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우리는 내일도 비행운을 보며 다시 꿈꾸겠지 [도서]

우리에겐 불행을 직면할 용기가 필요하다
글 입력 2018.11.06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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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



작년 4월 즈음부터였을까. 봄이 막 시작되고 있는 무렵이었다. 번화가 거리를 걷다 보면 우울한 멜로디의 한 어쿠스틱 노래가 자주 들려왔다. 어렴풋하게 들리던 가사 '나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 알고 보니 그 노래는 문문(Moonmoon)이라는 어느 인디 가수의 노래 <비행운>이었다. 주변 친구들도 한번 들어보라며 내게 얘기해 주었고, 음원 차트에서 역주행을 할 만큼 인기를 끌던 노래였다. 하지만 이 노래의 가사와 내용이 김애란의 소설 <비행운>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모든 의혹은 사실이었다. 문문은 원작자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소설의 내용과 문장들을 사용했다. 그 와중에 머릿속에서 점점 확실해지는 생각은, <비행운>은 엄청나게 매력적인 소설일 게 분명하다는 것. 누가 읽더라도 마음을 단숨에 뺏길 만큼 강렬한 문장이었다.




그럼에도 비극은 계속된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어둑한 술집에 죽치고 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지적이고 허세 어린 농담을 주고받다 봄 세상이 조금 만만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어느 날 자리에서 눈을 떠보니 시시한 인간이 돼 있던 거다. 아무것도 되지 않은 채.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이 이상이 될 수 없을 거란 불안을 안고. 아울러 은지와 서윤은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가진 것 중 가장 빛나는 것을 이제 막 잃어버리게 될 참이라는 것을.'


<호텔 니약 따 中>



'오늘이 내일 같고 어제가 그제 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아침이 저녁 같고 새벽이 저물녘 같은 하루가 반복됐다. 세상은 낮에도 어둡고 밤에도 어두웠다. 해를 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무덤을 걱정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고 계셨다. (중략)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 얘길 전혀 하지 않으셨다.'


<물속 골리앗 中>



'아내의 병이 깊어갈 즈음, 그는 식구들에게 다시 연락했다. 형제들은 그가 결혼한 지 몰랐다. 그들은 보험금을 빼먹고 떠난 다방 여자와 명화가 비슷한 부류일 거라 생각했다. (중략) 어쨌든 명화는 죽었다. 병원비가 아니더라도 죽을 상태였으나, 천천히 죽지 못하고 좀 이르게 갔다. 나쁜 냄새를 풍기며. 바싹 쪼그라든 채.'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中>



김애란의 소설 <비행운>은 총 8개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슬프고 우스운 사실은 8개의 각기 다른 이야기들 모두 결국 비극을 향해 치닫는다는 것이다. 모든 주인공들은 잔혹한 현실을 마주한다. 상황은 점점 나빠지기만 한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좋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바로 그 논란의 문장, '너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는 마지막에 수록된 단편 <서른>에서 등장한다.


<서른>의 내용은 이러하다. 불행이 자꾸 삶을 좀먹어도 어떻게든 하루하루 20대를 버텨온 주인공은 마침 변변찮은 직장을 구하지 못하던 중, 전 남자친구를 통해 다단계 업체를 소개받아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단체 수용소 같은 숙소에서 제대로 된 밥 한 끼 먹지 못하고, 점점 파탄 나는 자신의 인간관계를 견디지 못한다. 결국 그녀는 대학생 시절 자신의 애교 많은 제자였던 혜미를 꼬셔 자신의 자리에 넣어주곤 그곳을 뛰쳐나온다. 다단계는 다름 아닌 사람을 파는 일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대학생 시절 가르쳤던 청소년 아이들을 보며 생각했던 것처럼, 혜미를 보고도 그런 생각을 했을 테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겨우 내가 되겠지.' 혜미는 다단계에 들어간 뒤로 주인공에게 계속 문자를 보내오지만, 그녀는 답장하지 않는다. 혜미의 문자는 어느 순간부터 뜸해지고, 주인공은 혜미가 그곳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목을 매 자살을 시도하여 식물인간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끔찍하고 잔혹한, 견딜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여기서 우리에게 남은 한 줄기 희망은, 주인공이 혜미에게 사과를 하러 병원으로 찾아갔다는 사실이다. 마주한 불행을 정면으로 부딪칠 용기가 생길 때, 우리는 이전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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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飛行雲)을 보며 새로운 꿈을 꾸지만

