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샤를 리샤르 아믈랭 피아노 리사이틀 [공연]

글 입력 2018.11.22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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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존재 방식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음악이란 소리의 구조(음의 고저장단 및 음색)로 구성된 하나의 추상적 '유형'이다. 이러한 유형은 개별 연주라는 '사례'들을 통해서 경험될 수 있는데, 수가 존재하는 순간 모든 수의 조합도 존재하는 것처럼, 소리의 구조가 존재하는 순간 그 구조가 조합된 유형은 이미존재한다. 따라서 유형은 창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음악작품을 유형으로서의 소리의 구조이다. 이것이 바로 전통적인 음악의 존재론이다.

모든 음악가가 만들어낸 음악은 이미 존재했던 것을 발견해낸 것일뿐 그들이 새롭게 작곡 (창조)한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의 상식적 믿음과는 매우 다른 결론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레빈슨은 창조되는 것이 가능한 새로운 유형을 제안했다. 음이 존재한다고 하는 순간 모든 음의 조합도 존재한다는 것이직관이긴 하지만, 종이와 잉크가 존재하는 순간부터 햄릿이 가능한조합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처럼, 음악과 같은 어떠한 유형은 그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거창한 서론이다. 하지만 샤를 리샤르 아믈랭의 피아노 리사이틀을 감상하면서 나는 문득 이 생각이 났고, 연주가 끝나고 나자 다시 한번 레빈슨의 정의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음악 문외한인 나에게 피아노 리사이틀을 감상하러 가는 것은 어딘가 부담스럽고 겁이 나는 경험이었다. 음악이란 나에게 있어 다음과 같은 존재 방식만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하나, 과제 할 때 틀어두는 '노동'요. 둘, 혼자 집에서 샤워할 때 틀어 놓는 '무서움완화'요, 셋, 이동할 때 틀어두는 '심심풀이'요. 넷, 감정이 북받치는 날 듣고 싶은 '감성'요 등등. 한마디로 나는 철저하게 나의 각종 편의를 위해서만 음악을 듣고, 이러한 태도로 음악을 대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나를 조금이나마 깨워준 것이 바로 이번의 연주회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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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턴 제20번 c# 단조 Op. posth와 4개의 즉흥곡 중 즉흥곡 A♭장조


가장 인상적이었던 두 곡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첫 곡인 <녹턴 제20번 c# 단조 Op. posth>는 '풍부한 표정을 담아서 느리게' 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러한 정보를 모르고 보았을 때도 샤를 리샤르 아믈랭은 이 제목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피아노 건반을 누를 때마다, 건반을 누르는 게 아니라 마치 따듯한 우유를 천천히 따르는 것 같이, 음조를 연결되고, 유연하고, 완만하게 표현한 그의 재능은 나를 즉시 사로잡았다. 음악의 추상적인, 즉 비가시적인 특성으로 인해, 곡에 대한 표현 역시 추상적이고 수사적인 표현을 많이 쓸 수밖에 없는데, 이전에는 그것이 어느 정도 과장이라고 생각했으나, 현장에서 연주를 들어보니, 천만에! 그것은 과장이 아니라, 심지어는 어떤 언어로 묘사해도 불충분한 매우 겸손한 서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흥곡 A♭장조>는 어떠한가? 곡의 도입부는 압도적이었다.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하지만 경쾌하게 이어지는 음들의 향연에 속으로 감탄을 하고 또 했다. '분수에서 튀기는 물에서 보이는 밝은 햇빛이 있다'는 말(Ferdynand Hoesick)에 공감한다. 콘서트홀의 따스한 베이지색 조명 아래, 샤를 리샤르 아믈랭이 손가락 사이로 햇빛을 반사하고 있는 환영적 효과를 목도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이상적인 피아노 연주란, 감상자에게 그것이 피아노 연주라는 것을 자각치 못하게 할 때 비로소 성취된다. 다시 말해 감상자는 완전하게 곡 속으로 빠져들어 자신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포근한 분위기 속에서 편안히 휴식할 수 있도록 하는 연주를 선호한다는 것인데, 샤를 리샤르 아믈랭의 연주를 통해 저녁 8시라는 늦은 시간에도 나는 나른한 오후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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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가 끝나고


회화, 조각과 달리,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음악의 흐름은 곧 시간의 흐름인데, 정신없이 피아노 소리에 빠져있다 보니 시간이 나의 옆으로 아주 매끄럽게, 미끈하게, 미끄러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연주가 끝나고, 샤를 리샤르 아믈랭은 건반 위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하지만 음은 여전히 잔잔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고, 가슴 속의 여운은 가시지 않았다. 그가 일어나고, 인사하고, 퇴장하는 일련의 동작이 슬로우 모션처럼 펼쳐졌다.

꿈 같은 시간이 끝난 것이 못내 아쉬워 긴 숨을 내뱉던 차, 그가 다시 돌아왔다. 아, 맞다. 앙코르곡! 서둘러 좌석에 편히 '누워' 연주를 기다렸다. 이름 모를 곡들이 이어지는 와중에, 어떻게 저렇게 맑고 예쁜, 진주 같은 소리가 피아노에서 나올 수 있는지 새삼 경탄했다.

일주일이 막 시작하고 있는 화요일, 그러한 화요일이 막 끝나고 있는 저녁 10시. 연주가 끝난 후 끝나지 않은 연주. 모든 것이 완벽했다.


앙코르곡 정보:
- Bach : keyboard concerto No. 5 in F minor BWV 1056 2악장

- Schumann : Arabeske in C major Op.18


  
[한선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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