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정신에 취한 척,

글 입력 2019.02.18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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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정신에 취한 척,

    

취하고 싶다. 맨정신이지만, 술에 취하고 싶다. 그래서 취한 척, 여기에 글을 끄적이고 있다. 타닥타닥- 타자 치는 이 소리가 나를 진솔하게 만든다. 반환점에 선 난, 머리가 너무 복잡해 아무 이야기나 이곳에 쓰고 싶다.



 

Part. 1 첫사랑



인생에서 사랑을 빼놓을 순 없지. 부모와의 사랑, 친구와의 사랑 등 여러 종류의 사랑이 있지만 아무래도 가장 공감하는 건 연인과의 사랑. 제일 중요한 것도 연인과의 사랑. 슬픔과 기쁨의 감정을 조종하는 것도 연인과의 사랑. 난 4번의 만남이 있었다.


일단 ‘첫사랑’에 대한 나만의 정의부터-.

 

내가 생각하는 첫사랑은, 처음 사귄 사람이거나 처음 좋아했던 상대가 아니다. 지금까지 만난 남자 중 제일 사랑한 사람이 첫사랑이라 생각한다. 그렇다, 첫사랑은 바뀔 수 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연애를 할수록 상처와 겁이 많아진다. 특히 마음 일부를 깊은 곳에 숨겨두기 때문에 상대에게 100% 다 내어줄 수가 없다. 그 일부는 앞으로 받게 될 상처로부터의 자기방어이다. 그래서 순수하고 재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던 ‘그때의 나’를 다음의 사랑에서 기대하긴 힘들다. 그렇기에 첫사랑은 쉽게 바뀔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내 첫 남자친구는 첫사랑이다.

 

그와의 만남은 짧지만 굵었다. 때는 고등학생이었던 시절.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공부만 하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그 생각을 바꾸게 한 사람을 만났다. 학기 초, 애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 멋쩍어하며 번호를 묻던 그. 웃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번호를 알려 줬다. 얼결이었기에 막상 번호를 주고 나니 정신이 들었다. ‘문자로 관심 없는 티를 내서 연락이 끊기게 해야겠다.’란 작전으로 그와의 문자에 임했다. 지금 생각하면 귀엽다. 무슨 미션도 아니고 둘 다 참... 아무튼, 처음 일주일간은 ‘?’ 를 한 번도 보내지 않았다. 그는 ‘밥 먹었냐, 뭐 하냐, 좋아하는 게 뭐냐’ 등등 많은 것을 물었지만 난, ‘너에 대해 궁금한 건 없어!’란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다 보니 일주일간 그의 이름을 몰랐다... 나중에 이름을 물을 때, 그가 많이 당황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걸 이제야 묻냐며, 지금까지 모르고 연락한 거냐며. 살짝 미안했다. 후에 알고 보니 학교에서 꽤 인기 있는 사람이었더라. 그래서 자기 이름을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한 걸까?


그는 여러 달 동안 날 열 번 찍었고, 난 넘어가는 나무가 됐다. 하지만 사귄 기간은 두 달. 이별의 기간은 3년. 학생 때만 있을 수 있는 순수함으로 내게 많은 사랑을 줬던 사람이었다. 나 또한 받은 것 이상으로 그를 사랑했지만, 그때의 나는 그걸 표현하지 못했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추상적이기에 깊이와 정확도를 알 수 없는 감정이다. 이 때문에 제일 듣고 싶은 말 혹은 제일 하고 싶은 말이 ‘보고 싶다.’이다. 왜? 그야, 사랑은 확인하기 힘들지만 지금 당장, 하루라도 빨리, 매일 그 사람의 얼굴이 그립다는 표현이니까. 추상적인 게 아닌 보고 싶단 확실한 애정의 감정. 그래서 지금까지도 아쉬운 건, ‘사랑해’가 아닌 ‘보고 싶어.’라는 말 한 번 못 했던 거.


