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장녹수에 대한 위험한 접근. 공연 <궁: 장녹수전>

장녹수에 대한 위험한 접근
글 입력 2018.10.21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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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정동극장 상설공연

궁 : 장녹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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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프롤로그



공연을 보러 간 날은 계속 이어지던 추위가 풀리고, 햇빛이 따스한 맑은 날이었다. 공연에 대한 기대감에 좋은 날씨까지 얹어져 이미 들뜬 기분으로 정동극장을 향해 걸었다. 정동극장은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 끝 근처에 위치해 있는데, 마침 그 길을 따라 ‘정동문화축제’가 열려 다양한 물건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물건들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공연장 근처에 다다랐고, 3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기다리기로 했다. 커피를 마시며 앉아있으려니 너무 걷기 좋은 날씨라 주변 구경을 하며 근처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공연 시간에 맞춰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공연장으로 들어가자마자 마주하는 무대의 모습은 내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궁:장녹수전>이라는 붉은 글자 위로 흩어지는 꽃잎들이 장녹수라는 인물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권력을 탐하는 악녀’라는 이미지와 공연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예인’이라는 이미지가 합쳐진 그 분위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출연진들이 등장하며 공연은 시작되었다. 여러 묘기들을 보여주기도 하며 관객들의 호응도 이끌어내고, 두 명의 관객을 직접 무대로 초대하여 관객이 직접 참여하는 기회도 주며 본격적인 공연 전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넌버벌 퍼포먼스



2장_기녀들의 교방무.jpg
 


공연이 시작되고 출연진들이 나와 분위기를 띄우는 부분부터 ‘뭐지?’하는 의문이 생겼는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니 그 의문에 대해 제대로 알았다. 이 공연은 대사를 통해 스토리가 진행되는 다른 공연들과는 달리 대사가 등장하지 않는 넌버벌 퍼포먼스 극이었다. (넌버벌 퍼포먼스란 대사 없이 동작과 소리로만 진행되는 퍼포먼스로 비언어극이라는 말로 불리기도 한다.) 이번 공연 <궁:장녹수전>이 넌버벌 퍼포먼스라는 걸 공연이 시작될 때까지 전혀 모르고 있어서 처음에는 왜 말을 하지 않는지 의문이 생겼었다. 사전에 봤던 정보들에서도 따로 이 부분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보지 못했었기 때문에 연극이겠거니 생각했었다. 그래도 나는 이전에 '난타'라는 공연을 통해 넌버벌 퍼포먼스를 경험했던 적이 있어서 비교적 당황을 덜 했지만, 함께 공연을 보러 갔던 어머니는 출연진들이 대사를 하지 않고 동작으로만 진행하니 꽤 당황하셨던 것 같다.


공연이 시작되고 넌버벌인 것을 알고 나서 걱정됐던 것이 있다. 바로 내용 파악이었다. 이게 가벼운 내용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꾸며진 이야기인데, 대사가 없다면 내용이 이해가 될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막이 시작될 때마다 무대 옆에 놓인 화면을 통해 무슨 내용인지 간략하게 알려줘서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떠올려보니 오히려 외국 관객들에게는 그게 더 내용을 이해하기 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을 보러 갔을 때 절반 아니 그보다 더 많은 관객들이 외국인들이었다. 그런 외국 관객들은 우리나라 말로 대사를 하는 것보다 어느 정도 내용만 알려주고 동작을 통해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더 편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출



넌버벌 퍼포먼스로 진행되었기 때문일까? 연출적으로 굉장히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머릿속에 강렬하게 박히던 2장면이 있었는데, 그 장면은 공연이 끝나고 다시 되짚어보며 떠올릴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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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장면 중 하나는 [장녹수가 신하들에게 압박을 당하는 장면]이었다. 장녹수와 연산군이 함께 어울려 놀다 연산군의 곤룡포를 벗겨 장녹수가 입고, 그 상태로 계속 잡기 놀이를 하던 중 신하들이 들이닥치며 그런 장녹수를 압박하기 시작하는 장면이었다. 이 압박하는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 공연은 ‘북’을 택했다. 북을 들고 장녹수 주변을 쫓아다니고, 에워싸며 점차 그러나 끈질기게 공간을 좁혀간다. 그런 신하들을 피해 도망 다니기도 하고 둘러싸고 있는 신하들의 북을 치며 방어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도망과 추격, 공격과 방어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이 장면에서는 왕의 곤룡포를 직접 입으며 권력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궁 안에서 끊임없이 신하들에게 공격받지만 치열하게 버텨내는 장녹수의 모습을 대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잘 표현해냈다.



