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10개의 손가락이 만드는 마법

프레디 켐프 피아노 리사이틀
글 입력 2018.07.29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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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의 손가락이 만드는 마법
-Freddy Kempf Etudes from 3 composers-


프레디캠프_포스터.jpg 


아주 오랜만에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보게 되었다. 사실 집에서 오기가 힘들어 이렇게 좋은 기회가 아니면 예술의 전당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아트인사이트 첫 초대라 잔뜩 설레서 표를 찾고 자리에 앉았다.


 
시작 전


공연장 의자에 앉아서 무대를 바라보았다. 넓은 무대 위에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홀로 놓여 있었다. 예술의전당에서는 항상 오페라나 교향곡같이 규모가 큰 공연들만 보다가 피아노 한 대와 연주자 한 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과 호흡하는 독주회를 보게 되어 신기했다.

한 대의 피아노, 한 명의 연주자.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 보는 사이, 안내 방송이 있고 불이 꺼진 후 프레디 켐프가 무대 위로 등장했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피아노 앞에 가 앉는 그를 보며 그의 연주는 강단 있고 단단할 것이라고 예상해 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90분의 시간은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중앙에서 살짝 옆쪽 자리라 그의 손가락이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그의 연주는 계속되었다. 피아노 건반과 10개의 손가락이 이렇게 힘 있으면서 동시에 섬세할 줄 몰랐다.
 

작곡가 손짤.PNG


우스갯소리로 돌아다니는 작곡가별 피아노 곡 느낌을 나타낸 사진이다. 음악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대강 ‘오 그럴싸하다’라는 생각은 해 보았지만 정확히 어떤 느낌인지는 몰랐는데, 연주를 보고 듣고 나서 이 사진이 주는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다.
 

14.jpg
 

N. Kapustin 카푸스틴 
8 Concert Etudes for Piano Op. 40
8개의 연주회용 연습곡 작품번호 40

Ⅰ. Prelude
Ⅱ. Intermezzo
Ⅲ. Finale

 
카푸스틴의 에튀드는 에튀드를 듣는 것 같지 않게 유려했다. 손이 아니라 발만 볼 수 있는 자리였지만 그의 발이 리듬을 타고 페달을 누르는 것을 보면서 충분히 그의 손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리사이틀의 오프닝으로 손색없는 선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가볍지만 동시에 진중하게, 음 하나하나에 충실하게, 작곡가가 의도했던 리듬을 살리면서도 연주자만의 느낌을 잘 살려서 관객을 음악 속으로 끌어당겼다. 분명히 음들이 빠른 속도로 연달아 지나가는데도 뭉개지거나 없어지는 소리 없이 귀에 또렷하게 박혔다.

흔히 ‘에튀드’ 하면 생각나는 전형적인 음악에서 벗어나 재즈의 느낌이 가미되어 자리에 앉아있던 ‘관객 1’인 나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크고 강했다가도 순식간에 부드럽고 섬세해지는 연주가 마음에 들었다. 고개를 끄덕거리고 손가락을 까딱이면서 박자를 맞추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얌전히 앉아 귀를 열어두느라 힘들 정도였다.

 

F. Chopin 쇼팽
Etudes Op. 10
연습곡 작품번호 10

제 1번 C장조
제 2번 a단조
제 3번 E장조
제 4번 c샤프 단조
제 5번 G플랫 장조
제 6번 e플랫 단조
제 7번 C장조
제 8번 F장조
제 9번 f단조
제 10번 A플랫 장조
제 11번 E플랫 장조
제 12번 c단조


휘몰아치듯 카푸스틴의 에튀드가 끝나고, 다음 타자는 쇼팽이었다. 제일 기대를 많이 하고 갔던 만큼 제일 집중해서 들었다. 거센 물결이 건반을 위아래로 타고 흐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매끄러운 연주였다. 난이도가 높기로 악명 높은 No. 1은 정말 손색없이 음계를 오르내려서 넋을 놓고 들었는데, 프레디 켐프는 연주가 끝나고 바로 No.2 로 넘어가지 않고 한참 손을 털면서 풀어주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쇼팽 에튀드가 괜히 쇼팽 에튀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그 곡을 완벽하게 마무리한 연주자에게 경외심이 생겼다.