이별의 이유는, 우리가 어려서이다. 당시 학교엔 내가 바람을 핀단 소문이 돌았고 내게 직접 물을 용기가 없던 그는 내게 연락을 뜸하게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난 ‘벌써 내가 질렸구나.’라고 생각해서 헤어지자고 했다. 이 말에 대한 답으로, 그는 내게 자신이 왜 연락을 잘 안 했는지, 진짜 몰라서 묻는 거냐고 했다. 거기서 난 이유를 물었어야 했다. 하지만 어렸던 과거의 그때는 자존심 때문에 묻지 않았다. 사랑 앞에서 자존심 따위가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그랬을까, 멍청했다. 그렇게 우린 헤어졌다. 실은, 아직도 그 소문의 실체를 모른다. 누가 어떻게 처음 그런 말을 했는지. 설령 내가 바람 핀 것처럼 보일 만한 행동이나 말을 했을 수도 있겠지. 기억엔 없지만 바람 핀 게 아니란 걸 확실히 안다. 당시 난 그 한 명만 만났고, 그 한 명만 마음에 품었다. 기억은 없어도, 내 감정은 내가 잘 아니까.

 

내 첫사랑은 이랬다. 그와 데이트하기 전, 샤워할 때부터 수줍었고 부끄러웠다. 자기 전에 실실 웃고, TV를 보다가도 그가 생각나 실실 웃고. 그리고 막상 만나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내 심장 소리가 들릴 만큼. 그땐 문자 시절이라서 “사랑해” 이런 문자가 오면 괜스레 좋아서는 ‘문자 보관함’에 저장하곤 했다. 만나기 직전에 “어디까지 왔어?”라 묻는 문자에 답장하는 도중 그의 얼굴이 멀리서 보이면 두근 두근 두근. 아, 이걸 읽는 신입생들은 이 문자의 ‘맛’을 모르고 연애했겠지? 답장이 오기까지 기다리는 순간의 떨림을. 그래서 내 첫 이별은 꽤 길었다. 이유는 억울함과 아쉬움-.

 

난 너 하나만 좋아했는데, 넌 날 나중에 떠올리면 바람 핀 나쁜 애로 기억하겠지. 보고 싶단 말 한 번 할걸.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그치?

 

 

이 아픔은 3여 년 후에 내가 그에게 연락할 기회가 생긴 날, 내가 얼마나 사랑했고 진심이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억울했는지를 전하고서야 끝이 났다. 그와는 한창 좋을 때 헤어졌다. 밑바닥까지 가지 않았다. 그래서 좋은 기억밖에 없다.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랑받았던 기억이 평생을 사는 힘이 될지 누가 압니까?” 이 말이 맞다. 내가 외롭고 힘들 때 그와의 추억은 내게 큰 힘이 됐다. 길진 않았더라도 나 하나 사랑해 준 사람이 있었음이. 당시의 난 10살 터울의 친오빠의 수많은 바람을 옆에서 보고 커서 남자를 전혀 믿지 않았다. 거기다 스킨십에 대한 트라우마까지 더해져서, 당연히 바람피우는 존재, 원나잇을 하는 사람, 안마방을 가는 동물이라고 생각하며 혐오의 수준이었다. 메갈같은 그런 특정 집단들의 그런 건 아닙니다) 그리고 평생 진정한 사랑 한 번 못 받고 죽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그를 만나면서, ‘아... 세상 모든 남자가 똑같은 게 아니구나. 다른 남자도 있구나.’ 싶었다. 그를 회상할 때면 어느 날 점심시간에 줄을 서다가 하늘을 봤는데 햇볕이 너무 따스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제일 먼저 난다. 참 기분 좋은 하늘이었다. 살고 싶단 생각이 강하게 들 정도로.


한 번은 친구가 “몇 년을 못 잊고 그 오빠를 보고 싶어 하는 건 그냥 네가 미화시킨 추억 아니야?”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친구는 2년 뒤 사랑을 해 보더니, “이제야 네가 이해가 가네...”라고 했다. 친구는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술에 취해선, 집에서 가위로 자신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자르고 가발을 쓰고 다녔다. 얼마나 웃긴지! 그리고 전에 친구가 미화시킨 게 아니냐 물었던 질문에 난 이렇게 답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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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야, 아니야. 성인이 되고 다른 남자를 만나도 아니,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 그가 내 첫사랑이란 게 더 확실해졌어. 난 사랑이었어. 그리고 그도 사랑이었다고 기억할래.”

