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의 너] 희미한 목소리, 방향 잃은 말, 변명

#061~#070
글 입력 2019.02.09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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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 변명, 하나


 

글을 쓰게 되기까지는 첫 번째가 욕망이다. 어떤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

 

웃긴 건, 대개 최초의 욕망을 발휘하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욕망은 나를 지휘하고 나는 휘둘릴 뿐이다. 이 글도 그리하여 ‘써질’ 글임을 미리 밝힌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도 그러했지만, 더 터무니없는 것에 관해 쓰이고 말 이 글은, 사실 아무도 관심이 없어서 희미하게 사라져도 하나 이상하지 않을 그런 소재를 다룰 것이다. 변명을 하는 이유는 왜 이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하는지 나조차 성가시기 때문이다. 답답하다. 문득 떠올라 나를 놔주지 않는 감정은 왜 이렇게까지 질척거리는지 신기할 정도라서.

 

가장 먼저는 나를 위한 글을 쓰겠다고 했다. 이 바람을 막는 외력 없이 시작된 [시절의 너]였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이 글을 볼 수도 있는 누군가를 생각할 수밖에 없음을. 그들은 나의 일부를 그리 관대한 마음으로 받아주지만은 못할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에서 비롯된 두려움으로, 글은 시작된다. 이 두려움은 방해라기보다 최소한의 예의에 가깝다. 하지만 너무 예의를 지키는 데 집중하다가는 다시 ‘나’라는 존재를 펼칠 자유를 잃어버릴 것이므로, 일단의 나는 독자에게서 고개를 돌리기로 마음먹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062. 희미한 목소리로 지어진 ‘아름다운’ 집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세상,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세상.

나는 글을 쓸 때 그 세상으로 들어선다.

그곳은 내가 글을 쓰기도 전,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현실로부터 피신하곤 하던 곳이었다.


내성적인 사람들의 희미한 목소리로 지어진 아름다운 집.

나는 그 집에서 편안함과 소속감을 느꼈다.

그곳은 내가 마음을 둘 곳이었다.

 

<2017년 제8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중, p.269, ‘그 여름’ 작가노트, 최은영

    


한 번 읽었는데 꽤 오랫동안 마음에 남은 문장이었다. 문장도 표현도 보자마자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렇게 지어진 ‘집’과 목소리의 존재 자체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 오래도록 기억했다.

 

그런데 한편으론 그래서도 ‘희미한 목소리’로 느껴지는 분위기를 가득 내뿜는 글들의 형편이 부럽기도 했다. 무슨 말이냐면 아무튼 ‘문학’이라는 분류에 속하는 글은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위치에까지 오를 수도 있으니까. 아니 이미 ‘문학이 되기 위한 글’은 태생부터 그러한 정체성을 부여받는 게 아닌가 하고. 약한 목소리여도 그들을 대변하는 자들이 있어서 그들이 누릴 자리가 ‘있기도 한’ 것이다. 게다가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으면 명분을 입기도 한다. 독자를 울게도 하고 인생을 깨닫게도 했다는 아름다운 옷을.

 

그렇다면 희미하기만 해서 누가 가치를 부여하지도 않는 목소리들은 어디로 가야만 할까. 그들을 대변하는 자들도, 자리도 없는 이들과 그들의 목소리는 도대체 어디서 떠도는 걸까.

   

 


#063. 희미한 목소리로 지어진 ‘그냥’ 집



희미하다 못해 ‘가치 없는’ 팬의 목소리는 그들이 스스로 만든 장소에서 떠돌고 있다. 트위터나, 팬 커뮤니티나, 혹은 개인의 마음 한구석 어딘가, 어디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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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이 흥미로운 책이다. 워너블 중에서도 소수만 갖고 있을 이 책은, 책 속의 말들은, 사실 처음부터 책이 되려는 목적으로 발화된 건 아니었다.


