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세상 사이의 ‘우주’를 건너-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도서]

글 입력 2018.05.31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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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해 전의 일이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이른 아침부터 오후까지 이어지는 몇 개의 수업을 꾸역꾸역, 잘 넘어가지 않는 밥을 삼키듯이 듣고 난 후였다. 계절은 꼭 지금처럼 초여름의 옷을 입고 있었고 해가 지자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늘상 그러하듯이 버스에 올라타 휴대폰에 이어폰을 꾹 꽂아 넣고, 들으면 좋을 만한 노래 몇 곡을 골라 플레이리스트에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는 막히기 시작했고, 나는 멍하니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버스는 종로의 한 가운데를 힘겹게 헤쳐 나가는 중이었다.

 덕분에 나에게는 평소 스쳐 지나가기에 바빴던 창 밖 모습들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자, 곧 공허함에 집중하던 내 머릿속은 문득 수많은 생각들로 가득 채워졌다. '모두들 꼭 나처럼 어디론가 향하는 길이겠구나.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스쳐 지나가면서 말이다. 나도 저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고 있고. 그렇다면 '스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닿는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서로 닿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걸까?'

 계속 이런 식으로 집으로 향하는 내내 꼬리를 물었던 이 생각들의 끝에서 다행히도 나는 ‘모든 것들은 서로 닿아 있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고 곧 생각을 그칠 수 있었다. 집 앞 가로등 밑, 내 발과 바로 맞닿아 떨어지지 않는 그림자를 발견한 순간의 일이었다.

 그 때로부터 몇 해가 지난 몇 주 전, 잠시 짬을 내어 방문한 서점에서 무심코 집어 든 책이 있다. 그리고 며칠 후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게 되었을 때, 어렴풋이 몇 해 전의 그 저녁 즈음이 떠올랐다. 그 때의 내가 했던 모든 생각들이 결국 이 ‘세계’에 대한 고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jpg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스물 하고도 몇 해를 조금 더 얹어가며 살아오면서 겪어 온 내면의 고통 중 거의 대부분의 것은 타인, 그리고 ‘관계’에 대한 고민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은 시작점부터 그 ‘관계’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다. 그리고 말한다. 타인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때때로 두렵고 무서운 것이지만 결국 모든 관계는 내 안에서 별을 이루게 되고, 타인을 통해 내가 가진 자아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이 책은 타인을 말하고, 세계에 대해서 말하고, 관계와 언어와 대해 말하고, 이윽고 더 나아가 자아와 존재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맺는다.

 어쩌면 우리는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고 만 이상, 한 사람의 존재도 예외없이 세상이라는 이름의 ‘관계’들 속으로 내던져진 것인지도 모른다. 오롯이 고독한 채 살아갈 수 있는 존재는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참 이상하게도 그 ‘관계’란 것이 버거운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모두에게나 살면서 한 번 쯤 모든 관계의 고리들을 끊어버리고 혼자만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가버리고 싶은 때가 온다. 사실 그런 때가 올 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자책해보기도 했고 혹은 나를 둘러싼 그 관계들을 원망하기도 했었다. 왜 이렇게 힘들까. 이 관계는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는 걸까. 나의 잘못인 것은 아닐까?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내게는 그 고독의 순간을 버텨낼 힘이 도무지 생겨나지 않았다. 이 책의 페이지를 넘기던 날도 그런 날들 중의 하나였는데, 읽던 도중 우연히 만난 이 문장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러므로 만남이란 놀라운 사건이다. 너와 나의 만남은 단순히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넘어선다. 그것은 차라리 세계와 세계의 충돌에 가깝다. 너를 안는다는 것은 나의 둥근 원 안으로 너의 원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감내하는 것이며, 너의 세계의 파도가 내 세계의 해안을 잠식하는 것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 거다. 폭풍 같은 시간을 함께하고 결국은 다시 혼자가 된 사람의 눈동자가 더 깊어진 까닭은. 이제 그의 세계는 휩쓸고 지나간 다른 세계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더 풍요로워지며, 그렇기에 더욱 아름다워진다."


 이 부분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으면서 나는 내가 아직 이 세계에서 가장 어리숙한 사람 중 한 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살아오면서 언젠가 타인과 한없이 가까워 진 적도 있었고, 손쓸 수도 없이 멀어진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누군가와 멀어지는 것에 두려워하고, 그 모든 것의 원인을 때로는 나를 탓하며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나를 때때로 갉아먹고 있었다. 아직도 완벽하게 나와 소통하지 못하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 불과한 ‘나’였다.


“인생이 생각보다 살아가기 어려운 것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테다. 혼자 살아가는 것이었다면 나의 계획과 전망과 실행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갔겠지만, 실제 세상에는 나의 세계 전체를 뒤흔드는 타인이 있어 언제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만다. 그것을 간신히, 간신히, 수습해가면 결국 나의 삶은 누더기가 되어 있을 것이다.”


 몇 해 전 저녁 즈음의 일로 돌아가 본다. 무심코 내다 본 창 밖의 풍경을 통해 했던 그 생각들을 그 날의 일로 끝내지 말았어야 했다. 이 세상의 모든 나와, 당신과, 세계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닿아 있는’ 풍경들을 보며 참 아름다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고 되뇌었던 그 때의 내 생각은 이렇게 발전했어야 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흐르므로, 나의 탓이 아니고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냥 어느 시의 구절이 내게 말했던 것처럼 ‘그냥 흐르게 두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서, 유난히 맑은 오늘의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해볼까 한다. 내 방의 넓은 창문 밖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가진 각각의 우주들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본다. 나는 오늘도 기꺼이 저 수많은 우주들의 집합 속으로 나를 내던져볼까 한다. 그리고 분명히 어제보다 오늘 더, 그리고 오늘보다는 내일 더 나를 사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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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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