 

 

 

Part. 2 이기적인 나, 집착하는 너



두 번째 만남은 꽤 길었다. 1년 11개월. 내가 지금껏 한 연애 중 가장 긴 시간이다. 그를 만났던 때는 내가 19살이 되는 1월 1일. 자퇴생이라 자유로웠지만, 수능을 포기하진 않았고 첫사랑을 못 잊고 있던 때다. 공부해야 할 시기였지만, 한 번 사랑을 받아 보니까 그 느낌을 계속 원하게 됐다. 당시 애정결핍이었던 나는 2주도 채 되지 않아서 그의 고백을 받아들였고 우린 매일 만났다. 약 2년간 신기하게도 같은 지역에 살게 됐었다. 그래서 명절이나 여행 빼곤 정말 매일매일 만났다.


난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는... 사랑의 일부랄까, 사랑을 넘어선 거랄까 하여간 내게 집착을 했다. 요즘 많이 다뤄지는 ‘데이트 폭행’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딱 한 번 큰소리치며 강남 한복판에서 욕한 적이 있지만 딱 그때 한 번이었다. 애정결핍 때문인지 그의 집착을 오히려 즐겼다. 그는 사귀는 동안 크게 잘못한 건 없었다. 있었다면 내 기억력과 성격상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을 테니. 오히려 내가 꼬투리를 잡으면서 시비를 걸었고 헤어지잔 소리도 달에 한 번은 했던 것 같다. 이걸 읽고 있는 독자들이 이 파트에서 내게 욕을 해도 난 할 말이 없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난 이기적이고, 철부지였고, 싸가지 없고, 사랑을 이용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내가 데이트 폭행의 가해자이지 않을까?


난 정신적으로 아픈 부분이 있다. 안타깝게도 그를 알게 됐을 무렵에 그걸 알았고 그땐 그 감정들을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서 다, 전부 다- 표출했다. 그때 내가 왜 그렇게 나빴는지 핑계를 대자면 이게 핑계다. 지금에서야 시간이 지나면서 조절이 가능해진 거고. 혹여나 싶어서 사귀기 전에 그에게 말했다. 또한, 개인적으로 스킨십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데 이것 역시 알고 있었다. (아, 내가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하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괜한 오해는 없길 바란다) 사실 이 이유로 첫사랑과 손 한 번 못 잡아봤던 거였는데 23살의 건장한 그는 그걸 다 안 상태에서 고백했다. 이 사람과 만나면서 처음으로 연인의 손을 잡아 봤다. 사귀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손과 포옹 정도는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한계는 있었고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날 이해해줬다. 그는 내게 정말 잘해줬다. 아마 평생을 가도 그 사람만큼 내게 잘해주는 이는 없을 거다. 확신하고 또 확신한다. 그래서 미안하고 더 미안한 사람이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내가 헤어지자고 말했더니 바로 우리 집 앞으로 와서는... 무릎 꿇고 빌었다. 울면서…. 그 모습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툭하면 우는 울보는 아니었다. 내게 써준 손편지만 해도 30통은 넘을 거다. 전과 달리, 카카오톡을 했던 때라 편지는 달콤한 매력이었다. 새벽에 아팠을 때 지하철 세 정거장 거리를 뛰어와서 죽을 주고 가기도 했다. 하물며 내가 남자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믿음을 주려 많은 노력을 했다. 예를 들면, 대학교 복학 후 점심시간마다 먹는 밥과 함께 먹는 친구 사진을 찍어서 보냈다. 남자랑 먹는다는 일종의 인증샷. 게다가 듣는 강의마다 여자가 몇 명인지도 알려줬다.


그를 사랑하진 않았지만 좋아는 했다. 그래서 나는 매번 그에게 잡혔다. 아니면 계속 사랑받는 느낌을 느끼고 싶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다행인 건, 좋아한 감정이 있었으니까 나도 그에게 잘해 주고 애정을 주고, 표현했다는 것. 하긴, 나도 잘한 게 있으니 그도 나와 계속 만날 수 있었던 거겠지. 자주 싸웠지만, 항상 매번 먼저 져줬던 그와의 헤어짐은 간단했다. 사귀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진짜 그를 위한다면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고 하면서 헤어졌다.


