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현대미술의 도치와 정체성 [시각예술]

글 입력 2018.12.09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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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은 곧 ‘부정’이다. 전통에 대한 거부로부터 시작하여, 관례에 대한 거부, 제도에 대한 거부, 그리고 천재적 개인에 대한 거부 등, 기존의 수많은 당위를 끊임없이 거부함으로써 현대 미술은 헤겔의 변증법적 사고형식과 같이 자신 안의 부정성을 부정함으로써 성장해왔다. 이러한 승화를 통해, 부정을 부정하는 현대미술이 이제는 우리에게 이해되고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해와 인정을 넘어, 그것과 더욱 지속적인 소통을 하기 위해, 우리는 현대미술의 독특한 언어 구조, 즉 ‘도치’된 명제들을 계속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도치란, 문장 안에서 단어의 정상적인 어순을 서로 뒤바꾸는 표현법을 말한다. 본고의 목적은 바로 이러한 도치된 단어의 갈등을 통해 현대미술의 ‘자아 모순적’, ‘자기 비판적’ 주장을 살펴보는 것이다.

현대미술은 무엇을 도치시키는가? 본고에서는 현대미술이 주목하고 있는 수많은 대상이 이루는 거대한 범위를 ‘시간’, ‘공간’ 그리고 ‘관계’의 영역으로 한정 지어 살펴본다. 왜냐하면 현재의 시대에는 끝없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분출되어 나오고 있으며, 이러한 정체성을 조형하는 가장 중요한 손길이 바로 ‘시간’, ‘공간’ 그리고 ‘관계’에 대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도치된 명제로써 우리에게 시각적인 언어로 반복하여 전달하는 현대미술의 구체적인 작품들을 살펴보는 것을 통해, 우리는 세계의 경계가 지속해서 확장되고, 정체성이 혼란스러워지고 따라서 불안정해지고 있는 시대에 살아가는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현대미술만의 독특한 사고방식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


‘영원’이 된 순간

누구에게나 냄새를 통해 과거의 순간을 상기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새벽 공기의 냄새를 맡으며 일찍이 등교를 하던 학창시절의 기억을, 향기로운 장미의 냄새를 맡으며 처음 사랑하는 이와 기쁨을 나누었던 순간을, 택배로 도착한 옷가지에 배어 있는 냄새를 통해 부모님과 함께 집에서 살았던 추억을, 우리는 생각해낼 수 있다. 이러한 냄새는 우리에게 응고된 과거를 보여주고, 이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시 흩어져 없어진다. 따라서 냄새는 곧 영원이 된 순간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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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TE ERICSON & MEL ZIEGLER
<Grandma’s Cupboard>, 1994-96


케이트 에릭슨과 멜 지글러는 이러한 ‘냄새’를 이용하여 사적인 차원을 넘어 공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Grandma’s Cupboard>라는 작품은 워싱턴 D.C. 곳곳의 빌딩 안, 또는 기념비 주변에서 수집한 공기를 미국 지오그래픽 센터의 오래된 집에서 가져온 투명한 유리 용기들에 담아 나무 장식장 위에 올려 전시한 작품이다. 각각의 용기는 공기를 가져온 장소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는데, 이러한 진열을 통해 그들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역사적인 장소의 공기를 가져오고 그것을 유리병 속에 보존하는 것은, 흘러가는 역사의 한 단편을 영원으로 만들어보고자 하는 시도이지만, 아쉽게도 공기의 냄새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확인하고자한다면 뚜껑을 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상 가능하듯, 뚜껑을 여는 순간 순수한 공기 속에는 곧 바로 다른 것이 섞이고 만다.

