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막 속의 흰개미,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데요?!

그저 너로 존재하는 방법
글 입력 2018.11.20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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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요!!"
그 나이를 먹고 엄마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의 개관작
사막 속의 흰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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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화회관 S씨어터는 기대했던 공간이고, <사막 속의 흰개미>는 기대했던 작품이었다. 단지 세종문화회관에서 봤던 <그 개> 공연이 좋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같은 곳 같은 극단에서 하는 작품을 기대하게 된다는 점은 놀랍고도 조금은 무섭다. 마치 내 글 하나로 다른 글들을 읽지 않아도 어떨지 판단이 내려지는 것과 같다. 잘 되면 기대감이자, 못 되면 선입견, 고정관념이 된다. 하지만 그마저도 공연을, 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유도해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문화를 수용하는 사람들이 작품을 보기도 전에 어떠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을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단지, 조금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싶다면 수용자에게 열린 마음을 가지라고 '권유'할 수밖에 없다.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건축까지


세종문화회관의 특징은 광화문 쪽에서도 접근할 수 있고, 광화문역 쪽에서도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엄청난 계단을 올라서, 데칼코마니라도 한 듯이 똑같이 엄청난 반대편 계단을 내려오면, 광화문 쪽의 대로변과는 전혀 다른 길이 펼쳐진다. 완전히 뚫린 광화문 광장 쪽 길과는 반대로 자그마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도 자그마한 곳이었다. 신기한 것은 건물이 위로 올라가는 시스템이 아니라 마치 지하철역을 들어가는 것처럼 아래로 내려가는 형식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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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에 있는 소규모 공연장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공연장은 건물로 들어가서 관람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생각해보면 남부터미널 예술의전당 같이 대규모 공연장이 아니라면 그런 공연장은 잘 없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관람했던 남산예술센터나 <판소리 오셀로>를 보여준 정동극장같이 중규모의 공연장도 입구를 생각해보면 지하로 내려가야 한다. 공연장이 햇빛과 같은 자연광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 공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지하층을 활용하고 지상으로 돋보이게 하지는 않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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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국토정보플랫폼


조금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건폐율'이라는 개념을 떠올릴 수 있다. 위 지도에 보라색 전철역은 광화문역이고, 북쪽에 세종문화회관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세종문화회관은 주변에 다른 건물들에 비해 확실히 크다. 그런데 지도를 보면 건물들이 흰 부분을 많이 남긴 채 지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건물을 대지에 꽉 차게 지어서 올리면 그 땅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많이 남기는 걸까?

그 이유는 법적으로 한 대지 안에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비율이 대략 40%에서 50% 정도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대지 면적에 대한 건축비율을 건폐율이라고 한다. 예술의전당처럼 한 번에 지어진 건물의 경우 건폐율 등 건축물에 대한 법적인 규제를 다 지켜서 설계해 지상층에 공연장을 설치할 수 있었지만, 세종문화회관의 S씨어터는 한 번에 설계된 것이 아니므로 땅에 일정한 면적을 확보하기 힘들어 지하로 내렸을 거로 추측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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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씨어터는 지하 1층, 2층으로 이루어져있고, 매표소는 지하 2층에 있어서 완전히 내려가야 했다. 내부에 들어가서도 꽤 놀랐다. 종방향과 횡 방향의 비가 1대 3 이상으로 차이가 나는 기다란 직사각형의 블랙박스형 무대에 양쪽으로 있었다. 무대에 소품으로 사용되는 모래더미에서 나온 모래알이 앉아있는 발에 밟힐 정도로 근접했다. 덕분에 배우를 매우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워낙 길쭉한 무대라 그런지 배우가 반대편에 있는다거나, 반대쪽을 보고 말할 때는 무슨 말인지 말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동시에 반대편에 앉은 관객들도 그만큼 자주 볼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친다거나 하는 불편한 상황은 없었지만, 공연을 보는 타인의 진지한 얼굴을 그때만큼 집중해서 봤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딱히 의도해서 보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말 자연스럽게 그들의 얼굴이 시선에 잡혔다. 왜 그런 불편함을 의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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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S씨어터의 무대가 가진 기능은 이것만은 아닐 것이다. 직사각형의 블랙박스 중간쯤에 막을 칠 수 있는 설치물이 보였다. 그리고 1층 관객석뿐만 아니라 2층에도 관객석이 존재한다. 그 점을 보니, 단방향의 공연을 할 때는 1층의 무대 절반과 2층 관객석만을 활용한 무대가 펼쳐질 것이고, 지금처럼 공연장 전체를 사용할 때는 무대 전체와 관객석을 모두 활용할 수 있는 말 그대로 가변형의 무대였다.