헤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서 난 썸을 탔다. 이러지 않으면 그가 또 찾아와서 잡을 것 같아서. 그런데 영화 한 편을 찍어버렸다. 그 날은 상당히 추웠고 눈도 내렸다. 썸남은 날 집 앞까지 바래다 주었고, 집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전 남친과 만나게 됐다. 전 남친은 내게 썸남과 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 집에 들어가 있으라 했다. 하지만 걱정돼서 몰래 골목에서 지켜봤는데 전 남친이 갑자기 무릎을 꿇더라. 둘의 얘기가 끝나고 썸남이 와서는 “니 전 남자친구가 나한테 부탁하더라. 정말 잘해주라고. 제발 잘해달라고. 울더라.”라고 말했다. 난 끝까지 잔인했고 그는 끝까지 미련한 바보였다.

 

 

정말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건 따로 있다. 그와 헤어지고 몇 달 뒤, 이틀 정도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는다. 그냥 그가 경찰 공무원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던 것만 기억난다. 근데 그 연락 이후, 2년이 지나서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당시 나는 자존감이 매우 낮은 상태였는데 그는 마지막까지 날 위해줬다. 그는 경찰 공무원에 붙었다고 했다. 난 진-짜로 놀랐다. 그는 멍청했고 전공도 전혀 다른 보컬 쪽이었기 때문에 붙을 거란 상상조차 못 했으니까. 기본 상식도 전혀 없던 무지한 그에게 어떻게 붙었냐고 물었더니, 그가 말했다. 경찰 공무원을 준비 한 2년 동안 내가 써 준 편지와 내 사진을 보면서 학원과 독서실을 오가며 악착같이 공부했다고. 그리고 예전 연락 때, 그가 자신이 시험에 붙으면 얼굴 한번 보자고 물었고 내가 알겠다고 했다더라. 그래서 결론은 한 번 보잔 거였다. 고민 끝에 거절했는데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알겠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H야. 내가 본 여자 중 니가 제일 예뻤어.”였다. 연애해 본 분들은 이 말이 ‘외모’를 뜻하는 게 아니란 걸 알 거라 생각한다. 이 말의 뜻은, 날 그만큼 사랑했다는 거. 그 날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낮아진 자존감이 높아진 건 아니지만, 내가 정말 못 할 짓을 했단 생각과 그 상황에서도 이기적이게 그에게 위로를 받았단 사실에.


… 세상 어느 누가 날 2년 동안이나 생각해 줄까?


 

 

Part. 3 자신을 스스로 잃어버리는 과정



두 번째 사람과 헤어지고, 난 솔로 생활을 즐겼다. 솔로가 마음도 편하고 자유로워서 좋았다. 그래서 남자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고 특히 연애는 더더욱 하기 싫었다. 연애하면 좋은 부분도 있지만 싸우기도 할 테고, 질투도 할 테고, 속도 끓일 테고…. 아, 생각만 해도 연애는 정말 할 짓이 못 된다. 거기다 사랑에 빠져버리면... 내 일상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릴 게 뻔하다. 그래서 약 2년 만에 가진 솔로의 생활을 오랫동안 즐기고 싶었다. 그렇게 1년 조금 넘게 솔로를 즐기고 있었는데,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운명처럼 그를 만났다. 다들 말하는 ‘그 운명적’ 만남.


평소 커피를 좋아해서 카페에서 일하고 싶었지만, 호프집 같은 곳에 비하면 시급이 적었기에 일해 본 적이 없었다. 추웠던 11월, 그 날도 호프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평일에만 일했기에 주말엔 그동안 해 보고 싶었던 카페에서 근무하게 됐다. 4층까지 있고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근무하던 쉐프가 브런치를 만드는 그런 곳이었다. 심지어 엘리베이터까지 있는. 사장님은 젊었고 재벌 수준이었다. 그리고 미국 국적인 한국 사람이었다. 뭔가 모든 게 있어 보였다. 그래서 ‘내가 일하는 곳이 이런 데라니!’ 하며 일하는 내내 뭔가 자부심- 엇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카페가 아닌 큰 사업장이다 보니, 사업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됐다. 커피가 아닌 사업 자체를, 그리고 커피 사업에 대해서.