팬이 아이돌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모아 ‘메시지 북’의 형태로 만드는 일이 빈번하긴 하다. 이때는 책을 만들겠다는 기획과 공지가 먼저이고 그제야 팬들이 책에 실릴 목소리를 내는 게 보통의 순서다. 하지만, 이 책은 어떤 글에서 시작된 수많은 목소리가 쌓일 때쯤 책으로 만들자는 기획이 나왔다.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어쨌든 글의 특성상 시간을 축으로 하고 있어 이 책으로 워너원 역사를 볼 수도 있다고, 거창하게 말해 본다. 아주 일반적인 장소에 공개되었지만 또 쉽게 발견하기는 어려운 곳에서 은밀하게 웅성거리는 ‘희미한 목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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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하고 싶어, 제발 떠나지마, 너희 없이 어떻게 살아, 헤어지기 너무 싫어, 평생 너희를 그리워 하면서 살거야… 어린아이처럼 떼쓰는 말, 일상적인 언어, 비유도 수사도 없는 감정 표현, 가끔 맞춤법도 틀리고 띄어쓰기도 없고 문장부호 남발에 너무도 유치한 속삭임, 응답이 약속되지 않은 일방적인 외침, 그래서 누군가 읽지 않으면 공중에 사라지고야 말 그런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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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너원 워너원 워너원 워너원 왜 적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탄식에 가까운 말,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고 다독이는 누군가 있으면, 나는 하나도 안 괜찮다고 담담히 고백하는 누군가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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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그 어떤 무엇이 더 귀할 수가 있겠어 세상 그 어떤 것이 아름다울 수가 있겠어', '아플 걸 알면서도 시작한 사랑' … 노래 가사처럼 예뻐도 대상에 따라 감정을 이해받지 못할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정확히는 아이돌에게 바칠 시간 있으면 가족에게나 잘하라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철저히 무시당할, 그런 이들의 허공에 떠도는 말. 어차피 사라질 목소리. 오직 같은 시간을 공유한 자들만 재단하지 못할 글자의 무게, 색깔, 질감, 소리, 형태, 이외의 다른 무엇.




#064. 취향의 계급


 

17년째 가장 친하게 지내는 친구 한 명이 있다. 그는 ‘취향’이란 소재로 나를 불편하게 한다. 예전부터 그랬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프랜차이즈의 어떤 빵을 먹고 맛있다고 말했더니 그는 연남동의 유명한 빵집을 말하며, “네가 그것보다 맛있는 걸 못 먹어봐서 그래.”라는 식으로 얘기했다(아니 사실 똑같이 얘기했다.).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럼 내가 먹는 건 늘 네가 먹은 것보다 못하다는 거냐?” 화를 냈다. 안다. 걔는 나를 화나게 만들 의도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 객관적으로 ‘공장에서 배달되지 않아 품질이 높고 더 맛있는 빵’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나는 화를 내는 것 외엔 번듯한 말로 항변할 수 없었다.

 

그 친구는 재즈를 좋아한다. 함께 재즈 페스티벌에도 갔었고, 공연도 몇 번 보았고, 실제로 좋은 아티스트도 경험했다. 그러나 친구와 아이돌 음악을 함께 경험할 기회는 적었다. ‘멜론 차트’를 보지 않은 지 꽤 되었다고 했다. 아이돌 노래에는 무의미한 단어가 반복되고, 그래서 시끄럽고, 때론 귀엽기만 하고, 혹은 섹시한 척 하고, 허세 가득하고, 그래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기도 하니까. 이때도 역시 그럴듯한 말로 항변할 수 없었다.

 

솔직한 나만의 입장을 말하기도 했다. “어떤 재즈를 들을 때 나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기도 해.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지. 그냥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그때 친구는 놀라며 다른 재즈곡을 몇 개 더 보내주었다. 그러면서 그 아티스트의 비극적인 일화를 들려주었다. 나는 궁금했다. 만약 어떤 비극적인 일화가 있는 아이돌의 음악을 들으면 친구의 마음이 동할 수 있을지.

