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슬픔 끝에도, 사랑 [공연]

모든 게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글 입력 2018.05.03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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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세요!”
“33살 차이라니 와우!”
 

몇 살이냐 묻는 조지의 물음에 대답하는 알렉스의 목소리는 힘차고 맑았다. 나는 한순간 그의 목소리에서 5살짜리 아이를 보았다. 마치 몇 살이냐는 어른의 물음에 답하는 5살짜리 꼬마인 마냥 알렉스의 목소리는 당당했고 꾸밈없었다, 75세가 뭐 대수냐는 듯.
 
조지는 "와우!"라고 아주 크게 놀라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 놀람이 조지와 알렉스 관계에 끼친 영향은 크지 않았다.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원체 조지도 알렉스와 마찬가지로 꾸밈 없는 태도로 접근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마음이 오가고 있는 상대의 나이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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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손가락이 좋아요
“(당신의) 향기가 좋아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가고, 쉴 틈 없이 할 말을 쏟아내는 조지의 가장 큰 매력은 스스럼없이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 비록 대화 간간이 욕설이 섞이긴 하지만 재차 “당신을 향해 하는 말은 아니”라고 강조하기도 하는 걸 보면 다소 괴팍하지만 본성이 모난 사람은 아니다. 차라리 욕설 속 툭툭 튀어나오는 그녀의 고백은 귀엽기까지 하다.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조지와 달리 조용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알렉스는 딱히 조지를 적극적으로 붙잡지도, 밀어내지도 않는다. 대신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조금씩 마음을 연다. 그래서 초반엔 조지가 대화의 주도권을 쥐는 듯 했지만 후반으로 넘어갈수록 점점 알렉스의 말문이 트인다. “느끼지 않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지가 수다스럽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만 같던 알렉스의 마음은 좀 더 신중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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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몇 번의 크리스마스가
남아있다고 생각해요?”

 
하룻밤을 같이 하고 난 후 조지가 먹을 것을 찾으러 주방으로 간 사이 알렉스는 침대에 엎드려 슬프게 운다. 그렇게 울며 들썩이는 그의 등을 보니 어쩐지 마음이 한 켠이 저몄다. 이전에 조지의 쉴 틈 없는 대사로 꽉 차 있던 무대였지면, 조지가 사라지면서 생긴 텅 빈 공간을 대신 알렉스의 울음으로 가득 차게 만든 연극 구성은 극적이었다. 그래서도 그의 슬픔은 더욱 아프게 느껴졌다.

75세의 노인이 느끼는 슬픔이 어떤 건지 나는 모른다. 가족을 다 잃고, 매일같이 꿈에 나오는 누나를 만나며 긴 세월을 '살아남은' 그에게 '남은' 세상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나는 가늠할 수 없다. 어쩌면 가족을 잃고 살아오며 축적된 아픔이 겨우 만난 듯 했던 연인과의 사랑을 지속할 수 없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후에 다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대신 조용히, 묵묵히 살아온 듯 하다. 그런 그의 삶이 어땠을지 나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런데 알렉스는 결국 사랑을 선택한다. 사실 '선택'이라고 말하기엔 그의 행위가 그다지 주체적인 것 같진 않아 보인다. 처음부터 알렉스에게 말을 걸고, 그의 일터에 찾아간 조지가 아니었더라면 그는 사랑을 선택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곁을 잠시 떠나간 조지에게 돈을 주고, 조지의 아들을 찾으러 같이 떠나는 알렉스의 선택은 주체적이고, 적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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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에는 몇 번의 크리스마스가 남아있을까? 아무도 모른다. 많이 남아 있을거라 자신하는 자에게 그리 많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이미 다 끝났다고 슬퍼하는 자에게 천금같은 한 번의 크리스마스가 찾아 올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인가? 사랑, 사랑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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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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