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의 여정과 인간, 허무, 죽음, 사랑

글 입력 2018.12.16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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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광대한 풍경은

우리를 가득 채우기는커녕

오히려 비워낸다”



프리뷰를 작성하며 느꼈던 첫인상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책이었다. 아름다운 경치와 사색을 담은 기행문일 줄로만 알았던 ‘지중해의 영감’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책을 읽으며 ‘어떻게 여행하면서 이런 생각이 가능하지?’를 속으로 몇 번이나 외쳤을 정도로 그르니에는 자연이든 건축물이든 그가 맞닥뜨리는 모든 풍경에서 인간에 대한 철학을 끌어올린다. 그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여정이 순탄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내가 밑줄을 칠 수밖에 없었던 몇 개의 문장들을 소개하고 싶다.




북아프리카




-카지노 바스트라나-



“구릿빛 어깨 위로 쳐들고 흔드는 팔들, 마룻바닥을 쾅쾅 구르는 순발력 넘치는 발들,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 외침, 외침들, 소용돌이치는 치맛자락, 날아오르는 기타소리를 순간적으로 포착했다. 그게 전부였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어떤 작가는 단 한 페이지로 할 말을 다 할 수 있다. 그러니 그 나머지는 찢어버려야 한다. 어떤 음악가는 단 몇 개의 화음으로 영혼을 가득 채울 수 있다. 나는 나의 밤 속으로 깊이 사무치게 될 그 한 방울의 향기를 지니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나는 공연 내용을 잊어버렸다. 그 배우들도 잊어버렸다. 나는 그 곳에서 나 자신을 잊을 수 있었고 나의 허무를 지불하고 시적인 것을 얻었다.”



공연은 형태를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참 매력적이다. 약속된 공연 시간이 끝나면 방금 봤던 장면들은 허공으로 사라지고 대영제국의 광장은 설치물이 가득한 공연용 무대로 변한다. 배우는 100% 똑같은 공연을 두 번 다시 찍어낼 수 없고, 녹화본이 있다하더라도 공연장의 현장감까지 담는 건 불가능하다. 그래서 막이 내린 후 초고속으로 현실에 복귀한 우리는 왠지 모를 허무함에 휩싸인다. 하지만 이 때 전혀 우울할 필요는 없다. 공연은 아쉬움에 가득 찬 관객들을 위로하기 위해 항상 맞춤형 선물을 준비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장면, 표정, 눈빛, 단어, 목소리의 울림, 불현 듯 느낀 감정 등 공연 후에도 유난히 계속 생각나는 부분들이 바로 이 선물이다. 영화처럼 모든 장면을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볼 수 없기에 이 선물이 그렇게 귀할 수가 없다. 내게 유의미하게 남은 공연의 파편들은 크기와 상관없이 ‘내 밤 속으로 깊이 사무치게 될 한 방울의 향기’가 된다. 그리고 사실 이 향기를 얻는 것이 공연을 보는 이유며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메디나의 밤-



“밤은 우리에게 통일성을 깨닫게 해준다. 밤은 낮이 뚜렷하게 한정하고 서로 갈라놓은 존재들을 통합하고 혼합하다.”


“문 밑의 틈으로 빛이 새어들어 오고 있어도 낮에는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도시의 불빛들, 하늘의 불빛들, 특히 우리의 욕망이 언제나 뜨겁게 뿜어내는 불들이 다 꺼지고 나면 비로소 빛이 살아나 광채를 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밤.jpg
 


그르니에가 밤을 묘사한 부분을 보면 밤이 그에게 있어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느껴진다. 어둠이 사물의 형체를 가리는 밤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되어왔다. 하지만 그르니에는 오히려 어둠이 형체를 가림으로써 빛이 야기한 구분과 차별이 없어지고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튀니스에서 어둠에 길을 잃고 헤매도 기이한 충만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탈리아




-로마의 평원에서-


그르니에는 로마의 길가에 늘어선 묘비명들을 읽으며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죽음에 관한 얘기는 이 책에서 꽤 빈번히 등장하는데, 그르니에는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하며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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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피아 가도:
로마 근교의 일부 가도를 따라 많은 무덤들과
초기 기독교들의 카타콤베 유적들이 늘어서 있다.


“여기서 언어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비문으로 무얼 하겠는가? 이 영원한 대면, 이 끝없는 포옹, 고백도 질투도 없는 이 결합들 앞에서 오직 침묵만이 버티고 남아 있을 수 있고, 오직 침묵만이 어떤 의미를 지닐 뿐 일체의 말은 거짓이거나 과장이다. 그래서 아랍인은 지나가면서 한 송이 꽃을 꺾기를 좋아한다. 그는 소멸하기 마련이고, 그 무엇으로도 붙잡아 고정시킬 수 없는 것의 이미지로서 꽃에 애착을 가진다.”



소멸하기 마련이고 그 무엇으로도 붙잡아 고정시킬 수 없는 것은 바로 인간이다. 그르니에는 죽음을 자연스러운 일로써 담담히 여긴다. 이에 대해선 책을 좀 더 읽어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베로나에서 세비야까지-



“예전에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태어났다. 그리고 첫 번째 휴식을 상기시키는 이 휴식에 마침내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을 다 치워버리고 행복하시라.”


“이것은 일상적인 삶의 베일을 찢고 인간에게 유일하고 영원한 진리인 죽음의 모습을 정면 응시하도록 인간을 밀어붙이는 열정적인 물음들이다.”


“나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지만 한순간만 지나면 내게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부, 그러므로 전무.”



내가 그르니에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한 건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읽다보니 자신의 죽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본래적인 실존을 찾을 수 있다는 하이데거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불교의 공사상이 떠올랐다.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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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각상의 죽은 듯 표정 없는 눈을, 그 눈에 가득한 그 모든 고독을 생각해본다. 삶에서 멀리 물러나 있는 그 존재들만이 오로지 삶을 판단할 수 있다. 움직일 줄 모르는 그들의 부동성이 우리를 움직여 우리 자신의 밖으로 넘어서게 하고 앞을 보지 못하는 그들의 맹목이 우리의 눈을 밝혀준다.”



그르니에는 그리스의 조각상들을 보며 인간에 대한 생각을 펼친다. 그는 어떻게 무생물로부터 이토록 강렬한 인간다움을 느꼈을까. 읽으면 읽을수록 지중해라는 공간이 적어도 그르니에에게 새로운 영감을 던져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미 마음속에 있던 철학과 상념을 정리해주고 또 그 생각들을 발전시킬 생산적인 질문까지 제시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는 만큼 보인다’를 넘어 ‘아는 만큼 사색한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르니에만큼 고뇌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라면 지중해 뿐 아니라 어디를 가도 번뜩이는 영감과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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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의 영감
- INSPIRATIONS MÉDITERRANÉENNES -


지은이: 장 그르니에
옮긴이 : 김화영
출판사 : 이른비
쪽수 : 240p
발행일 : 2018년 6월 30일
정가 : 15,000원


[강혜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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