 

하기야 애초에 성향이 달랐다. 우리는 서로 다른 대학에 갔지만 가자마자 밴드부에 든 건 같았는데, 친구는 가사보다 멜로디에 집중하는 편이었고, 나는 확실히 멜로디보다는 가사에 집착하는 편이었다.

 

그래도 단순히 성향이나 취향 차이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았다. 하나의 취향과 또 다른 하나의 취향이 공존하기도 하지만, 때론 그 취향이 다른 하나를 가볍게 눌러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라면,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한다면, 게다가 눌리는 자가 당당히 무엇이라 항변하기 힘들다면. 은연중에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는 직감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친구와의 일화에서 느낀 불편함은 더 정확히 ‘취향의 계급성’에서 비롯한 것이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일본에서는 지적 계급성이라는 것이 거의 해체되어 버렸다. … 지적 계급성이 사라져 버리면 계급적 스노비즘 같은 것의 존재 의의도 사라지고 만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는 거라곤, 계급적 스노비즘의 잔존 기억을 대중에게 돌려 ‘베를린 장벽의 파편’처럼 상품으로서 조금씩 팔아 치우고 있는 거대 유통‧자본뿐이다. … 그런 식으로 미국의 대학도 언젠가는 오늘의 일본 대학과 마찬가지로 점차 대중화‧평균화 되어, 프린스턴이나 하버드 같은 고고한 성이라 할지라도 크게 변화되어 갈지도 모른다. 대학의 학구적이고 비세속적인 분위기는 점차 희박해지고, 좀 더 효율적이고 좀 더 대량 생산적인 색채를 띠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슬픈 외국어> p.53~54, 무라카미 하루키

 


맥락은 다르지만, 아무튼 계급적인 성격으로 무엇을 구분 짓는 행위가 불편하기만 한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문장이다. 그러나 하루키가 말하는 계급에서는 지켜지는 정신이 있지만, 나와 친구의 맥락에선 무엇이 지켜지는가? 지키는 정신없이 ‘더 좋다고 하는 것’의 때깔만 윤택해질 뿐이라면 무엇을 위한 ‘취향의 구분’인가?

 

얼마 전에는 그 친구가 사는 집에 놀러 가서 <SKY 캐슬> 마지막 방송을 보기로 했다. 상큼한 주스 같은 걸 마시고 싶다 말했더니 그 친구는 보온병을 내밀었다. 운동할 때 근육량 손실을 줄이기 위해 마시는 아미노산 음료라는데, 그 핫핑크 색깔의 액체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며 할 말을 찾고 있었다. 친구는 결국 마침 냉장고에 있던 1400원짜리 주스를 건넸고, 나는 맛있게 마셨다. 고마웠다.

 


 

#065. 하위 계급의 하단


 

한때 팬덤 문화에 관한 논문을 열심히 읽었던 적 있다. 그래야 했던 상황이었다. 적어도 4개월간은 그 주제가 중요했었어야만 했고, A4 몇 장이 되는 과제로 공부의 결과를 제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몇 개월 동안 팬덤 문화에 정통해지기란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분위기 정도는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고 있다.).

 

미디어 수용자를 중심으로 뻗어 나가는 팬덤 문화에 관한 여러 논의를 따라간 나만의 종착지는, 결국 아이돌 팬덤 문화였다. 아이돌의 ‘탈’ 신화를 위한 사생팬의 이야기, 아이돌과의 관계에서 유사연애라는 지탄을 피하기 위해 팬들이 자신을 ‘엄마 혹은 삼촌’이라는 가족 담론으로 안전하게 봉합하는 등의 내용은 흥미로웠다. 팬덤을 더 이상 몰지각한 ‘빠순이’로 폄하해선 안 된다는 주장은 논의 측에도 끼지 못할 정도로 구식일 만큼 이미 팬들은 2차 창작자로서, 혹은 아이돌의 기획자와 관리자의 위치로까지 격상되어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겪은 팬덤은, 논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은 자들의 위치는 확실히 아니었다. 어쩌면 논문에서나 ‘인정’ 받는다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A4용지 밖의 세계에서 팬덤은 여전히 한없이 약했고, 그들의 아이돌은 어쩌면 그보다도 더 약한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별것 없었다.




