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결핍, 불행 그리고

글 입력 2018.10.13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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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그개>

리뷰



그 개_최종포스터.jpg

 


연극 포스터를 접했을 때는 몰랐다. 이 연극이 이리도 아프고 슬픈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줄은. 한 아이와 개의 ‘성장’ 이야기쯤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됐든 이 연극의 끝에선 인물들은 행복할 거라는 어리석은 기대로 세종문화회관으로 향했다.




연출, 부새롬



9. 그 개_해일과 무스탕 영수와 선영 장강과 보쓰.jpg
 


연극 연출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 연극의 연출은 꽤 흥미로웠다. 세트와 벽면에는 영상을 활용하여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개로 등장하는 무스탕과 보쓰의 연기 또한 인상적이었다. 강아지 손짓과 몸짓을 잘 살려 연기했고 그들이 단순히 ‘멍멍’ 짖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성어를 사용함으로써 인물들과의 관계를 잘 보였다. ‘그 개’가 결국은 어떤 ‘인물’처럼 보이는 효과를 주기 충분했다.

 

이 극의 연출은 매우 ‘극’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해일이의 웹툰 속 세상을 그릴 때는 많은 사람이 배경으로 등장하고, 등장인물 간의 대화가 끝나도 바로바로 장면전환을 하지 않는다. 해일이 언덕을 오르면서 극이 다시 진행되고, 여러 인물이 동시에 등장하는 무대에서 핀 조명이 각 인물을 차례로 조명함으로써 극이 전개되기도 한다. 해일과 무스탕이 등장해 무스탕을 떠나보내는 장면을 보여주고, 해일만이 다시 등장해서 ‘해일’의 입장에서 무스탕을 떠나보내는 모습을 다시 보여주기도 한다.

 

어쩌면 매우 ‘무겁다’ 할 수 있는 주제의 이야기를 다루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억지로 웃음을 유발하는 이상한 연출도 없어서 좋았다. 담백한 연출과 함께 적당히 ‘극’적인 장치들이 불편함 없이 이 극을 이해하는데 좋은 흐름을 만들어 주었다.




그들의 결핍



저마다의 아픔과 결핍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엄밀히 말하면 주인공은 ‘해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모든 인물의 관계는 느슨하고 병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해일은 ‘투렛증후군’을 앓고 있다.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하고, 아버지는 언제나 바쁘고, 엄마는 말도 없이 해일을 두고 떠나갔다. 그런 해일은 공원에서 ‘무스탕’을 만나게 되고 교감하기 시작한다. 선영과 영수 부부도 해일에 손 내밀었다. 해일의 그림 실력을 처음으로 알아보고 인정해주었다. ‘투렛증후군’이 있는 해일의 증상이 아들 ‘별’이에게 영향을 미칠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선영은 해일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2. 그 개_영수 선영 별이 무스탕 해일(별이의 생일파티).jpg
 


불행한 상황 속에서도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해일이 ‘무스탕을’을 만났듯, 3만원이 오른 건강보험료를 낼 형편이 되지 않는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선영과 영수 부부에게는 ‘별이’가 있었다. 물음표를 수없이 풀어내야 느낌표를 하나 얻어낼 수 있는 삶이었지만 별이는 언제나 선영이 불행한 상황 속에서도 좋은 면을 들여다보게 했고, 좋아하는 도서관을 별이와 함께 가고자 하는 ‘꿈’도 갖게 했다.


이 연극에서 ‘기성세대’, ‘부유한 계층’으로 상징되는 사람이 ‘장강’이다. 자신의 제약회사를 열심히 키워 온 사람이지만 가족들은 모두 그를 떠났다. 외국에 있는 자식에게 전화를 걸어도 반응은 차갑기만 하고, 손자에게 전화를 걸어도 일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만 쏟아내는 ‘소통’이 단절된 관계이다. 자신을 인터뷰하는 수필 작가와의 대화에서 소통의 불화가 더욱 잘 드러난다.



4. 그 개_보쓰와 장강.jpg

 


장강은 타인들과 잘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이면서 제멋대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왜곡하고 행동하는 악하고 어리석은 인물이다. 그런 그의 옆에는 반려견 ‘보쓰’가 있다. 보쓰와 장강은 단순히 사랑하는 주인과 반려견의 관계는 아니다. 장강은 보쓰에게 헌신적인 듯 보이나, ‘보쓰’가 사고를 치면 손을 올려 때리려고 시늉하기도 하고, 언제나 보쓰를 복종하게 만든다. 곁에 아무도 남지 않은 장강에 보스는 특별한 존재임과 동시에 언제나 자신의 둘 수 있도록 ‘지켜야’하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리고 불행



희망의 빛이 드리우는 듯했으나 결국 비극이 찾아왔다. 바로 ‘별이’의 죽음이다. 이 장면을 보면서 연극이 달려가는 방향이 나의 예상과는 매우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별이의 죽음은 그 자체로도, 남겨진 사람들에게도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


해일은 결국 무스탕을 잃는다. 무스탕을 보내고, 다시 세상과 단절하는 ‘검은’ 마스크를 쓴다. 해일의 세상이었던 웹툰 ‘어비스 러브’ 속 핀핀이도 결국 또또를 만나지 못한다. 아이를 잃은 선영 영수 부부의 아픔은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모르는 불행의 원인이 끊임없이 선영을 따라다닌다. 그녀는 더는 ‘해일’을 이해했던 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별이, 왜, 나는, 별이, 왜, 나는.”을 계속 되뇌는 선영의 모습에 눈물이 났다.



8. 그 개_영수와 선영.jpg
 


불행의 시작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별이를 물었던 무스탕 때문인가? 별이를 맡기고 떠난 영수의 잘못인가? 괜히 드론을 날린 해일이의 책임일까? 이들은 잘못했지만, 또 잘못하지 않았다. 불행의 원인은 그저 우연일 뿐이다. 무스탕을 잃고 다시 자신의 투렛증후군을 가리기 위해 검은 마스크를 쓴 해일과, 죄책감과 아픔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영수 선영 부부. 하지만 장강의 곁에는 보쓰가 있다. 장강은, 보쓰를 지켜낼 수 있었다.


모두에게나 불행은 일어날 수 있고 그 책임이 때로는 누구의 책임도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불행 속에서도 얼마든지 자신의 것을 지켜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서는 ‘돈’과 ‘권력’ 정도가 그런 힘을 갖고 있다. 결핍을 가진 인물들이 모두 자신의 불행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만, 장강은 책임지지 않는다. 슬프지만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다.


 




11. 그 개_ 해일(마지막 장면).jpg
 


이 연극은, 흔히 하는 표현이지만, 끝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우리가 함께 잘 살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너무 쉽게 말해온 것이 아닌가 돌아보게 되었다는 작가의 고민이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해진다. 이 연극은 그런 방법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냥 우리가 사는, 힘든 상황에서도 찾아왔던 희망이 다시 자취를 감추고, 원인도 없이 찾아온 불행에 있는 힘껏 불행해 하는 ‘우리’를 보인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떻게 해야 행복한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다.
 


[조연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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