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믿음의 '흉내', 좁아지는 '광장' 영화 < 더 스퀘어 >

글 입력 2018.09.09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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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마주치면 조마조마했다. 어릴 적 지하철역을 내려가는 계단에 자주 보이는 노숙자를 보면 어릴 적 온갖 고민을 했다. 그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과 꼭 도와야 하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돕는다는 건 맞는 생각인건지, 돈을 준다면 얼마를 주어야할지, 계속 주면 그들은 행복해질 수 있는것인지, 돕지 않으면 그들은 또 어떻게 살 것인지. 그 고민은 별 것이 아닌 양 사람들이 길을 자연스레 지나갔다. 나 역시 그 대열에 합류했다. 처음엔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지하철을 타고 나서도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서 깨달았다. 나도 어느새 그들을 지나치는 것이 별 것 아닌 게 되었다는 걸.

영화 <더 스퀘어>는 그렇게 시작한다. 분주한 출근길, 바쁜 발걸음의사람들 사이로 생명을 구하지 않겠냐며 외치는 사람과 고개를 젓거나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뒤에 앉아있는 노숙자. 너무나 익숙하지만 묘하게 이상하다. 노숙자들을 '구해야 할 생명'에 해당되지 않는것인가? 그리고 생명을 구하자는 말에 고개를 젓고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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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영화제가 극찬한 블랙코미디 <더 스퀘어>. 블랙코미디가 촌철살인 같은 말로 비꼬거나 느와르 영화처럼 스멀거리는 기분을 선사해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영화는 수수께끼에 가까웠다. 심지어 보고 나서 이건 대체 뭘까 싶을 정도로 벙 찐 느낌표가 가득했다. 보통 때처럼 어둠 속에서 이야기를 따라가고 웃을 때 웃고 울 때 우는 영화는 아니었다. 생각하고 조각을 맞추고, 의미를 찾아가야 하는 능동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상관없어 보이는 사건들이 어떤 의미로 나오는 건지 상상해보는 데 재미가 있는 영화. 물론 이마저도 선택이다. 이리저리 흩어져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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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 찐 마음을 가라앉히다 보면 몇 가지 나름의 해석을 하게 된다. 제목이자 영화 속 미술관에서 런칭하고자 하는 전시 '더 스퀘어'. 그 작은 네모귀퉁이는 위대한 선언적인 의미가 있다. '더 스퀘어는 신뢰와 배려의 성역이다. 이 곳에서 우리는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더 스퀘어>라는 작품은 몇 번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는 소재다. 제목이 되려면 더 큰 의미가 있다는 것. The square은 실제로 여러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선 네모가 아니라 다른 의미인 광장이 더 적합하다. 관련된 표현으로 정직하게 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더 스퀘어>는 우리가 모여 사는 이 사회, 광장과 서로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기 하기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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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밖에선 작은 네모 모양 아래에 저런 인권적 가치를 논하는 문구가 적혀져 있지만 미술관 내 전시는 다르다. 전시의 시작은 사람을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 선택하는 것이니까.  어느 쪽을 선택하는 그 길목에는 처음 했던 선택을 고민하거나 위기에 빠뜨리는 상황이 놓여져있을 것이다. 믿는다고 선택한 이들에겐 그렇다면 여기에 소중한 핸드폰과 지갑을 두고 가라고 했고, 더 나아갈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당신은 사람을 믿는다고 했다. 사람을 믿는다면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왜 고민을 하지? 혹시 사람을 못 믿는건가? 거짓말을 한 건가?' 라고 쳐다보는 눈초리처럼 말이다.