#066. 변명, 둘


 


"글 봤어요. 그래서 워너원을 보내기로 하셨다고."

"아, 아니요. 그냥 기다리기로 했어요."

"네?"

 


사람은 그렇게 보내지는 게 아니고, 감정은 그렇게 처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067. 방향 잃은 말: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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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두호 시인의 <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 작고 얇은 책이다. 3년 전엔가 사람 가득한 출근 버스에서 겨우 자리에 앉아 한 장 펴고 몇 글자 읽지 않았을 때, '아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녘에 일어나 지하철을 타고, 버스로 환승하고 회사로 도착하는 길목에서 숨을 어떻게 쉬고 있는지조차 느껴지지 않았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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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적인 것’이 무엇일까 부쩍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논리와 방향을 잃은 말들에 관심이 생겼고 이 책이 다시 생각났다. 오로지 특정한 상황에서만 의미를 입는 그런 말들은 ‘시’에 가깝지 않은가 조심스레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지만 별로 판단하고 싶지도 않은, 그냥 무형의 감정만 마음속에 쿵 하고 던져주는 말들. 그런 것이 시가 아닐까 처음 느꼈던 것 같다.



    

#068. 방향 잃은 말: 탄식


 

지난 1월 24일부터 27일까지, 4일 동안의 콘서트에서 워너원 멤버들은 차례차례 무너지기만 했다. 첫날 콘서트를 갔다가 멤버들의 우는 얼굴을 보고야 만 나는, 급하게 다음날 표를 구했다. 이렇게만 워너원을 기억할 수 없다는 일념으로. 처음이라 그렇지 다음날엔 좀 웃겠지? 그러나 둘째 날 콘서트 분위기는 더 슬펐고, 셋째 날, 마지막 날까지 콘서트는 점점 더 슬퍼지기만 했다. 이렇게 하강 곡선만 그릴 수도 있나. 생방송으로 중계된 마지막 날의 콘서트장은 팬들의 울음소리, 아니 통곡 소리로 가득 메워졌다. 참담한 최악의 현장이었다.


시작할 때부터 예고된 끝이었음에도 불구하고(심지어 시기도 아주 정확히) 멤버들의 감정은 하나 정리된 것이 없었다는 사실이 꽤 의외였다. 마지막 멘트를 하는 자리에서 '헤어지기 싫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무대에도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 만큼인 줄 몰랐다.' '지금이 썩 내키지 않는다.' 가감 없는 그들의 말과 감정 표현은 어떤 면에서는 나의 예상을 벗어난 정도였다. 물론 지금까지 시간에 대해 감사하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다, 지켜봐 달라는 다짐의 말도 잊지 않았지만 이미 그들은 무너진 성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의연한 모습이 다 무슨 소용일까.



“끝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우린 뭐가 그렇게 행복했을까요.”


- 박우진

   


우린 뭐가 그렇게 행복했을까요. 특히 이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커피를 내리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이 말이 자꾸 생각나 괴로웠다. 방향이 없는 말이었다. 갈 곳을 잃어버린 말이었다. 질문도, 다짐도 아닌 그저 한탄에 가까운.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애가 엉엉 울면서 한 말인데 어쩌면 인생의 진리를 담은 말이 아닌가 싶기까지 했다. 그러게. 모든 끝이 있는 것에 마음을 다 쏟아버리고 행복한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069. 방향 잃은 의지