가변형이라는 것, 때에 따라서 다르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마치 맞춤형 연극처럼 좋게 들렸지만, 실제로 경험해보니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다만 <사막 속의 흰개미>에서 길쭉한 무대를 사용한 것은 아마 극에서 보여주려는 교회 목사의 집이 얼마나 길고 거대한지, 무대 속에 사람을 직접 집어넣어서 체험할 수 있게 한 의도로 추측된다.

그렇게 보면, 어떤 공간을 설계한다는 것은 얼마나 오만한 일인지 모른다. 어떤 특징을 가진 사람이 어떤 삶의 방식을 누리기 위해서 살기 위한 주택을 짓는다고 하면 거기에 건축가의 역할은 중요할지도 모르지만, 만약 지어야 하는 건축물이 전시관이라면? 전시관에서 평생 어떤 주제의 전시만 할 것이 아니라면 공간을 어떤 의도로 짓는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공연장을 짓는다면? 아무리 가변형의 블랙박스를 짓는다고 하더라도 경우의 수가 한정되어있다. 세종문화회관의 S씨어터를 활용하는 방법은 첫 번째, 1층 관객석과 1층 무대를 활용하는 경우, 두 번째 1층, 2층 관객석과 무대를 활용하는 경우, 첫 번째와 두 번째 방법에 무대를 절반만 활용하는 경우들, 그리고 1층 관객석을 길쭉한 방향 대신, 짧은 방향으로 놓는 경우 등 아무리 많아 봤자 6~8가지를 넘지 않을 것이다. 공간을 짓는다는 것은, 내부에 들어오는 프로그램이 한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많은 것을 수용하려고 해봤자, 들어오는 것은 맞춰질 수밖에 없다. 그런 식으로 좀 더 다양한 것들이 정형화되고, 필터링 되어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우리는 짓는다. 처음에는 공간만을 나눴다. '여기 이만큼은 전시관을 할 거고요, 여기는 상업시설이 들어올 거에요.' 그럼 교수님은 말씀하신다. "어떤 전시관을 할 것인지에 따라서 공간이 나온다. 평면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공간은 입체적이다." 그러면 우리는 또 짓는다. '여기는 상업시설에서 전시관을 들여다볼 수 있는 오픈된 전시관이 될 거에요. 그래서 유리로 공간을 구분할 거고, 위에서도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어요.'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문화초대를 받고 서울의 곳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는 4년째 건축을 하면서도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설계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다.



주어진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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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이 많았다. 왼쪽의 남자는 교회의 목사고, 오른쪽의 사람은 목사의 아버지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그들로부터 물려받은 직책을 떠맡기 싫어 하면서도 아버지가 '싸놓은 똥'을 치워야 하는 역할이다. 그는 늘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한다. 아버지가 저질러놓은 잘못을 뒤수습하면서 자기는 다르다고 외치지만 막상 다를 것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늘 엄마에게 떼를 쓴다. "제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하는데요?!" 분노에 찬 외침이지만 그 말은 그 나이먹고 할 말은 아니었다. 더더욱 교회 목사가 할 만한 이야기는 절대 아니었다.

주체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망상 속에서 살아있는 아버지와 늘 싸우고, 아버지가 타고있는 휠체어를 밀며 마당을 질주하는 정신착란증세를 보인다. 그는 그토록 자신의 삶을 지정해놓은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으면 모든 게 다 사라질거라 믿었지만, 자기가 그 아버지를 죽이지 못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죽어서도, 아버지가 있는 삶을 살아야했다. 그들은 어쩔 수 없더라도 그 삶을 공유하는 외로운 사람들이었기때문에 서로에게서 절대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제 대표님과 티타임을 가지면서, <사막 속의 흰개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표님은 나에게 질문을 하셨다. 만약 교회목사처럼 돈이 많고 명성도 많지만,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사람으로 살 기회가 있다면 그렇게 살 수 있겠는가, 라고 물어보셨다. 나의 대답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거였다. 어차피 우리는 크고 작은 역할을 맡으며 살아가고 있고, 누구나 자신의 욕구를 어느 정도 제어하면서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간다. 그의 삶도 그닥 다를 것 없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굴러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 자리까지 올라간다면 나는 부정한 일을 저지르지 않을 자신도 없고, 저지른 일을 악착같이 숨기게 되지는 않을까. 대표님의 생각은 달랐다. 그런 점에서 내 남자친구와 비슷하신 것 같다. 주어진 것에서 벗어나서 자기가 뭔가를 하려고 한다. 남자친구는 사주를 믿지 않는데 아마 대표님도 그러실 것 같다.

