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피카소와 큐비즘 :: 감정의 다면성

너의 삶이 실제로는, 조각조각 부서진 기억과 경험과 감정들의 엉성한 이어짐이라고
글 입력 2019.02.08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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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ASSO & CUBISM

파편으로 남은 삶과 평면의 현재



지난 포스팅에서, 피카소와 큐비즘 전시를 보러가기 전 프리뷰를 남겼다. '삶의 다면성' 이라는 제목 아래 추상적이지 않아야함을 강조하며 전시를 보기 전 간단한 기대를 남겼다. 그리고 지난 목요일, 예술의 전당 - 한가람 미술관에서 진행중인 피카소와 큐비즘 전시전을 드디어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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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뒤피, 버려진 정원



큐비즘 전시를 볼 때 오로지 한가지 기준에만 얽혀 추상적일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건만, 막상 전시장에 들어갔을 때 나의 그 선언이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다양한 큐비즘의 흐름과 그림들 속에서 나는 약간의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분명 피카소와 큐비즘이라는 전시였고, 전시 전에 여러가지 그림을 확인하고 나름대로의 공부를 하고 확인하고 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들어서자 마자 보이는 다양한 그림들에 넋이 나가 한없이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알았던, 책과 인터넷의 짧은 단편적인 지식, 예상했던 흐름과는 다르게 아주 넓고 방대한 양의 그림들과 흐름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당황스러움을 약간은 접어두고, 그림을 보며 과연 작가가 말하려 했던 다면성은 무엇일까를 곰곰히 고민했다. 여러 그림들을 보면서 느껴졌던 당황스러움을 최대한 풀어나가고싶었다. 그리고 수많은 당황스러움 속에서도 가장 처음으로 나를 당황스럽고 두렵게 했던 작품은, 라울 뒤피의 버려진 정원이었다.

라울 뒤피의 <버려진 정원>은 모니터나 핸드폰 화면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거대한 크기, 다양한 색깔과 강렬한 사물들의 주장이 인상적인 그림이었다. 왼쪽 위의 하늘을 뚫을 듯 솟구치는 새는 가장 첫번째로 눈길을 잡아 끌었으며, 서서히 내려오면 보이는 큰 침엽수와 바닥을 낮게 쓸듯이 날고있는 거대한 하얀 새. 창문이 네모나게 뚫려있는 집과 푸른 하늘은 내 마음을 당황스럽다 못해 어지럽게 했고, 작품은 두려우면서도 한없이 매력적이라 사물들 사이사이를 눈길로 헤집게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버려진 정원> 작품을 시작으로 수많은 그림들에서 당황스러움과 두려움, 다양한 감정들은 춤을 추며 나를 어지럽혔다. 작가가 바라보았을 물가를 생각하며 그 안으로 빠져들고 싶다는 약간의 애처로움과 우울함을 함께하기도 했으며, 알 수 없는 가슴 밑의 울렁거리는 떨림을 꼭 잡으며 그림의 강렬함을 따라가려 애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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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아 곤차로바, 라일락이 있는 정물
1911, 81x45cm, 캔버스에 유화

Natalia Gontcharova, Nature morte aux lilas, 1911

©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파편화 된 시간과 공간들은 하나의 폭에 담겨있다. 그 안에서의 작가의 불안함이 그대로 연결되는 듯도 했지만, 또한 나는 파괴된 상식과 현재에 불안함을 느꼈다. 흔히 상식적으로 '입체'는 엷은 그림자로 조절되는 명암이 쓰여져있으며, 원근법을 잘 나타내어 어떤 물체가 뒤에 존재하는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우리가 우리의 안구로 바라보는 '사실'에 가깝다. 그러나 <피카소와 큐피즘> 전시에서의 입체는 이러한 상식의 입체를 파괴한다. 입체적인 사물의 모든면을 보여주는 큐비즘은 전에없던 입체로 우리의 상식과 현재를 파괴한다.