유명한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그림과 비슷하다. 파이프이지만 파이프가 아니라고 쓰여진 것처럼, '신뢰와 배려의 성역'이라고 하지만 신뢰도 배려도 없고, 성역도 아니다. 게다가 우리는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지도 않다. 그런 그림찾기가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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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크리스티앙의 잃어버린 물건 찾기 사건. '더 스퀘어' 전시를 총괄하는 수석 큐레이터 크리스티앙. 출근길에 여자를 위협하는 남자로부터 그녀를 지켰다고 뿌듯해했다. 알고 보니 소매치기 수법이었던 모양. 아주 적극적으로 나선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잘 했는데. 대가는 참혹하게도 지갑과 휴대폰, 할아버지께 물려받은 커프스 단추 3종 세트의 실종이다. 아침부터 그는 인간에 대한 신뢰지수가 내려갔다.

위치추적으로 휴대폰이 있는 곳을 알아내고나서 그는 부하직원과 의기투합해서 익명의 편지를 대량으로 꽂아넣기로 한다. 편지에 문구쓸 때는 마블의 히어로 저리가라더니 막상 편지를 넣으력 보니 꼬리 내린 강아지마냥 서로 너가 하라며 양보를 하고 있다. 크리스티앙은 알량한 자존심에 못하겠다고는 못하고 그 편지를 쑤셔넣어놓고는 부하직원이 일적으로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추궁한다. 할 말 없을 땐 약한 갑질이 답이려나. 신기하게도 그 '협박 편지'가 통했다. 그는 잃어버린 것들을 돌려받는다. 물론 커프스 단추는 그의 착각이었지만 적어도 지갑과 휴대폰은 왔다. 게다가 아무 것도 도둑맞지 않고 모든 게 그래로다! 편지를 좀 순하게 써도 될 뻔 했다. 혹은 문을 두드리고 물어봐도 괜찮았다. 어쩌면 그는 찾아주려고 한 착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는데 크리스티앙은 그를 '도둑' 취급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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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 편지로 도둑으로 몰려 외출금지라면서 끊임없이 화를 내는 소년이 찾아온다는 것이다.(외출금지라면서 어떻게 외출을 해서 화를 내는지도 모르겠다) 크리스티앙도 전화 한번 해서 사정이 이러저러해서 오해를 샀다고 한 마디만 해주면 될 걸 질질 끌어서 기어이 사단을 낸다. 그의 집까지 올라오려는 아이를 계단에서 밀쳐버리고 만다. 도와달라는 아이의 소리가 계속 그의 귀에만 들리는지 중간중간 집 밖을 나서보는데 막상 아이는 없는 모양이다. 죄책감이 만들어낸 소리일 수도 있다. 비가 퍼붓는 그제서야 쓰레기더미에서 연락처를 찾아 사과 동영상을 찍기 시작한다. 진솔하게 미안하다고 하다가 뒤로 갈수록 그럴듯한 사회구조적 문제로 합리화를 한다. 실소가 터져나온다. 말이나 못하면, 이 양반.

시스템이 문제고, 문제라 비판하는 건 쉽다. 하지만 그가 아이의 말을 믿지 못하고 다치게 하고 너무나 늦게 도운 것마저 '사회구조적'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애처롭다. 미안하다 한 마디면 될 일이 엄청 커졌다. 크리스티앙의 아이들까지 아빠를 의심하기 시작했으니까. 소리를 들었다. 우리 아빠가 애를 다치게 했어. 그 애는 어떻게 됐을까? 하는 걱정과 의심 말이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믿을 수 있을까? 뒤늦게 다같이 집에도 찾아가보지만 아무도 그 아이를 이후에 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아이의 집까지 올라가는 계단은 정말 어지러웠다. 화면이 말 그대로 빙빙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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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더 스퀘어 전시 홍보영상 사건(크리스티앙 사퇴 사건).  크리스티앙이 지갑과 핸드폰 찾느라 일에 소홀한 사이 사단이 났다. 자고로 홍보라면 SNS를 공략하여 15초 내외로 엄청난 이슈가 될 만한 홍보 영상을 만들자 한 것이 대박이 났다. 대박이 나긴 했는데 엄청난 논란 거리다. 믿음과 배려를 홍보해야할 판에 노이즈 마케팅을 해버렸다. 스웨덴을 대표하는 '금발'머리에 아기 거지가 더 스퀘어에 들어가자 폭발해버리는 영상인 것이다. 금발이 국적을 대표한다는 건 무슨 근거없는 소리며, 가장 약한 계층 중 하나인 거지를 이용해서 자극적인 영상을 만들다니. 처음 컨셉을 얘기했을 때 미술관 모두가 썩은 사과를 베어문 것 같은 표정이었는데 크리스티앙이 듣지도 않고 진행하라고 한 결과물이다.
 