그 카페에 면접을 보러 간 날, 카페 문을 열자마자 모자를 거꾸로 쓰고 키는 큰, 그리고 얼굴을 까무잡잡한 어느 남자가 환하게 인사를 했다. 그 웃음은 당연히 손님용 웃음이었겠지만, 첫눈에 반했다. 면접에 붙고 처음 일하는 날, 일적인 것 외에 그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부끄러워서 그런 것도 있지만, 남자한테 설레는 감정을 부정하고 싶었던 게 컸다. 그리고 2일째,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었다. 일할 땐 밝게 했지만 쉬는 시간에는 같이 일하는 언니에게 상황을 털어놓고 있는데 모자 남이 끼어들었다. 첫눈에 반하게 했던 그 웃음을 지으면서, “오늘 일 끝나고 고기 먹으러 갈래요? 친구랑 먹기로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겼다네요.”라고 했다. 나보다 3살 많았지만, 내게 항상 존대해 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새벽 1시 퇴근이었고, 모자 남은 새벽 2시 퇴근이었다. 처음엔 몰랐는데 매니저였다! 명찰엔 이름만 있었고 얼굴은 어려 보이고. 누가 그를 처음 보고 매니저라고 생각했을까.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난, 시크한 척 알겠다고 했고 먼저 퇴근해서는 얼른 택시 타고(집이 먼 편이 아니었음에도)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가게로 왔다. 뭐랄까 그는 ‘어른’ 같은 존재였다. 그렇게 느껴졌고. 그래서 마음을 부정하기 힘들었고 그렇게 고기를 먹은 날부터 우린 썸을 탔다.

 

사귄 지 한 달. 그 당시 나는 22살이었고 대학이란 울타리가 필요해서 21살에 수능을 치른 직후였다. 정시 3곳 모두 붙었고 그중 서울도 있었다. 난 앞으로 계속 서울에 살고 싶단 생각이 컸기 때문에(당시엔 입시 결과를 모르기에 고향에 있었다) 당연히 서울로 가려고 했는데 이런... 변수가 생겼다. 입시 원서를 쓸 때 안전 대학으로 그의 학교를 썼었다. 당연히 그의 영향이 컸다. 서울에 있는 대학은 예비 번호로 어렵게 붙었지만 그 변수가 날, 지금껏 살면서 원서 쓸 때야 처음 들어 본 이름의 학교로 가게 했다. 그만큼, 딱 그만큼, 많이도 사랑했다. 헤어진 지금, 그때로 돌아가서 그때의 선택을 되돌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렇다고 크게 후회되진 않는다. 한땐 무진장 후회하기도 했지만 그건, 24시 카페가 없다는 그런 유의 이유였다.


일 년 반 정도 만나고 헤어졌다. 헤어지고 나서 그는 다시 휴학하고 고향으로 갔지만, 그 후에도 5개월간 3~4번 정도 찾아왔었다. 술에 취한 채-. 집 안으로 들인 적은 없다. 스킨십 또한 하지 않았다. 그냥 그의 마음이 내 마음이었고, 그렇다고 다시 만날 순 없는 상황이어서 그의 얘기를 들어주기만 했다. 사실 전에 가게를 낸 적이 있어서 1억가량 모았는데 한순간에 날아갔단 얘기, 다시 카페를 차리려고 준비 중이라는 얘기, 자신이 잘 되면 다시 만나자는 얘기까지.


그와 사귀면서 난 참… 많은 걸 배웠고 많은 걸 잃었다. 풋풋한 사랑이 아닌 한 사람에 의해 일희일비하고, 점점 유치해지고, 나를 잃어가는 혹은 변해가는 완연한 사랑을 하게 해줬다. 설렘은 두근거림이 아니라 마음을 콕콕 쑤시는 상처였고, 질투는 상대방이 아니라 스스로를 더 곪게 했고, 그 사람의 존재는 연인이 아니라 친구이자 보호자였다.


그는 어른으로 다가와 어린아이가 되어 떠났다.