수많은 현재의 시간들을 오려붙여 입체적으로 표현한 전시에서의 입체는, 오로지 단 한순간의 현재만을 담아내는 현실의 입체와는 아주 다르다. 시시각각으로 변해오는 현재라는 개념을 나타내기 위해 수많은 현재들은 - 비록 그것이 과거의 모습을 지닐지라도, 그것이 현재일 때에는 현재였기에 - 한 폭에 모두 같은 '현재'라는 시간으로써 담겨진다. 우리는 한번에 수많은 현재들을 느낄 수 없다. 밥을 먹는다는 현재는 잠시 후 배가 두둑해질 현재와 함께할 수 없고, 또한 그 전의 현재였던 배고픔과도 함께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순간들은 우리에게 현재의 순간으로 존재했다. 그렇기에 입체주의는 그 모든 순간들을 현재라는 이유로 묶어낸다. 전에없었던 '현재'라는 개념의 정의에 우리는 파괴된 상식과 현재를 만나고, 이제껏 알고 있었던 기존적 가치관의 붕괴에 두려움을 느낀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분명히 우리는 그 모든것이 현재라는 사실을 알고있음에도, 같은 선상에 놓으려 하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 수많은 현재들이 한 순간에 온 적이 없기 때문에. 시간은 일직선이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만을 만나기 때문에. 현재를 만나는 인간이기에 당연한 이유이지만, 또한 현재를 만나는 인간이기에 두려움 또한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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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일직선의 시간은 살아간다. 과거 과학자들은 '타키온'이라는 빛보다 빠른 물질이 있다 믿었지만, 빛보다 빠른 물질은 (현재 밝혀진 과학적 사실으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우리는 시간을 되돌려 살아갈 수 없고, 지나친 현재- 즉 과거를 새롭게 현재로써 다시금 만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일직선이라 이르기에는 너무나 파괴적이며 혼돈적이며, 조각조각 부서진 수많은 기억, 경험, 감정의 엉성한 이어짐으로 구성되어있다. 우리는 항상 뒤틀리고 파괴된 후 재조립 된 감정과 경험 속에서 삶을 살아간다. 이전 프리뷰에서도 같은 말을 반복했다.  우리가 느끼는 기억은 객관적인 기록물이 아니다. 감정의 개입이 경험을 뒤틀어놓으며, 더 많은 감정들을 알 수록 감정의 이유를 알아가며, 몇가지 감정들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며 가장 나은 기억을 기억의 가장 위에 올려놓곤 한다.


이처럼 끊임없이 조각내어지고 재조립된 기억들은 비로소 과거의 현재로써 존재하고, 그 과거의 현재들은 삶이라고 불리며 또한 현재의 현재를 결정짓는다. 어떤 경험이 어떤 감정을 가져왔느냐에 따라 우리는 각기 다른 현재를 선택한다. 인간들은 모두 저마다 각자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며, 그 기억을 토대로 또한 각자의 현재를 만들어나간다.

감정의 다면성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아주 두렵다. 장황하게 글을 늘어놓았음에도 어딘가가 아주 부족하고 아쉽다 느낄정도로, 감정과 경험, 삶과 기억의 다면성은 너무나 복잡하기에 감히 내가 통달하였다 말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입체파의 그림들은 다만 이를 말해주었다. 언뜻 부드럽게 연결되어있는 너의 삶이 실제로는, 조각조각 부서진 기억과 경험과 감정들의 엉성한 이어짐이라고. 나는 아마 이전보다 더 다양한 감정들에 대해 덜 혼란스러움을 느낄테다.


들끓는 가학심 아래의 애처로운 동정도, 행복함 뒤의 바닥을 치는 우울함도 모두 나의 것임을 알고 더 받아들일 수 있을테다. 삶에 대한 다양성을 인정함으로써 나는 더욱 입체적인 사람이 될 수 있겠다. <피카소와 큐비즘>을 다녀온 뒤에 느끼는, 앎의 두려움과 함께하는 앎의 행복함이다.



[김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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