크리스티앙은 결국 책임을 지고 자리를 사퇴하기로 한 것인데 언론의 반응도 참 애매하다. 표현의 자유를 멋대로 규정하는 것이냐면서 또다른 비난이 쏟아진다. 그러더니 전시 정보를 알게 되자 기자들은 비난을 멈추고 기삿거리를 적느라 바쁘다. 어이는 없지만 홍보업체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욕은 먹었지만 유투브 조회수도 높았고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전시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니까.
 
새삼 옛날 했던 생각이 났다. 왜 뉴스는 불행한 일들을 주로 다룰까. 화나고 슬프고 잔인하게. 어느 날 설명을 들었다. 자극적일수록 인상깊어하고 사람들이 열광한다고 말이다. 그래서인가. 살아있는 사람이 사망했다는 기사까지 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언론과 사람들, 이들의 특성을 알고 이용하는 이들. 언론은 믿을 수 있을까? 믿는다면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우리는 '만들어진 불행의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을까? 정보는 통제되지 않고 공개되어있는걸까? 질문을 던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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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크리스티앙의 원나잇 사건. 절대 엮이지 말자고 다짐한게 몇 초전인 것 같은데 기자인 앤의 집 침대에 와 있다. 둘이 아주 만족스러운 밤을 보냈는지는 모르겠다. 여러모로 찜찜하다. 크리스티앙은 콘돔을 알아서 버리겠다고 하고, 앤은 당장 버려달라고 서로 고집을 부린다. 몸을 섞을 만큼은 믿지만 그 시간이 끝나자마자 서로를 믿지 못해서 그러고 있다. 앤은 다음 날 찾아와서 자신의 이름이 뭔지, 지금 그의 행동이 약한 여성을 권력으로 이용하는 행동은 아닌지 따지기 시작한다. 합의 하에 이뤄진 원나잇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무서워서 누굴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꼭 원나잇이 아니더라도 누굴 만나면서 제대로 알고 안도하면서 뭐든지 나누기가 쉽지 않아졌다. 사람을 때리고, 상대를 배신하고, 배신한 이의 과거사를 유포하는 일이 성행한다. 사람을 사랑하고 믿는 것이 어려워진다. 전화 한 번 빌려달라는 것도, 차비를 빌려달라는 것도, 잠시 짐 좀 봐달라는 부탁조차도 모르는 이에게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가 동물을 믿는 것일까. 강아지와 고양이와, 다른 반려동물은 적어도 우리를 해치거나 배신하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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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처럼 신문을 읽는 오랑우탄(혹은 침팬지), 오랑우탄처럼 연기하다 과도하게 몰입하여 사람을 공격하는 사람. 그런 뒤집어진 세상이 현실에도 있다. 높은 이의 말은 귀담아 듣지만 만만한 사람의 말은 잠시 귀담아 들을까 말까 한다. 믿음보다는 믿음의 흉내에 가깝다. 아예 믿을 수도 없고 아예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세상은 점점 커진다는데 우리가 서 있을 광장은 점점 좁고 작아진다. '광장'이란 단어는 역설적으로 쓰이기 위해 태어난걸까. 영화 <더 스퀘어(The Square)>를 보면 어지럽다. 혼란스럽다. 모순이 가득하다. 그럼에도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고, 우리의 광장이다. 메세지는 마침표를 물음표로 바꿀 때 비로소 와닿게 된다.

'더 스퀘어는 신뢰와 배려의 성역인가? 우리는 이 곳에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가?'

영화는 초반에 이미 답을 해주었다.

'You have nothing.'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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