그러나 역사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기록되는 순간 그것은 돌이킬 수 없게 되고, 신성불가촉하고 ‘순수한’ 것으로서 여겨진다. 역사는 대중에게 기억되지만, 대중에 의해 수정될 수 없다. 그것을 수정하고 보존할 수 있는 권한은 그것을 최초로 담은 사람에게 있기 때문이다. 소수의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역사는 진열장 속에 보존되어 영원한 것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작가는 말한다, “당신은 냄새를 소유할 수 없다. 그것은 안정적이지 않다. 그것은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흩어져버릴 것이다.”(린다 와인트라웁 지음, 정수경/김진엽 옮김, 『미술을 넘은 미술』)라고 말이다. 소수에 의해 장악된 진열장 속 역사와 과거는 결국 누구의 소유도 아니고, 세계 속으로 만연하게 퍼져나가는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피할 수도 없는”(같은 책) 그들의 예술은 기록된 역사에 대한 의식, 정지된 시간에 대한 고찰, 그리고 결국 깨져버릴 영원성에 대한 신화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순간이 된 영원

순간은 곧 파편이다. 부서진 파편은 그것이 속해 있었던 대상 전체를 암시하며, 그 대상은 한때 견고하게 만들어진 것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순간’은 자신이 그 일부를 구성했지만 이내 분리되어 나와 대립하게 된 ‘영원’을 지시한다. 이렇듯, 순간을 파편으로 유비하는 것은 곧 영원을 기념비로 유비하는 것을 연상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파편과 기념비, 순간과 영원이 교차적으로 함께 존재하고 있는 존재인 ‘폐허’를 떠올리게 만든다.

폐허는 자신이 폐허가 될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의 건축을 만들었을 때, 그것을 가능한 영원히, 그리고 굳건하게 그곳에 세울 것을 기대하여 만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 누가 폐허를 세우고 싶어 할까? 하지만 폐허는 존재한다, 그것도 아주 많은 곳에서 말이다. 폐허는 그것이 ‘폐’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즉 아무런 실용성도 없고 미관상으로도 보기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 그리고 발길을 끌고 있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고든 마타 클락은 이러한 ‘폐허’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고, 더 나아가 뉴저지 외곽의 이글우드에 있는 한 일반 주택을 직접 자름으로써 건물의 폐허화를 촉진시키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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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rdon Matta-Clark, <Splitting>, 1974


폐기된 주택은 갈라짐으로써 ‘틈’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틈 사이로는 햇빛이 비추고, 공기가 흐르게 된다. 틈은 그야말로 시간의 흐름에 따른 과거와 현재의 분리와 단절을 나타내는 상징인 것이다. 틈은 과거에 지어진 주택 건물 자체의 표면에 달라붙어 있지만, 동시에 미래의 고든 마타 클락을 통해 만들어진 ‘갈라짐’ 그 자체를 구성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틈은 과거와 미래가 중첩되어 있는 영역인 동시에 그 어느 것에도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틈을 통해 우리는 자택이 자택으로써의 기능을 훌륭히 수행해냈던 과거에 대해 생각하게 되지만, 동시에 틈 그자체로 인해 자택이 더 이상 자택이 될 수 없는 현재를 마주보게 된다. 따라서 틈이라는 영역을 통해 그 자체로 영원한 자택의 과거는 언제나 과거로부터 갈라져 나와 현재의 순간으로 소환되고 마는 것이다.

고든 마타 클락 본인이 밝히고 있듯, 우리는 ‘현재의 시간’에 대한 자각을 보존하기 위해 종종 ‘진공’상태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진공은 문화적으로 다듬어진 것으로, 자꾸만 해체되려고 하는 우리 시대의 정체성을 ‘가만히’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하나의 수단이다.

초월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세워져 있는 기념비와 달리, 폐허는 시간의 흐름, 그리고 영원성의 불가능성에 대한 지시이다. 따라서 폐허로 향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폐허만이 가질 수 있는 힘, ‘순간화 된 영원’을 상징하는 힘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공간


해체의 경계

현대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 구분은 아마도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의 구분일 것이다. 사적인 영역에서도 우리는 경계를 설정한다. 어느 정도의 거리는 친구와, 어느 정도의 거리는 연인과, 또 어느 정도의 거리는 혼자서만 유지할 수 있도록 말이다. 공적인 영역에서의 구분은 역시 장황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더욱 철저하다. 낯선 이와의 거리, 동료와의 거리는 명확하게 설정되어 있으며, 이러한 경계를 침범 당했을 때 우리는 당황하거나 불안해하거나 분노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대적인 삶에서의 물리적 거리는 더욱더 모호해지고 있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대륙너머의 상황을 알 수 있고, 언제든지 핸드폰을 통해 낯선 이의 삶을 추적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만약 전자를 심리적인 경계, 후자를 물리적인 경계라고 설정해본다면, 우리는 개인의 삶에서의 경계가 아무리 해체되어도 어느 정도의 한계는 있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물리적인 경계만큼은 더욱더 넓고 모호하게 해체되길 바라는 현대적인 삶의 이중적인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이렇듯 공간영역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애매하고도 모순적이다.