빠르고 강한 에튀드들도 물론 좋았지만, No. 3이나 No. 6처럼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느낌을 가진 곡들이 훨씬 내게 와닿았다. 기술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여 악보를 구현하는 것은 대다수의 실력 있는 피아니스트들이 대부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프레디 켐프는 단순히 악보를 그대로 옮기는 것에서 더 나아가 마치 의자에 앉아 관객에게 이야기를 하듯 곡을 풀어내었다. 그래서 크고 강렬한 곡들보다는 오히려 평소 관심을 많이 두지 않았던 여리고 슬픈 느낌의 곡들에 더 마음이 갔다. 마지막 No. 12 혁명까지 완주했을 때 거대한 서사시 한 편을 읽은 것처럼 내가 괜히 뿌듯하고 만족스러웠다. 쏟아져내리는 음들을 들으면서 나는 거의 반쯤 입을 벌린 상태였던 것 같다.

 

S. Rachmaninov 라흐마니노프
Etudes-Tableaux Op. 39
회화적 연습곡 작품번호 39

제 1번 c단조
제 2번 a단조
제 3번 f샤프 단조
제 4번 b단조
제 5번 e플랫 단조
제 6번 a단조 
제 7번 c단조
제 8번 d단조
제 9번 D장조

 
잠시의 인터미션을 가지고 마지막으로 라흐마니노프의 에튀드 연주가 시작되었다. 내게는 쇼팽보다 덜 친숙한 작곡가라 그런지 좀 더 집중해서 듣게 되었고, 라흐마니노프의 에튀드 연주를 현장에서 직접 들은 것이 7월의 가장 큰 음악적 수확이 되었다. 그가 쇼팽의 에튀드를 연주할 때 아주 매끄럽고 섬세한 선을 그리는 느낌이었다면, 켐프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의 에튀드는 커다란 붓을 가지고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풍성하고 색달랐다.

왜 ‘회화적’ 에튀드라고 불리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빠르게 손을 움직이는 와중에도 주선율이 되는 음들을 콕콕 집어 선명하게 연주하는 것을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 덕에 풍부하고 화려한 색채 속에서도 라흐마니노프와 프레디 켐프가 관객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잘 들을 수 있었다. 조금만 속도를 내면 음들이 뭉개지고 주선율이라고는 하나도 들리지 않는 나의 피아노 연주와는 비교가 불가능할 만큼 훌륭했다. 슬프다고 생각했다가도 밝고 화려하고, 명랑하다고 생각했다가도 어딘가 애잔하고 서글픈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 모순적이지만 다채로운 감정이 담긴 연주를 들으면서, 쇼팽 이후 에튀드가 단순히 연습곡 이상의 장르가 되었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KakaoTalk_20180729_180316504.jpg


 
앙코르!


앙코르를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앙코르는 한마디로 센스가 넘쳤다.
쇼팽의 왈츠와 폴로네즈, 그리고 베토벤의 비창까지!

쇼팽의 에튀드를 연주하는 동안에 ‘이 사람은 과연 인간인가’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확하고 기술적으로 정교한 타건을 보여주었다면, 왈츠와 폴로네즈에서는 음악적 표현에 조금 더 비중을 둔 느낌이었다. 관객에게도 익숙하고, 연주자도 좀 더 편안해 보여서 더 즐거운 앙코르였다. 프레디 켐프가 연주하는 비창은 아주 힘이 넘쳤다. 리사이틀의 마무리로 더할 나위 없는 선곡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의 베토벤을 더 들어보고 싶게 만들었다.


 
연주회가 끝나고


은연중에 ‘독주회는 너무 심심하지 않을까? 피아노 한 대뿐이잖아‘라고 생각했던 나의 과거를 치열하게 반성했다. 프레디 켐프가 가진 10개의 손가락은 90분이라는 시간을 5분처럼 지나가게 만들었다. 연주자가 가진 힘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고, 다음에는 연주자의 손이 잘 보이는 곳에 앉아 손을 보며 연주를 듣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더운 여름, 프레디 켐프가 연주하는 에튀드와 함께 보낼 수 있었던 완벽한 주말이었다.



 
에디터 태그.jpg
 

[박예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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