6장_상소문장면_녹수와연산.jpg
 

다른 하나는 [연산군을 압박하는 신하들 장면]이었다. 유흥에 빠져 집무를 등한시하는 연산군에게 신하들이 상소문을 들고 통촉해 달라 하며 압박하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의 연출이 개인적으로 이 공연에서 최고의 장면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굉장히 인상에 남았다. 처음엔 그저 한 명의 신하가 상소문을 들고 왕 앞에 나와 통촉하여 달라고 말을 올린다. 몇 명의 신하들이 줄줄이 등장해 같은 행위를 반복하지만, 연산군은 들은 채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점점 신하들의 불만이 커져가고 나중엔 단체로 연산군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이 압박하는 모습은 상소문을 통해 표현해냈다. 연산군을 가운데에 두고 각자 들고 있던 상소문을 펼치며 길게 늘어뜨린다. 늘어뜨린 상소문의 끝과 끝을 양쪽의 신하들이 잡고 일어서자 상소문이 연산군의 허리를 조이게 된다. 이 장면에서는 집무를 전혀 보지 않는 왕에 대한 불만들이 가득한 방대한 양의 상소문이 연산군의 숨을 죄여오고, 그 압박에 괴로워하는 왕의 모습을 완벽하게 연출해냈다.

또한, 이 압박하는 모습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부분에서도 연출에 놀랐던 것이 있다. 상소문에 괴로워하는 연산군을 위해 장녹수는 칼을 건네주고, 연산군은 그 칼로 자신을 압박하던 신하들은 가차 없이 베어버린다. 이때 푸른색의 조명이 신하를 벨 때마다 일부 붉은 조명으로 변하고, 마침내 모든 신하들을 베어버렸을 때는 모든 조명이 붉은색으로 바뀌어버렸다. 그 붉게 변해버린 조명은 피로 물든 조정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나에게 굉장한 인상을 남겼던 이 두 장면은 이 공연이 ‘넌버벌’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일반적인 공연이었다면 대사를 통해 상황 설명을 했었겠지만, 무언극으로 진행되는 이 공연은 그렇지 못했다. 때문에 그만큼 장면을 설명하기 위해 연출적으로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장면을 잘 표현해 내기 위해 소품, 조명, 음향, 동작 등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하다 이런 대단한 장면이 나오지 않았나 한다.




#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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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연출에 엄청난 감동을 받았던 것처럼 스토리도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만족스러웠던 연출력에 비해 스토리는 나에게 큰 아쉬움을 남겼다. 사실 공연을 보기 전부터 이번 공연은 기대감도 있었지만 스토리에 대한 우려를 지울 수가 없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조선 3대 악녀, 요부’라는 이미지가 아닌 ‘예인’이라는 이미지로 접근한다고 했었다. 이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기에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논란을 낳을 수 있기에 굉장히 조심스러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 부분에 대한 염려는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의 이 염려는 공연이 끝나고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었다. 오히려 그전보다 더 큰 염려가 생겼던 것 같다. 우선 이 공연은 ‘예인 장녹수’라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지만, 공연을 보면서 장녹수가 ‘예인’이라고 불릴 만큼 엄청 돋보인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같이 출연하는 다른 분들 실력과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었던 것 같다. 이 부분은 다른 분들도 워낙 잘하시기 때문에, 무용을 잘 알지 못하는 내가 구분을 못한 것이라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좀 역사적 논란이 있겠다 싶은 부분은 쉬이 넘어가기 어려웠다.


다른 이는 어떻게 봤을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이 공연에서 장녹수가 ‘악녀’로도 ‘예인’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사랑에 빠진 한 여자의 모습만이 보였을 뿐이었다. 심지어 장녹수를 두고 연산군과 제안대군의 삼각관계로도 보일 수 있겠다 싶었다. 이 공연을 다 보고 나와서는 역사 왜곡으로 논란이 있었던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가 떠올랐다. 이 드라마는 ‘조선 3대 악녀’라고 불리는 장희빈이 숙종을 사랑했던 여인의 모습으로 해석돼 너무 왜곡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는데, 이 공연 역시 이와 다를 바 없다고 느껴졌다. 그냥 연산군과 사랑에 빠진 장녹수는 그와 함께하고, 그의 곁을 지키다 결국 마지막까지 함께 생을 마감하는 슬픈 사랑 이야기같이 느껴졌다. 공연의 메인 주제가 ‘사랑’으로 변질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는 정말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을 한다. 장녹수에 대해 모르고 있던 사람들 그리고 대다수의 관객이었던 외국인들은 그저 사랑에 빠진 여인의 모습으로만 기억하게 될 수도 있다. 이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왜곡된 시선을 가지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주의를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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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가지고 있는 스토리 부분에서는 큰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그 외에는 꽤 좋은 공연이었다. 사실 한국무용은 우리나라 무용이긴 하지만 쉽게 접할 수 있는 무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공연을 보고 한국무용을 접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냥 한국무용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옛날 음악에 요즘 춤을 추기도 하며 거부감 없이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해서 한국무용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도 잘 적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더해 사물놀이까지 볼 수 있으니 더더욱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공연은 연출적으로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이 연출을 꼭 봤으면 한다. 공연에서 이 정도로 연출이 인상 깊었던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대사 대신 표현할 수 있는 최적의 연출을 했다고 말할 정도로 뇌리에 남았다. 말로 전해 들으며 상상하는 것과 실제로 보는 모습은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다른 이들도 직접 관람을 하며 나처럼 순간의 전율을 느껴봤으면 좋겠다. 올해까지 공연이 이어지기 때문에 시간이 되는 사람들은 한 번쯤 가서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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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미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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