비토 아콘치의 작업은 이러한 모순에 대해 탐구하며, 자유자재로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넘나든다. 먼저 사적 영역에 대해 탐구한 그의 작품, <See Through>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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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to Acconci, <See Through>, 1970


이 작품에서 비토 아콘치는 거울 속의 자신을 응시하며, 복싱 선수처럼 거울이 깨질 때까지 그 위에 비쳐진 자신을 가격한다. 이 작품을 통해 생각해볼 점은, ‘우리는 과연 우리 자신과의 거리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가?’이다. 이는 다시 말해, ‘나는 나를 얼마나 사랑해야하고 또 얼마나 객관화해야 하는가?’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거울 속의 ‘나’는 나이면서도 내가 아니다. 우리가 자신을 대상화하고 객관화하여 보는 순간, 우리는 자주 자신에 대해 실망하며 분노한다. 이러한 ‘불편한 자신’을 비토 아콘치는 끊임없이 가격한다. 나에 대한 대상화 (거울)가 깨지는 순간 우리는 나 자신을 볼 수 없게 되고, 스트레스가 해소된 것처럼 평온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자존감에 대한 논의가 뜨거운 현대의 사회에서, 우리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높이는 것이 정답인지, 아니면 자신을 객관화하여 바라보고 실망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나 자신과의 거리 설정, 영역 구분은 언제나 가장 까다롭고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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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to Acconci, <Filler>, 1970


그렇다면 공적 영역에 대한 비토 아콘치의 탐구는 어떠한가? ‘Filler’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특히 페인트칠을 하기 전에 벽을 메우는 데 쓰는 충전제’, 또 하나는 ‘중요하지는 않고, 시간·공간 등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네이버 영어 사전) <Filler>라는 작품에서, 비토 아콘치는 작은 상자 속에 머리를 두고, 누운 채로 기침한다. 덕분에 그는 보이면서 안 보이고, 따라서 비토 아콘치이면서 비토 아콘치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렇듯 우리는 숨어버린 비토 아콘치를 바라보며, 상자 속에 감춰져 있을 그의 얼굴을 상상한다. 안에 든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상자를 벗겨 그 안에 있는 비토 아콘치를 상상하여 사적인 그의 영역 – 작은 상자 –를 끊임없이 침범한다. 이에 그는 불편해하며 기침한다. 사적인 영역을 끊임없이 침범하는 대중, 사람을 편히 쉬지도 못하게 만드는 이러한 침입, 그 안에서 숨어버린 개인, 이에 병든 신체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이 모호하게 뒤섞인 채, 그 틈새에 놓인 개인의 중요성을 묵살하고, 하나의 개인을 단지 일말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공간을 채우고만 있는 존재로써 만들어버린 우리의 사회를 생각하게 만든다. 과연 우리는 타인의 영역을 어디 까지 침범하고, 그들이 쳐둔 울타리를 어디까지 해체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맥락에서 ‘Filler’라는 제목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경계의 해체

집이란 무엇인가? 누군가에게 집이란 지친 몸을 편히 쉬게 해줄 수 있는 휴식 공간이며, 누군가에게는 집이란 외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수 있는 방어공간이다. 누구에게나 집이란 것은 소중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집이란 진정으로 무엇일까? 어째서 우리는 언제나 집에 가고 싶어 하면서도 집에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일까? 장 피에르 레이노의 ‘집’을 개조과정은, 현대적 삶 속에서의 한 개인이 ‘집’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켜온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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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Pierre Raynaud
La Maison de La Celle-Saint-Cloud, 1993


