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알폰소 쿠아론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영화]

지금, 현실의 이야기
글 입력 2018.07.14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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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를 가득 채운 사람들. 커피는 사지 않고 모두 뉴스 속보에 주목하고 있다. 표정은 하나같이 심각하다. 강아지를 쓰다 듬는 할머니, 턱을 괴고 화면을 바라보는 아주머니, 머리가 다 벗겨진 할아버지, 순찰을 돌다 들어온 경찰관까지 시선은 전부 티비 화면을 향하고 있다. 그만큼 중요한 뉴스인가 보다. 귀 기울여 본다.

"인류 최연소자 디에고 리카르도가 오늘 사망했습니다. 부에노스 외곽의 술집에서 칼에 찔린 채로 발견된 그는,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사인을 해달라는 팬에게 침을 뱉어 싸움에 휘말렸다고 합니다. 그의 나이는 18세 4개월로..."

차분한 앵커의 목소리 사이로 여자의 흐느낌이 섞여 들린다. 카페의 사람들 중 한 남자만이 뉴스에 무심한 듯하다. 블랙커피 한 잔을 들고 유유히 걸어 나간다. 그 남자가 카페를 나간 지 1분이나 지났을까. 폭탄이 터진다. 거리는 한 순간에 비명소리로 가득해진다.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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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D. 제임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그래비티>로 유명한 알폰소 쿠아론이 감독을 맡은 이 영화의 시공간적 배경은 2027년 영국이다. 위 뉴스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는 종족 번식의 기능을 상실했다. 인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수한 죽음뿐이다. 종의 멸망을 눈앞에 둔 사람들. 희망이 사라진 그들에게 정부와 국가는 의미가 없다. 폭력과 무정부주의가 만연하고 대부분의 국가는 무정부 국가로 전락한다. 유일하게 영국만이 군대를 이용해 정부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푸지'라고 불리는 넘쳐나는 난민들로부터 영국 국민들을 지키고자 정부는 이민 봉쇄령을 8년째 유지하며 난민들을 철저히 배척한다.

유일하게 뉴스에 무심했던 그 남자. 테오도르 파론(클라이브 오웬 역)은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이민자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는 단체 피쉬단에 납치 당한다. 그 곳에서 옛 연인이자 피쉬단의 리더인 줄리엔(줄리안 무어 역)을 만나고 그에게서 한 이민자 소녀 '키' 를 탈출시켜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놀랍게도 '키'는 임신을 한 상태였다. 18년간 단 한 명의 신생아도 없던 절망의 세계를 살아온 테오. 전 인류의 희망을 목격한 테오는 막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키'와 그녀의 아이를 구출하는 '인간 프로젝트'에 가담한다.

이후의 이야기를 간단히 말하자면 '테오'와 '키'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영국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가까스로 바다에 나간 그들을 향해 인간 프로젝트의 '미래 호'가 다가오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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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영화를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은 암흑의 시대에 더욱 부각되는 생명의 존엄성과 같은 섣부른 희망이 아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테오가 아이를 구하기 위해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으로 서슴없이 뛰어드는, 무려 12분간의 롱 테이크 신과 같은 압도적인 촬영 기법에 관한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영화를 단순히 영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것은 흔한 SF 디스토피아 영화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세계의 이야기'였다.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피쉬단과 영국군의 무력 마찰은 계속된다. 폭탄테러가 벌어지고 시가지에서의 총격전도 빈번하다. 현실은 다른가? 무대를 영국이 아니라 세계로 바꿨보면 IRA(영국령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공화국의 통일을 요구하는 군사조직), IS 등의 테러 단체들의 테러는 끊이지 않는다.

그것 뿐인가. 영화 속의 영국이 펼치는 이민자 정책은 또 어떤가. 가차없는 강제 추방으로도 모자라서, 부모와 아이들을 떨어뜨려 놓는 미국 트럼프 정부의 '무관용' 이민 정책과 무엇이 다른가. 가자 지구를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으로 만든 이스라엘의 봉쇄 정책은 또 어떤가. 길이 113Km, 높이 8m의 장벽으로 육로를 봉쇄하고, 삼엄한 해군의 경비로 물길 또한 막아 놓았다. 영화를 통해 이런 사실에 눈을 뜨게 된 나는 이 영화를 단순한 상상력의 산물로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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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심각한 문제는 갈수록 반이민 민족주의, 자국 우선, 우월주의의 기치를 들고 나서는 극우 정당이 정권을 잡는 국가가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6월 서유럽 최초의 극우 포퓰리즘 정권이 출범한 이탈리아. 유럽 연합의 난민 할당제에 반대하고 외국인정책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3선에 성공한 헝가리 등. 세계 여러 국가들이 자국만을 위한 울타리를 높게 치고 있다.

문학평론가 황현산 선생은 그의 저서 <밤이 선생이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앞의 보자기만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 두터운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 못하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에도 벅찬 삶이 아닌가. 그렇기에 서로 일깨워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내 주변의 친밀한 세계와 알지 못했던 사회라는 커다란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가 말이다. 문학작품이 될 수도 있고 영화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칠드런 오브 맨>을 보면서 잊고 있었던 난민 문제, 빈번한 폭력 테러 등의 문제를 나의 현실로 가져올 수 있었다. 영화를 보셨던 분들이라면 다시 한 번, 아직 보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꼭 보시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내 주변, 내 나라만을 챙기는 얇은 현실 속에서 안위하기 보다는 보다 두터운 세상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 우리는 모두 부모님의 자식이기 전에, 한 나라의 국민이기 전에 '인류'의 자손들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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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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