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버닝, 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영화]

글 입력 2019.02.03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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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2018)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한 미스테리 드라마 영화이다. 영화의 줄거리에 대한 소개는 이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한 사람을 위해 보류하도록 하고, 이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그리고 관람한 후에도 계속해서 내 마음 속에 떠올랐던 한 마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이 영화의 연결고리를 설명할 것을 목표로 할 것을 알리며 글을 시작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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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만족감


슈스터만에 따르면, 대중영화는 관객에게 ‘실제적인’ 만족감을 선사한다. 이러한 만족은 단기적이고 금방 사라질 수 있지만, 단기적으로라도 ‘존재’하는 동안만큼은 우리에게 있어 실재하는 육체적 만족이다. 인간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는 것은 다양하다. 영화 <버닝>은 도대체 우리에게 어떠한 종류의 만족을 우리에게 줄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으로, 나는 문자 그대로의 ‘버닝’, 즉 무언가를 태움으로써 갖게 되는 만족감을 들고 싶다.

우리는 모두 아이였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불장난을 해선 안 된다고 교육을 받은 바 있다. 방화는 심각한 범죄이며, 이러한 범죄를 실행할 경우, 처벌과 책임이 따를 것이라는 걸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이렇듯 사회적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본성을 무의식 그 깊은 곳으로 끊임없이 밀어내고 또 밀어내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 까지 우리는 내면의 갈등을 겪고 있으며 또 겪을 것이다.

모두가 공감하다 시피, 인간은 그다지 자비로운 존재라고 볼 수는 없다. 파괴에 대한 강력한 욕망, 그것은 누구나 한번쯤은 가져 보았을 본능일 만큼 보편적이며, 기술과 교육이 고도로 발전된 오늘 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무엇을 태우고, 무엇과 싸우고, 또 어떤 것을 죽인다.

어린 영수가 불타는 비닐 하우스를 황홀하게 바라보는 장면은 영수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져야만 했던 오랜 파괴의 욕망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영수의 욕망일 뿐 아니라, 우리의 것이기도 하다. 그의 표정은 욕망을 무의식의 감옥에서 탈출시킨 한 인간의 표정을 대변하고 있으며, 이 장면을 보는 우리는 모두 불타는 비닐하우스 앞에 위치하게 되며, 그것을 황활하게 바라보는 영수가 된다. 파괴의 순간, 태움의 쾌감, 죄악의 열기를 함께 느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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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을 통해 나는 처음으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한 마디를 떠올렸다. 불은 너무나도 손쉽게 생명을 앗아간다. 우리가 나무이던, 곰이던, 인간이던, 불은 공평하기만 할뿐이다. 불안에서 우리는 모두 질식한다. 그러나 우리는 왜 여전히 그것의 압도적 힘을 동경할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생명과 존재는 때때로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볍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직감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Ⅱ. 모호함


대중 영화는 자주 비판을 받는다. 대중들에게 스팩타클을 제공함으로써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거나 잊도록 마비시킨다는 혐의로 인해서 말이다. 극장에 앉아 있으면서,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깔깔거리고, 눈물을 흘리고, 분노하며 앞좌석을 힘껏 차기도 한다. 영화에 집중한 순간만큼 우리가 현실과 분리될 수 있는 순간도 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면, 극장을 나서면, 우리는 다시 모든 것을 잊고 현실에 대해 비판할 힘조차도 잃은 채 현실에 안주한다. 어떤 대중 영화는 완벽한 해피엔딩을 통해 현실과 반대되는 환상을 제공한다. 어떤 대중 영화는 너무나도 뻔하고 쉬운 스토리를 통해 비판적 사고의 필요성을 무시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대중 영화는 진정으로 중요한 삶의 문제를 외면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버닝>은 뻔하고 쉬운 종류의 대중 영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감독이 다양한 메타포를 영화 곳곳에 적용했고, 인과관계를 의도적으로 불투명하게 처리하여 전개를 알쏭달쏭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벤이 범인이라는 건가? 비닐 하우스를 태우는 건 또 무슨 의미이지? 질문들이 자꾸만 생겨난다.

영화의 구조 역시 뻔하지 않다. 전개는 느리고 길다. 한 시간 반이 지나서야 해미가 사라졌다. 그러나 엔딩은 또 얼마나 급하게 전개되지, 종수가 벤을 처리하는 데는 단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여튼간에 이 영화는 자꾸만 우리에게 ‘생각’을 강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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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수의 아버지는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종수는 아버지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 이웃에게 탄원서 사인을 받으려 노력한다. 이러한 장면들은 한 인간의 죄가 또 다른 인간에 의해 줄여지기도 하고, 종이 한 장으로 인해 결정되어 지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한번,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인간의 존재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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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은 계속해서 바뀐다. 종수가 벤의 집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그는 베란다에서 해미와 함께 담배를 피우며 한국에는 너무 많은 ‘게츠비’가 살고 있다는 것을 쓸쓸한 어조로 말한다. 삶의 무게에 짓눌린 그의 목소리는 뱉어지는 담배 연기와 함께 상승하며 흩어진다. 여기서 나는 다시 한 번 자꾸만 나를 괴롭혔던 ‘가벼움’을 인식하고 말았다. 우리의 존재는 왜 이렇게 가벼워야만 하는가?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이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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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는 어떠한가. 다 함께 대마초를 피운 후, 그녀는 참지 못하고 춤을 춘다. 새처럼, 삶의 의미를 찾는 그레이트 헝거처럼. 한창 시선으로 그녀의 몸짓을 따라가고 있을 때, 빠져들고 있을 때, 음악이 갑작스럽게 멈춘다. 그리고 소가 음메 울었다. 그녀는 멈췄고, 울었다. 자신의 현실, 자신의 존재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울 만큼 가볍기만 한 것이 분하고 또 억울해서 말이다.




'버닝'



다시 제목으로 돌아와서 '버닝'의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삶의 무섭고도 황홀한 불 빛(light)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고, 우리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light)와 보잘것없는 소멸 또한 알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연기가 난다. 우리는 무엇을 태울 수 있는가? 무엇이 우리를 태우는가?



[한선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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