 

그 사람의 모든 말은 가짜였다. 거짓이었고, 가식이었고, 허세였다. 헤어지기 2달 전 알았다. 하지만 그만의 사정과 성격을 알고 있어서일까, 그가 더 불쌍했다. 그렇다고 상처를 받지 않은 건 아니다. 다만, 헤어져야 마땅했을 일들을 그가 불쌍하다 생각하면서 넘어갔을 뿐이다. 우린 끝이 보였음을 직감했고 더는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 그 이상의 전혀 다른 감정임을 알아버렸다. 그래서 난 그에게 당신이 힘들 때만큼만 곁에 있어 주고 싶다, 그러니 당신이 안정되면 그때 떠나리라 말했고 그는 그것도 거부했다. 헤어졌어도 우리는 서로 잊지 못했다. 사귄 기간에 비해 너무 가깝고 깊은 사이가 됐기 때문이다.

 

난생처음으로 길거리에서 소리 지르며 싸워 봤고, 남자를 만나면서 그렇게 많이 운 것도, 그렇게 오래 운 적도 처음이었다. 진짜 헤어지기 전에 시간을 갖자고 말하는 그의 말을 듣고,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야밤에 막차를 타고 무작정 그가 있는 곳까지 지역을 넘어간 내 행동은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도 스스로가 놀랍다. 집을 나가면서부터 쏟아진 눈물은 버스를 타고, 또 한 시간가량 버스를 타고, 그리고 또 그의 집까지 택시를 타고 가면서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집 앞에서 제발 나와달라며 문자를 보낼 때까지도 눈물은 흘렀다. 그가 나오고, 그의 얼굴을 봤을 땐 눈물이라기보단 울음이 터졌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리고 하필 비가 많이 내린 날이었다. 난 무릎을 꿇고 애원했고 우산은 없었다.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다 가 봤다. 나와의 만남에서 그도 나처럼 끝을 보여준 적이 있고 우리 둘 다 바닥까지 가며 싸운 적도 있다. 사랑이 그렇게나 아픈 감정이란 걸 몰랐다. 사랑을 하게 되면 자아가 점점 사라지는 걸 몰랐다. 상대에게 주려 했던 상처가 오히려 내게 꽂힌다는 것도 몰랐다. 그리고 7개월 후, 그를 잊고 혼자서 다시 잘 지낼 수 있을 때 가만 생각해 봤다. 그때야 객관적으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생각하고 나자, 후련했다. 밑바닥까지 다 가 봐서.



 

Part. 4 Epilogue_반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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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만남에서, ‘설렘’을 배웠다.

두 번째 만남에서, ‘사랑함’과 ‘좋아함’의 차이를 배웠다.

세 번째 만남에서, ‘사랑’을 배웠다.

 

언젠가 교지편집위원회(이하 교편위)에서 이런 글을 써 보고 싶었다. 진실하고 자유로운 일기장 같은 글. 무거운 이야기나 빡빡한 주제들 사이에서 내 글이 독자들에게 잠시 쉬어가는 부분이길 바랐다. 그리고 에세이다운 에세이를 써 보고픈 마음이 컸다.

 

가장 뻔하단 것은 곧, 그만큼 자주 접했단 뜻. 가장 진부하단 것은 곧, 그만큼 흔한 일이란 뜻. 아직 드라마에서 멜로물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다. 아직 영화계에서 멜로 영화가 죽지 않은 이유다. 드라마는 패션처럼 유행이 돌고 돈다. 방영 중인 드라마가 의학이나 법조계 내용이 많다던가, 퓨전 사극이나 정치 얘기도 많았던가 하는 기타 등등. 한데 모든 장르에 연인 설정이 있어서 어느 순간엔 ‘멜로 없이’도 재밌는 드라마가 나오면서 기사에서도 「연인 설정 없어도 이렇게 재밌을 수 있다!」를 강조했다. 하지만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를 끝으로, ‘쌈, 마이웨이’를 시작으로, ‘도깨비’를 정점으로, 멜로는 다시 돌았다.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다. 아직 연인 설정 없이 진행되는 드라마들도 많이 제작되고 있다. 다만 내가 하고픈 말은, 사람들은 사랑 이야기의 주제를 식상하거나 뻔하다고 생각하는데 어찌 보면 인생에서 제일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매체나 책에서, 사랑만큼 남을 공감시킬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래서 뻔한 걸, 뻔하지 않게 그리고 진부하지만 진부하지 않게 만드는 것에 노력을 기울인다.


