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 <일루셔니스트>, 마술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

환상과 현실의 간극이 깊어질수록
글 입력 2019.02.22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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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보다 적막이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 공연장에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남자가 등장한다. 얇고 긴 다리에 발목위로 올라오는 짧은 바지를 입은 그의 눈 주위에는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는 일루셔니스트(illusionist), 마술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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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루셔니스트>는 포스터에서부터 동화 같은 첫인상을 받을 수 있다. 사람의 손작업이 느껴지는 펜 터치. 그 위를 칠해 놓은 수채화의 따뜻함 색감. 이 영화가 그리는 1950년대 유럽의 풍경은 현실 사진이 아니기 때문에 줄 수 있는 서정적인 감각이 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음악과 소리도 동화적인 분위기에 일조한다.

이 영화는 대사가 없다. 몇 가지 대사가 등장하긴 하지만, 한 두 마디에 끝날 정도로 길이가 매우 짧고 그 소리 또한 분명하지 않게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린다. 그래서 이 영화의 그림 위를 채우는 것은 적막, 주위의 소음, 또는 음악이다. 여기서 음악은 요란스럽지 않고 잔잔하다. 그림과 음악이 만들어내는 이 동화 같은 분위기는 영화에서 전개되는 어둡고 우울한 상황을 덜 부담스럽게 만든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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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분위기와 다르게 이 동화 속 이야기의 과정과 결말은 행복의 연속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 전체를 대표하는 단어는 행복보다 불행에 더 가깝다.

영화 속 주인공인 마술사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름 한 번 언급되지 않는 무명의 마술사다. 그래서 마술사는 한 무대에 오래도록 머무르지 못하고 계속 다른 무대를 찾아다닌다. 무대를 전전하던 마술사는 어느 날 앨리스를 만난다. 앨리스는 마술사의 손에서 자신이 쓰던 비누가 새 비누로 재탄생되는 것을 보면서 그의 마술을 마법으로 믿게 된다. 그가 떠나는 날 앨리스는 몰래 그를 따라 나서고 뒤늦게 그것을 알게 된 마술사는 차마 앨리스를 밀어 내지 못한다. 결국 현실 속에 사는 마술사는 환상(illusion) 속에 사는 소녀와 동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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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동행에는 다양한 쇼맨이 등장한다. 웃음과 행복을 파는 그들은 영화에서 그 이면의 불행을 상징한다. 아이들에게 구타당하고 자살을 기도하는 피에로. 자신의 정체성인 말하는 인형을 팔고 그 돈으로 술을 마시는 복화술사. 그리고 그들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자신이 원하는 환상을 하나씩 내려놓는 순간마다 그들과 대비되는 앨리스가 등장한다.

앨리스는 환상과 현실의 중간지점이자 마술사의 환상(꿈)을 대표한다. 마술사는 앨리스의 환상이자 마술사가 가져야 하는 신비로움이 무너지지 않도록 노력한다. 세차와 간판 제작 등을 하면서 현실에서 번 돈을 앨리스를 위한 마술에 소비한다. 마술사의 환상 속에서 원하는 것을 얻은 앨리스는 우연히 알게 된 또래의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새로운 환상(사랑)을 얻은 앨리스와 그것을 알게 된 마술사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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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타협해 백화점 쇼윈도 뒤에서 여성용품으로 마술을 하던 마술사는 자신의 옷과 짐을 챙겨 앨리스와 숙박하던 호텔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온 앨리스 앞에 몇 장의 돈과 “Magicians do not exist."라는 문장이 새겨진 쪽지 한 장이 남겨져 있다. 마술사의 환상에서 벗어난 앨리스는 자신의 새로운 환상을 쫓아 남자와 함께 군중 속으로 사라지고, 마술사는 기차 객실에서 앨리스와 비슷한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에게 새 색연필 대신 아이가 원래 쓰던 색연필을 쥐어 준다. 앨리스에게 마술사로서 새 비누를 만들어 주던 그는 이제 기차를 타고 마술사가 없는 현실로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가 주인공인 이 영화 속 유럽의 가로등과 간판들 극장의 불은 모두 암전. 일루셔니스트의 무대는 막을 내리고 관객들은 현실로 돌아왔다.


[고승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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