역할이 주어지면 그 역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발버둥 치는 사람이 있고, 정말로 벗어나는 사람이 있다. 그 선택은 자신의 몫일 것이다. 받아들이면 편하다. 갈등할 필요 없이, 가끔 힘든 일에 투정부리면서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면 된다. 하지만 벗어나는 것은 어렵다. 예전에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나온 것처럼 인간에게는 관성이란 게 있어서 하려던 것을 계속 유지하려는 습관이 있다. 그게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불편하면서도 편하다. 것을 보는 것은 불편하지만, 그걸 그냥 TV 보듯이 드러누워서 욕하는 것은 편하다.

나는 신기하게도 운명론자이다. 지금 사는 삶은 어찌 되었든 다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에 찼던 돌멩이가 결국은 수많은 인과 관계를 거쳐서 자신에게 오는 것이다. 내가 어떤 특별한 선택을 하는 것도, 어떤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도 결국은 과거의 자신이 만든 것. 그런 점에서 사람은 창조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창조마저 사실은 우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은 우연이며 운명이라고 믿는다. 단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운명론자라고 '될 대로 대라'고 믿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매일 4시간도 자지 못할 정도로 치열하게 살고 있다. 내가 그렇게 열심히 사는 것 그 자체를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나의 운명론은,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를 증오하지 않고, 내 삶을 증오하지 않는 것. 그저 그뿐이다. 단순히 잘 될 거야, 믿는 마음은 나태함이며 운명과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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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오른쪽의 여자는 목사의 아버지로부터 피해를 본 사람이다. 15년간 단 한 번도 그를 잊은 적이 없다. 그래서 목사의 집에 찾아왔는데 목사는 그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싫어하면 싫어할수록 단 한 순간도 잊을 수 없고, 상대방도 나를 그렇게 기억해주기를 바라게 된다.

나도 여자와 마찬가지의 이유로 가장 싫어했던 사람이 인생에 둘이나 있다. 신기한 게, 증오란 것은 또 다른 증오를 불러일으키고 결국은 '증오'를 가진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다. 한때는 그들이 지옥에서 살기를 바라고 또 바라고, 많은 날을 눈물로 지새우곤 했다. 그러나 살면서 알게 된 것 하나는, 그들에게 하는 가장 큰 복수는 뭐 경찰에 신고한다거나 나의 억울함을 누군가에게 호소하며 동정심을 바라는 것보다는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 그들이 잘못된 윤리의식을 갖고 살아가게 내버려두는 것 자체가 가장 발전이 없고, 가장 성장하지 않을 '고인 물에서 썩어버리게 하는 것'. 복수심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글을 쓰다 보니 알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그들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한다는 사실을. 괜히 숨겨두었던 기억을 들추어낸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더는 과거의 일 때문에 현재의 내가 고통받는 일은 없다.

여자의 말대로, 그런 일을 겪은 나도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일까. 아무리 싫은 일이라도, 정말 없어져서 다시 태어나면 겪고 싶지 않은 일일지라도, 그 일마저 나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런 나를 사랑해주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런 나를 받아들이니 그제야 내 삶을 살게 된 것 같다.

목사의 집 아래에 흰개미들의 굴이 있어 곧 내려앉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여자는 방방 뛰면서 정말 무너질 수 있느냐고 여러 번 되묻는다. '무너져! 무너져!'를 외치며 집을 어떻게든 부숴버리고 싶어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애달파서, 너무나 순수해서, 그 차가운 얼굴 속에 숨어있는 아픔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나는 또 그 여자의 얼굴에서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가슴이 아팠다.

예전에는 상처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강한 사람'이냐, '약한 사람'이냐를 나누려고 했다. 강해지고 싶어서 이겨내고 싶었고, 약한 사람이 되기 싫어 상처받지 않은 척했다.

