우스 1.jpg

사진 출처 : PAGE1 공식트위터



모차르트의 천재성은 우리를 경탄하게 하지만, 살리에리의 평범함은 우리를 공감하게 한다. 넘을 수 없는 재능을 마주했을 때, 나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평범하고 지루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을 때, 세상을 원망하고 신을 저주하는 것이 보통이고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라는 위로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천재가 아닌 평범한 우리의 비극을 대변해줄 사람, 우리의 평범함을 용서해 줄 존재. 천재들의 수호자보다는 평범한 자들의 수호자, 살리에리가 각별한 이유다.




우리는 모두 천재였다.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어쩌면 살리에리보다 우리와 더 닮은 인물이 여기 있다.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의 ‘토마스 위버’다. 극 중 베스트 셀러 작가인 토마스 위버는 자신의 죽은 친구 앨빈 캘비의 장례식에서 읊을 송덕문을 준비한다. ‘특별함’ 혹은 ‘특이함’으로 불리는 그의 친구 앨빈 캘비는 천재다. 그가 어떠한 대단한 업적을 이룬 것은 아니다. 되려 수많은 작품을 베스트 셀러의 반열에 올린 위대한 작가 토마스 위버야 말로 세간에 천재로 기억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켜보는 관객은 안다. 결국 토마스도 직면한다. 자신의 모든 이야기는 앨빈에게서 나왔고, 진짜 재능이 있던 것은 앨빈이라는 사실을. 천진했던 그가 왜 자살을 택했는지, 어느 순간 앨빈의 길이 잘못되었는지 고민하며 기억을 되짚어 보기 시작하던 토마스는 마침내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채 길 위에서 끝을 향해 내달리고만 있던 자신을 발견한다.



지금 내 말대로 하면 인생 편해진다

널 보호하는 것도 힘들어

자 또라이 앨빈 이제 안녕

내 친구로 남고 싶다면 평범해져

나처럼


-Normal



함께 책방의 영혼들에게 책을 부탁하는 의식을 벌이고, 선생님의 장례식장에서 죽은 선생님의 영혼이 행복한 ‘디즈니랜드’로 떠난다고 믿는 둘은 확실히 특별하거나, 적어도 특이한 아이들이었다. 그 또래의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말이다. 그러나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평범해지길 택한다. 토마스는 앨빈에게 개성은 위험한 것이니 평범해지라 말한다. 그건 토마스가 선택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우리 역시 안전해지기 위해 평범함을 선택한다.


그 때문에 토마스의 일부를 비난할 수는 있으나 전부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는 스스로 평범해지길 택했으나 그 평범함에 끊임없이 괴로워하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남들보다 특별히 더 대단한 이유는 괴로움을 외면하고 앞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다가도 마침내 고개를 돌려 자신을 이루는 것들과 자신이 바라보아야 하는 소중한 것들에 직면했다는 점이다. 그를 통해 그는 특별한 사람으로 돌아온다. ‘저희 아버지 이야기해 드릴게요’로 시작하는 앨빈의 즉석 송덕문과 ‘제 친구 앨빈 이야기 하나 해 드릴게요’로 시작하는 토마스의 송덕문은 그 결이 같다. 앨빈에게서 도망쳤던 토마스는 결국 다시 돌아와 마주하길 택했다.



솜1.jpg
사진 출처: 오디 뮤지컬 컴퍼니 공식트위터



마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무언가 나를 괴롭게 만들 때, 그것이 인간관계든, 창작활동이든, 어느 것이든 회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괴로움을 이겨내는 방법이다. 알지만 어렵다. 그러나 기억하고 있다면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특별했고, 평범함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라는 사실을. 평범함이 우리의 선택이라면 우리는 언제든 다시 특별함을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의 아름다운 노래들 중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자, 특별했던 어린 토마스의 꿈을 보여주는 곡 '1876'을 끝으로 글을 마친다.





[김민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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