우리에게 돌아오는 건 비행운(非幸運)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편 <하루의 축>의 주인공은 현재 소년원에 가 있는 아들을 홀로 키우는 엄마다. 주인공은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추석 당일 연휴까지 공항에 출근하면서 화장실을 청소하고, 업무가 끝나면 넓은 유리창 너머의 비행운을 본다. 그녀는 추석을 맞이하여 오랜만에 아들을 볼 생각에 조금은 들떠있다. 그리곤 아들에게서 온 편지를 설레는 마음으로 열어보지만, 편지에 쓰인 건 '엄마, 음식 좀 보내줘.'이라는 허무한 한 문장뿐이다. 또 다른 단편 <호텔 니약따>의 20대의 여대생 친구 둘 또한 푸른 하늘의 비행운을 보면서 머나먼 나라로 훌쩍 떠나기를 꿈꾼다. 그들은 어렵게 돈을 모아 고민 끝에 결국 동남아로 떠났다. 시작은 순조로워 보였지만, 사소한 다툼과 서운함이 모이고 쌓이고 결국 둘은 여행을 중단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한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서는 과거 주인공이 짝사랑했던, 현재는 방송국 PD로 일하는 학교 선배가 오랜만에 주인공에 연락을 해오며 부탁을 한다. 그녀는 설레고 긴장되는 마음으로 약속 자리에 얼굴을 비춘다. 그러나 자신에게 맡겨진 부탁은 우스꽝스러운 레슬링복을 입고 음식을 먹어치우는 엑스트라 역할이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통통했던 주인공. 그녀가 선배에게 그간에 가지고 있었던 다정하고 좋은 모습들은 모두 한순간에 와장창 부서져 버린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모두 하늘의 비행운을 보며 다시금 새로운 꿈을 꾸었다. 새로운 결심을 하고 더 나은 삶을 열망했다. 그러나 그들이 맞이한 건 또 다른 비행운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불행의 모습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삶을 살아나가야만 한다. 잔인한 이야기라고 나무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각자 불행의 몫을 가지고 있다. 우리를 애써 속이며 우리의 앞길엔 행운만 가득할 것이라고 세뇌하다 보면 결국 몰아치는 불행들에 보기 좋게 고꾸라져 버릴 것이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에세이집들의 내용을 읽어보면 모든 게 다 잘 될 것이고 행복해질 거라는, 그러니 괜찮다는 이야기 뿐 들이다. 그런 말뿐인 위로들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불행을 회피하고 숨어다니며 행복만 갈구하는 건 삶의 어느 문제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가올 비행운들과 불행들을 바라보며 인정하고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이다. 아무 맥락도 없이 그저 잘 될 거라고 끝없이 긍정하기보다는, 차라리 이것 또한 지나갈 것이라고 토닥이는 것.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행복과 불행을 가지고 있는 거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 우리에게는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

비행운을 보며 꿈꾸고 설레다 결국 절망하더라도, 우리는 또 다시 불행을 정면으로 마주하고선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다시 꿈을 꿔야만 한다. 그것조차 그만둔다면, 우리에게 삶은 더는 의미가 없다. 이런 우리네 존재에게 작은 위안이 되는 사실은 나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이 작고 크나큰 비행운들을 견뎌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에겐 항상 서로가 필요하다. 서로를 불행들을 보듬으면서, 괜찮다고 위로를 건네고 용기를 복돋우며 우리는 이 삶을 견뎌낼 수 있다. 불행이 우리를 잡아먹지 못하게 막아낼 수 있다. 비행운(非幸運)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진 우리네 삶 속에서도, 다시 비행운(飛行雲)을 보고 새로운 꿈을 꿔 보는 것. 고개를 들어 하늘에 그려진 비행운들을 보며 꿈조차 꾸지 않는다면, 새로운 것들을 열망하지조차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더욱이 불행한 삶이다. 삶에 절대 굴복하지 않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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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 무렵 개봉했던 영화 <꿈의 제인>이 떠오른다. 우리, 불행한 얼굴로 오래오래 살자는 제인의 그 말. 그렇게 불행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걸 극복해낼 힘이 생긴다. 삶이 우리를 무너트리지 못하게 하는 단단한 마음가짐이 생긴다. 불행이 있기에 행복이 있는 법. 비행운이 있기에 행운도 존재하는 법.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건 불행을 직면하는 용기다.


[임정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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