그런데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그런 생각이 많이 사라졌다. 남자친구를 처음 봤을 땐 강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때의 나는 여전히 강하고 약한지에 따라서 사람을 분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강한 사람이 좋아서 그에게 이끌렸다. 400일 가까이 사귀면서 알게 된 그는 강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마냥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고, 팀플도 혼자서 주도하던 그는 마냥 강한 사람은 아니었다. 팀원들의 '읽씹'을 은근히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노래를 잘해서 밴드부 보컬과 드럼을 치던 그도 태어날 때부터 음악을 잘했던 것은 아니었다. 원래 음치 박치였는데 엄청난 연습으로 공연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된 거였다. 늘 닭가슴살과 고구마만 먹고, 하루에 세 시간씩 운동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자기관리가 뛰어나고 늘 자신의 욕구보다 바라는 이상향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도 가끔은 살이 찔 때가 있고 맛있는 것을 먹을 때도 있었고 운동을 하기 싫어할 때도 있었다. 그는 강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주어진 조건도 없고, 운도 없는데도 정말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사람. 결과가 따라주지 않아도 또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사람. 한 번에 대기업에 붙은 형과는 달리, 매번 자기소개서를 쓰고 떨어지는 것을 반복하며 내 곁에서 울다가도 다음 날이면 다시 도전하는 사람. 강한 척하는 것도 아니었고 강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모습으로도 그는 충분히 강했고, 여전히 멋있었다.

신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무엇보다 크게 다가와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지만,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나마저 나라고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더는 내가 아니게 될 만큼 바뀌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가운데 있는 인물은 흰개미를 연구하러 외국에서 온 곤충연구가 에밀리아다. 외국으로 입양되어 갔지만, 한국에 온 목적은 '친부모님'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부모님을 입양한 부모님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버려진 이유가 무엇이든 궁금해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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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본 영화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에서 '크레덴스 베어본'이라는 인물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부모님을 찾으려고 한다. 아마 그가 남들과는 다른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부모님을 찾아야만 그 근본을 알 수 있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사막 속의 흰개미>에 나오는 에밀리아와는 상당히 다른 태도이다.

종종 부모님이 입양을 보낸 책에서도 '자신을 왜 버렸는지. 이유를 물어보려고 하는 내용이 많다. 그 이유를 알아도 전혀 해결될 것은 없는데도 말이다. 여느 사람들처럼 경제적인 여건이 되지 않았거나 어떤 사정이 있었든 간에 그 이유를 알게 되면 그렇게 평범한 이유로 자신도 버려졌다는 것에 더 상처를 받을 것이 분명한데도. 하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뭐라도 이유가 필요했다. 정말 허무한 이유더라도, 자신의 상처에 이유가 필요한 것이다.

에밀리아의 태도는 그것과는 달랐다. 자신은 그냥 부모님이 길러준 에밀리아였을 뿐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유년기로부터 찾는 것이 아니라, 그냥 기억나는 그 시절에서부터 찾았다. 인간의 본질이란 것이, 꼭 낳아주신 부모님에게서 유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부분이었다. 에밀리아의 말대로 정말 흘러가는 대로, 자연의 흐름을 따라서 그렇게 된 현상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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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흰개미가 집을 파먹는 것을 비상상황이라고 하지 않고 그저 자연 현상이라고 이야기한다. 개미들이 물을 찾기 위해서 주변에 미스터리 서클을 만들어내고, 서클은 점점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사라졌다가 다시 생겼다가 하면서 나무들을 말라버리게 하고, 결국은 마을에 가뭄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그것은 '좋다', '안 좋다'의 상황이 아니라 물이 없으므로 하는 행동이라고 했다.


우린, 뭘 믿고 살아온 걸까.
또 뭘 믿고 사는 걸까.
우린, 우리가 뭐라고 믿는 걸까.


그렇게 불균형이 찾아오지만, 곧 흰개미들은 자연의 균형을 가져온다. 균형이 오기까지 불균형이 필요하다는 것. 불균형이 지나면 균형적인 상태가 찾아온다는 것.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지만, 내가 그저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해결되는 그런 일이었다.





사막 속의 흰개미
- 세종S씨어터 개관기념작 -


일자 : 2018.11.09(금) ~ 11.25(일)

시간
평일 - 오후 8시
토 - 오후 3시, 7시
일 - 오후 3시
화 - 공연없음

장소 :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티켓가격
R석 30,000원
S석 20,000원

주최
(재)세종문화회관

주관
서울시극단

관람연령
만 13세이상

공연시간
100분



문의
서울시극단
02-399-1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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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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