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극장 산울림의 『이방인』 감상 포인트 3가지 [공연]

글 입력 2018.09.10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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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홍대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한적한 어느 곳에 극장 산울림이 있다. 큼직한 건물이지만 오랜 시간이 쌓여 여기저기 낡은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시작 15분 전, 입장하면서 한번 둘러 본 내부는 소극장 치고는 규모가 있었다. 혜화에서 하는 로맨스 극장의 1.5배 정도로 짐작되었다. 무대 한 가운데에는 길쭉한 탁자가 홀로 놓여있었다. 파란 빛을 내뿜는 그것은 어딘가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곧 있을 공연의 내용을 암시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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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산울림에서 올린 연극 이방인의 감상 포인트는 크게 무대, 연기, 삶과 죽음이다.



1. 무대

무대는 성인이 한 바퀴 도는데 10초 밖에 안 걸릴 정도로 작은 편이었다. 게다가 뮤지컬처럼 공연장 뒤에 무대그림이나 장치 등이 없어서 공간 변화가 많은 ‘이방인’을 어떻게 보여줄지 알 수 없었다. 요양원, 해변, 극장, 건물 바깥, 집, 재판장, 감옥 등 예정된 장소들이 이렇게 다양한데 무슨 방법으로 관객을 설득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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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조명의 변화

첫 번째 답은 조명이었다. 파란색, 하얀색, 주황색, 노란색의 4가지 조명이 상황에 맞추어 자유자재로 분위기를 만들고 상황을 바꿨다. 같은 조명이어도 무대 근거리에서 비출 때와 원거리에서 비출 때 연출되는 분위기가 달라져서 자꾸만 그 변화에 눈길이 갔다.

연인 마리를 만날 때는 부드러운 분위기로 하얀색과 노란색, 주황색이 주로 쓰였다. 어머니의 관과 마주했을 때는 극의 초반부터 이어진 서늘한 푸른 조명이 깔리고 하얀 빛이 뫼르소를 비추고 있었다. 친구 레이몽을 만날 때는 알제리의 태양을 보듯 밝은 색이 주위를 감싸며 평범한 느낌을 연출했다. 극이 절정으로 향해가며 검사를 만날 때는 날카로운 흰색 조명이 무대를 외로운 섬으로 만들었다. 감옥에 혼자 남게 된 뫼르소에게는 가장 고독한 푸른 조명만이 그를 맞이했다.


02 테이블 하나 – 원형 2단 의자

자잘한 무대 소품을 제외하고 오로지 긴 테이블 하나, 무대를 감싸는 타원의 2단 원형 철제의자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 부족함이 자유로운 무대를 만들었다. 테이블은 관이 되기도 했고 의자가 되기도 하며 중앙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철제의자는 마법의 소품처럼 모든 공간 변화에 자유자재로 대응했다.

조명이 관객에게 최면을 걸고 소품들은 그것에 상상을 덧붙였다. 사람들이 걷는 산책로에서 대화가 이루어지고 극장에서 영화가 상영되고 재판장에서 날카로운 말들이 오갔다. 관객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극이 의도하는 대로 몰입해갔다. 소극장이었기 때문에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가장 잘 어울리는 방식이었다.



2. 정극다운 연기

연극 ‘이방인’의 연기는 가볍게 접했던 다른 연극들에 비해 무거웠다. 각각의 배우들 모두 자신의 배역을 묵직하게 소화했다. 캐릭터의 성격이 진중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특징이 뚜렷한 배역들을 제 것처럼 보여주었다는 말이다. ‘통통 튀는’ 같은 수식어가 어울리는 연기를 많이 보다가 오랜만에 이런 연기를 접해서 신선했다.

주인공 뫼르소를 연기한 전박찬 배우의 연기가 특히 흡입력 있었다. 가장 대사가 많기 때문에 실수하기 쉬웠음에도 극이 끝날 때까지 ‘뫼르소’를 보여주었다. 아직도 재판장 가운데 앉아 관객석을 응시하던 그의 시선이 기억난다. 그 무감한 얼굴로 느릿하게 한 바퀴 시선을 돌리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뫼르소는 극 초반과 후반에 아주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모든 것에, 심지어 결혼하자라는 마리의 말에조차 무덤덤하던 그가 감옥에 갇혀 죽을 날을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을 때, 신부가 찾아와 그를 위로하고자 할 때 일그러졌다. 외롭고 두렵고 분노하는 그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처음보다 보기 좋았다. 죽음이 다가오며 생기를 되찾아가는 그가 눈물 흘리는 것을 보며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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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삶과 죽음

어머니의 죽음으로 시작된 인생의 일부는 자신의 죽음으로 마무리되었다. 뫼르소라는 한 인간의 생은 부조리하고 무의미한 다수의 시간과 강렬하게 빛났던 한 순간으로 나눠졌다.

그것이 삶일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행복을 찾고 싶어 한다. 삶의 의미를 알고 싶고 태어난 이유가 궁금하다. 그런데 삶의 대부분의 시간은 사실, 그렇게 극적이지 않다. 영화처럼 첩보전이 일어나지도 않고 사운드가 펑펑 터지지도 않는다. 잔잔하게 흘러가는 삶을 살다보면 모든 것이 의미 없이 느껴지는 때가 온다. 마치 뫼르소가 그랬듯이 말이다.

그것이 삶일까?

분명 삶은 지루한 순간이 더 많다. 그리고 언제나 갑작스럽다. 총소리가 울리고 사형 선고를 받는가 하면, 병에 걸릴 수도 있고 집안이 망할 수도 있다. 연인과 헤어질 수도 있고 성적이나 실적이 뚝 떨어질 수도 있다. 차라리 납득할 수 있는 거대한 원인이 있었으면 하지만 그런 거창한 이유나 원인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발버둥 쳐야만 한다. 어떤 고귀한 이유나 종교적 신념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끝은 존재하므로 안심하고, 계속 괴로워하면서도 삶에 저항하고 삶을 사랑해야만 한다. 나는 뫼르소처럼 죽음을 목전에 두고 환희에 차고 싶지 않다. 한 번뿐인 지금을 살아갈 것이다.





원작을 읽지 않아 여전히 남는 의문이 하나 있다.

“왜 뫼르소는 최초의 한 발 이후 멈추지 않았을까?”

수많은 생각이 들지만, 답은 모르겠다.


[배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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