콘서트가 끝나고 워너원이 워너블을 위해 준비했던 메시지가 담긴 영상이 공개되었다. 음악 방송이나 시상식이 끝날 때마다 '우리 워너블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는 워너원 멤버들의 모습이 짜깁기된 영상이었다. 무려 1년 반 동안이나, 데뷔부터 마지막 콘서트의 마지막 날까지 빠짐없이. 방송 사고로 일부 팬들에게 공격을 받던 날에도, 똑같이 웃으며 '우리 워너블 사랑합니다'를 외치는 워너원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미칠 지경이었다. 어떤 팬의 말처럼, 이렇게까지 해서 소속사가 팬에게 바라는 게 무엇인지 강하게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렇게까지 팬의 마음을 처참하게 만들어서, 그 대단한 '서사'를 완성해서 당신들이 얻는 게 무엇입니까…


일차적인 배신감 이후에 밀려든 다른 생각은 이것이었다. '당연히' 팬이 가수를 '훨씬 더' 사랑한다고 생각한 것, 그렇게 느껴 온 것.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런 확신이 나를 찔렀다. 그 이유는 적어도 '우리', '워너원', '사랑합니다'라는 세 어절을 나는 적어도 워너원보다는 적게 말했으므로. 어쩌면 '우리 워너원'이라고 가깝게 생각해본 적 없으므로. 소리쳐 본 적은 아예 없으므로. 평소에도 육성으로 어떤 말을 하는 것과 아예 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이번 사건은 그래서 더 충격적이었다. 미안한 감정 이상이었다.


그래서 기다림을 선택한 건가, 나는. 정말 우습다.



"기다린다는 건 쉽지 않아"

레이코 씨는 공을 튀기면서 말했다.

"특히 학생 또래의 사람에게는 그래. 오로지 그녀가 낫기만을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하니까. 그렇다고 거기에 기한이 있거나 보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학생이 할 수 있겠어? 그럴 수 있을 만큼 나오코를 사랑해?"

"모르겠어요" 하고 나는 정직하게 말했다.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 p.187, 무라카미 하루키



기다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고문인지 희망인지, 나는 모른다.



… 느긋하게 기다리는 게 제일이야. 희망을 잃지 말고 엉킨 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거지. 사태가 아무리 절망적일지라도 실마리는 어딘가에 있게 마련이니까. 주위가 어두우면 잠시 가만히 있으면서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듯이 말이야.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 p.392, 무라카미 하루키



주위가 어둡고, 잠시 가만히 있는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이 무엇을 위한, 어디를 향한 의지인지는 여전히 모른다.




#070. 변명, 마지막이 아닐



고백하자면, 이 글은 지난번 기고했던 글에서 밝혔던 나만의 다짐을 번복하기 위해 썼다. [시절의 너] 아홉 번째 글에서 나는, 워너원 <봄바람>의 '다시 만나' 가사를 비웃었었다. 물리적으로 그럴 리 없다고, 그럴 수는 없다고. 그러나 이미 해체된 그룹을 기다린다는 게 말이 안 될 만큼이나 보낸다는 말 또한 허무맹랑한 다짐이었다는 걸 정말 기이하게도, 콘서트 기간 동안 깨달았다. 보냄과 기다림 사이에서 약 51프로의 확률로 기다림을 선택하고야 마는 나와 같은 어떤 팬들은, 인생의 어떤 부분을 눈감아버리는 무지한 자일지도 모르겠다, 그 마음의 향방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내지르고 마는.



"워너블이 모이면 워너원 다시 모일 거예요."


- 박지훈



다시 모인댔다, 그럼 다시 만나겠지. 믿는다 어. 우리 꼭 다시 만나…


경험은 생각을 바꾼다. 이 글이 멈춰있는 글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하다. 아마 앞으로도 몇 번 변명을 하게 될 것 같다. 그럴 것이라 철석같이 믿었던 어떤 믿음이 산산조각 날 수도 있다는 걸 배웠다. 내 믿음에 때때로 배신당하기를 조금은 바란다. 그런 깨어짐은 아프지만 확실히 전보다는 더 나은 의지를 발휘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아마도 그 계기는 내가 희미한 목소리를 무시하지 않는 이상 계속 만들어지지 않을까. 기이하게도 그런 목소리에서, 방향을 잃은 말들에서 길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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