1970-1974년까지, 그에게 있어 집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줄 수 있는 폐쇄적 도피처였다. 그의 집은 타인의 출입을 완전하게 차단하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외부와 연결되어 있는 공간은 1층의 창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창문 또한 “전쟁 시 적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숨기고 총구만을 내뿜을 수 있도록 설정한 총안 형식에서 빌어 온 것”(같은 책)이었고, 그 자신이 거주했던 방 역시도 “마치 정신질환자의 방처럼 벽에는 솜이 들어 있고, 천장에는 강철 뚜껑 문을 설치하였다.” (같은 책) 말하자면 그는 그의 집을 개조함으로써 단순한 거주를 넘어 자신을 가두는 상황까지로 자신을 몰아간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고독의 표현, 그리고 세계와의 단절은 역설적이게도 그에게 치료제로써 작용했다.

그가 직접 밝혔듯이, 그는 “미친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솜을 넣은 벽 속에서 되살아났” (같은 책)던 것이다. 1년 반 이후, 그는 자신의 집을 그 어떤 것도, 심지어는 세균조차 침입할 수 없는 완전무결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 내부의 벽을 하얀 타일로 바꾸고, 침대 역시 병원 침대로 변경했다. 그리고 1975년 6월, 누아락 수도원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해달라는 의뢰를 기점으로, 장 피에르 레이노는 빛을 통한 정신공간의 구축 가능성을 깨닫고 집 안에 창문을 도입하는 등 개조의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이때부터 그는 집을 단순히 폐쇄적인 것이 아닌, 열린 공간으로 만들어나가 이상적인 세계의 구축과 자아의 정신적인 위로를 구현했다. 그리고 마침내, 1993년, 자신의 집을 부숨으로써, 그는 세계를 향해 쳐두었던 자신만의 울타리를 완전히 허물게 되었다. 그는 나아가 해체된 집의 파편을 전시하기도 하였는데, 개조부터 전시까지의 일련의 과정은 한 개인이 자신의 경계를 지속해서 해체해온 과정을 단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콘크리트를 깨부순 그의 행동은 그의 초기작품을 연상시킨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폭격으로 인해 사망한 아버지의 소식을 접한 그는 충격으로 인해 심각한 정신 장애를 앓으며 세계와 단절된 채로 살아왔다. 원예학교를 나온 그는 시멘트를 화분에 채움으로써 처음으로 예술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는데, 그가 말한 것처럼 “원예학교에서 꽃을 기르는 법은 배웠지만, 꽃들을 죽음으로부터 막는 법은 배우지 못했”고, “따라서 시멘트를 채워넣음으로써 또 다른 희생을 막”(같은 책)고자 한 것이다.

이렇듯 소극적이고 트라우마적인 그의 초기 작품과 달리, 예술의 치유적 힘을 통해 보다 성숙해진 그는 직접 단단한 경계를 깨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알을 깨기 위해 투쟁했던 그는 예술을 통해 비로소 새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To Be or Not to Be,

or Both or Neither



현대예술가인 젤로비나의 한 작품 명을 인용해보자면, 사느냐 죽느냐 (To be or not to be), 그것은 이제 문제가 아니로소이다. 살면서 안 살기, 또는 살지도 죽지도 않기(or both or neither)가 이제는 문제로소이다. 현대미술의 도치된 명제는 언제나 자기를 넘어, 그 이상의 해답을 추구한다.





참고문헌

1. 린다 와인트라웁 지음, 정수경/김진엽 옮김, 『미술을 넘은 미술: 현대미술의 의미 찾기 : 197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 Art on the edge and over』, 2015, 북코리아.
2. 신채기 외 지음, 『현대미술 현실을 말하다』, 2016, 서울: Gogh
3. Sandra Zalman, ‘Ruins and Non-u-ments’, in Sandra Zalman (ed.), In Focus: Walls Paper 1972 by Gordon Matta-Clark, Tate Research Publication, 2017, (https://www.tate.org.uk/research/publications/in-focus/walls-paper/ruins-and-non-u-ments, accessed 14 November 2018.)

  
[한선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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