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문보영의 세계에서 우리는 모두 시인이 된다. [도서]

문보영 시집 '책기둥'을 읽고
글 입력 2018.05.28 00:2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AKR20171228068700005_03_i.jpg

 
문보영 시인

1992년 제주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2016년 중앙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2017년 「책기둥」으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당황스럽다.
이 시집을 처음 펼쳤을 때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언어의 세계가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분명히 한국어로 쓰인 책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인의 언어가 낯설었다. 이 시집 속에는 내가 알던 것들이 내가 알던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다.

갑자기 낯선 세계로 뚝 떨어진 기분이었다. 나는 문보영 시인의 세계에서 외국인이었다. 책 속의 그들이 건네는 말을 더듬으며 살펴봐도 여전히 낯설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건네는 말을 나의 언어로 번역하기로 했다.
내가 즐거우면 그만이다, 라는 태평한 생각으로.


거리 한복판이다 사랑하는 사람 S에게서 몹쓸 소리를 들은 Z의 두 귀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지나가던 개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Z의 두 귀를 주워 먹었다 Z의 두 귀는 Z보다 먼저 죽어 천국에 도착했다 동시에 귀의 몸은 배 속에 남았으므로 Z는 개의 배에서 나는 소리를 평생 들어야 했다

(중략)

2. 망원경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분리된 귀는
눈을 감았다 떠 보려 시도한다 그러자
앞이 보인다
낡은 방의 구석
천사들이 생선 더미마냥
쌓여 있다 그들은 얼굴을
TV처럼 틀어 놓고 자고 있다
어디선가
신이 나타나 그들의 얼굴을 꺼 준다
(중략)
나는 약간 죽은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누구든
어느 정도의 보이는 상처가 있어야 했다

지나가는 개가 먹은 두 귀가 본 것 中 /문보영


상처받은 귀가 뚝 떨어져 개에게 먹힌다. 귀가 눈을 감았다 뜨자 천국이다. 귀가 도착한 천국은 내가 알던 천국의 모습이 아니다. 천사들이 아름다운 날개를 펼쳐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지 않는다. 그들은 낡은 방구석에서 생선 더미마냥 쌓여 얼굴을 TV처럼 틀어 놓고 잠을 잔다. (심지어 그 모습을 ‘귀’가 ‘보고’ 있다.)

마치 앨리스가 되어 이상한 나라로 들어온 것 같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이 너무 낯선 나머지 재미있다.

천국에 가보지 않은 자들은 천국을 상상할 권리가 있다. 내가 들어왔던 천국과 시인의 천국 사이에 놓인 틈 속에서 나는 새로운 천국의 모습을 그려본다. 그곳에 있는 신도 천사의 얼굴을 조용히 꺼 주든, 아니면 이불이라도 덮어주든 제 몫을 다 하고 있을까.


원숭이 엉덩이는 달린다
기차는 빨갛다
나무는 달리고
냉장고는 섰다
창문이
맨 위 칸에 썩은 햄을 보관한다
동화책은 자꾸 지나가서
셔터, 어른들을 위한
비는 끌어내린다
집은 못한다
겁쟁이는 문을 닫았다
삶이 너무해
무릎은 집이 아니야
지렁이는 편다
간이 없는 문장이 간이
있는 문장을 안고 싶어 한다
비는 맛이 갔어
나무가 주룩주룩 내린다
자는 정확히 말할 수 없고
불행은 잰다
창문은 억누를 수가 없네
스탬프가 자꾸 지나가서
빨간 원숭이

빨간 시냇물 아래 얼굴을 내비치는 빨간 조약돌들의 잔잔한 웃음이

빨간시냇물원숭이 (전문) /문보영


이 시를 읽으면서 어린 시절 레고를 조립하며 놀던 추억이 생각났다. 엄마아빠가 학교나 아이스크림 가게 만들기 설명서가 들어있는 레고 세트를 사 오시면, 나와 동생은 레고 조각으로 강아지를 만들고 성벽을 쌓았다. 사람 얼굴이 달린 강아지와 아이스크림 가게 색깔의 성벽이었다.

시인은 마치 레고를 조립하듯 익숙한 문장을 조각내어 다른 문장에 이어붙인다. 그러면 이제껏 본 적 없는 새로운 문장이 짠 하고 나타난다. 달리는 나무와 우뚝 선 냉장고, 간이 없는 문장, 주룩주룩 내리는 나무, 란 대체 무엇일까? 나는 또 나의 세계와 시인의 세계 사이에서 새로운 풍경을 해석한다.



문보영의 세계에서 우리는 모두 시인이 된다.


문보영 시인의 「책기둥」은 한 문장 한 문장이 독특하고 낯설어서 그 사이에 틈이 있는 것만 같다. 나는 그곳으로 들어가 나의 언어로 틈을 메꾼다.

문보영의 시가 재미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구의 언어로 틈을 메꾸는가에 따라 다른 세계가 그려진다. 사실 오늘의 나는 문보영 시인의의 시와 결이 맞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 더 다듬어진 혹은 조금 더 거칠거칠해진 내일의 나는 문보영의 시가 너무나 좋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문보영 시인의 시는 재미있고, 그 세계에서 우리는 모두 시인이 되므로.






네임택.jpg
 

[김규리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