연애도, 사랑도 심적인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 음, 물적인 준비도 돼 있어야겠지만. 나도 한땐 친구가 내게 짝사랑하는 남자가 생겼다고 했을 때, ‘사랑 타령이나 하고 있고... 부럽네. 난 돈 버느라 연애할 시간도, 여유도 없는데. 당장 먹고 살기 바쁜데.’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불현듯 찾아오기도 하는 게 사랑이고 연애이다. 사랑과 연애는 엄연히 다르지만, 그래도 사랑은- 그리고 연애는- 할 때마다 는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매번 무언가를 배운다. 그리고 그 배움을 다음 연애에 써먹는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우린 그러면서 사랑에 성숙해진다.


25살, 반환점에 서 있다. 요즘 걱정거리, 고민거리, 생각 거리가 너무나도 많다. 그래서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면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취직 걱정도 있으나 다른 개인적인 부분이 더 크다. 그래서인지 정신적으로 억누르던 병이 자주 튀어나오지만, 약으로 버티며 노력한다. 각자 겪은 연애의 추억은 다르다. 허나 모순되게도 사랑하는 과정과 연애의 시작-끝은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기도 하다. 서로 끌려서 만나고, 알아 가고, 맞춰 가는 과정들이. 사랑은 남녀 상관없이 다 다르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왜인지 공감이 가는 부분이 참 많다. 남녀의 입장 차이는 있겠지만 사랑하는 동안 느꼈던 감정들에 대해서 말이다. 아마 이런 것들 때문에 친구랑 얘기할 때 이성 얘기가 자주 등장하는 게 아닐까? 친구를 만나러 가면서 봤던 괜찮은 이성, 과거의 연인, 앞으로 만날 이성에 대해, 진행 중인 사람에 대해 여러 상황을.


언젠가 사랑 얘기를 쓰고 싶었다. 사랑만큼 사람을 1차원적이게 만드는 건 없으니까. 사랑에 빠지면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어도 바보가 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내가, 내가 아닌 게 되는 것 말이다. 그래도 사랑은 사람에게 중요하고 꼭 필요한 감정이다. 사랑이 제일 큰 스트레스일 때도 있지만 사랑처럼 든든한 것도 없으니까.

 

읽고 있죠? 예전 얘기 싫을 텐데 끝까지 읽어 줄 당신이 고마워요. 그냥… 나한텐 추억이에요. 음, 아! 과거에 운동회 날이나 축제 날 같은 추억이요. 그리고 지금의 날 있게 한 경험들이에요. 이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에 당신과 만나는 나는 전보다 덜 이기적이고, 지나치기만 했던 과거보다 ‘적당히’란 선에 더 가까워졌을 거예요. 무엇보다, 전보다 더 진심으로 사랑이란 감정에 충실할 거예요.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사랑을 두려워했고 사랑에 서툴렀고 사랑에게서 도망칠 생각만 했거든요. 나의 여러 단점과 못난 모습까지도 사랑해 줘서 감사해요. 나한테 받았을 상처와 아픔은 미안해요. 마음은 정말 이렇게나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데 가끔 그렇지 않게 행동할 때가 있죠. 머리로는 아는데 감정이 앞설 때가 있어서 그래요. 이해하길 바라지만 당신이 날 이해한다 해도 이미 받은 고통이 사라지진 않기에 이해로는 부족하단 걸 알아요. 그게 쌓이면 우린 끝이 나겠죠.


아마 만나면서 자주 싸우기도 하겠죠? 각자 오랜 시간을 지내다 만났으니까요. 게다가 제가 좀 별나잖아요? 아마도 당신이 대부분을 져주겠죠. 이것도 고마워요. 좀 더 좋은 애인이 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속상해요. 그래도 전의 연애에선 ‘날 예뻐해 주는 상대방, 그리고 그 연애 자체’를 좋아했다면, 지금은 ‘당신’ 한 사람만을 좋아해요. 당신을 사랑하면서 이성적인 부분이 감정적인 부분과 비슷해야 하단 걸 알지만, 자꾸만 감정이 앞서요.


근데 사랑하는데 이성적일 순 없잖아요? 사랑해요.



[홍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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