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생존을 위해 연기하다, 연극 '전화벨이 울린다'

글 입력 2018.04.04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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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우렁찬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상담원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000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고객님, 불편을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금방 처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문의사항은 없으십니까?”, “불편을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정확한 확인을 위해 몇 가지 좀 여쭙겠습니다. 가입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 메시지들은 우리가 콜센터에 전화할 때마다 자주 듣는 말이다. 고객들의 편의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존재하는 콜센터. 사실 고객의 입장에서만 있던 나로서는 콜센터 안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근무해보지 않고서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여기 '전화벨이 울린다' 공연을 통해 콜센터가 얼마나 극한 직업에 속하는지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여, 감정노동자들의 애환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보는 내내 진상고객과 회사의 입장만 생각하는 상사 때문에 분노에 가득찼고, 매일 웃는 연기 연습을 통해 감춰진 자신을 보며 좋아하는 수진역에 눈물을 펑펑 쏟았던 연극이었다.

항상 상담원들은 고객들에게 사랑한다는 말과 죄송한 자세로 임한다. 하루에 정해진 콜 달성률을 채워야 하는 것은 기본이며, 상사들의 눈치를 보는 것은 예삿일이다. 또, 콜에 응대하는 말투나 업무들을 체크하여 감점시킨 후 인센티브를 깎는데다 월급엔 고객들이 하는 욕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극한직업에 속한다. 이것 뿐이랴, 심지어 쪽지시험까지 치룬다. 게다가 콜 응대하느라 바빠 끼니조차 제대로 챙겨먹기 힘든 상담원들. 이러한 일상 속에서도 매일 '신속, 정확, 친절'이라는 구호에 맞춰 기계적인 하루를 시작한다.

2012년 8월에 방영된 스펀지 프로그램에서 나인뮤지스 은지가 다산콜센터에서 일일 상담원으로 체험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일일 상담원으로 근무하던 나인뮤지스 은지는 메뉴얼대로 친절한 말투와 상냥한 표정으로 고객을 대했다. 그러나 고객에게 돌아오는 말은 해결할 수 없는 질문과 무분별한 욕설들이었다. 어느 고객은 "남자는 군대를 왜 가야 되는 거냐"라는 말을, 또 어느 고객은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는 거냐"라고 호통치며 "상담할 자격이나 되냐, 가서 생각 좀 하고 나오라는 말"을 내뱉었다. 결국 나인뮤지스 은지는 눈물을 흘리며, 업무를 중단했다. '만약에 전화를 하신 분들이 얼굴이 보이는 상태라면 이 정도까진 안 했을 것'이라는 말에 깊게 공감했다.

영상을 보기 전만 하더라도 상담원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사실 체감하진 못했다. 그러나 영상을 보면서 되려 내가 화가 날 정도였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언어폭력을 가하고, 심지어 성희롱하는 진상고객들을 보며 마치 나의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저런 행위로 시간을 낭비할 수 있을까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분노를 엄한 곳에 갑질하는 행위들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한 뭔가 불만만 제기되면 "당장 팀장 불러와!"라는 말로, 힘 없는 상담원들에게 겁을 주는 모습이 굉장히 잔인했다.

항상 처진 표정과 말투로 상사에게 가장 많은 지적을 받았던 수진. 어느 날, 고시원 옆방에 사는 배우 지망생에게 연기를 가르쳐달라고 한다. 그리고 하루하루 연기 연습을 통해 드디어 자신의 감정을 감추게 된다. 살기 위해, 살아나가기 위해 연기라는 가면을 쓰고 일상을 마주하는 수진이. 고시원 옆방에 사는 배우 지망생에게 매일매일 얼굴없는 괴물이 나를 괴롭히는 것 같다며 토로한다. 어쩌면 우리의 치열하고도 처절한 모습을 잘 투영한 듯했다. 자신의 감정은 억제하고, 남을 위해 살아가는 감정노동자의 삶은 그렇게 처절했다. 가장 웃는 연기를 잘했던 동료는 참다 참다 못해 고객에게 욕을 해버렸고, 회사는 도와주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죽음을 택했다. 극단적이면서도 가장 와닿는 사회문제였다. 이처럼 감정노동자들의 삶을 가까이 대면함으로써 나 또한 그들에게 괴물로 다가가지는 않았는지, 또 우리 모두 가면을 쓴 채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건지. 다각도로 물음을 던져보는 최고의 연극이었다.

가장 인상 깊게 봤던 장면은 배우들이 등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상사가 상담원들에게 구호를 외치라고 하는 부분이나 콜 달성률을 높이라고 지적하는 부분, 또 배우지망생인 배우가 관객석 뒤로 지나가는 부분에서 관객을 완전히 등지고 있어서 생소했다. 예전에 학과 내에서 연극을 올릴 때, 교수님께서 강조했던 부분이 관객을 절대로 등지면 안된다는 부분이었다. 배우는 항상 관객들에게 표정과 말투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관객을 등질 경우, 관객들에게 대사가 전달되지 않을 수 있으며 극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있어 어려움이 있을 거라는 가르침이 있었다. 그러나 이 공연같은 경우는 관객과 마주보지 않음을 시도함으로써, 목소리로만 주는 공포감이 존재했다. 다소 신선하게 다가왔다. 뒤에서 비쳐지는 행위와 목소리만으로도 관객들에게 '두려움'을 자극시킬 수 있구나라고 깨달았다.



시놉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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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개새끼…
아침부터 왜 소리 지르고 지랄이야…
아! mute를 안 눌렀다!”


콜센터 직원인 수진은 전화 상담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악몽에 시달린다. 감정노동을 하는 그녀는 최근 들어 자주 감정 조절에 실패한다. 이에 대한 회사의 계속된 지적에 힘들어하던 수진은, 고시원 옆방에 사는 연극배우 민규에게 연기를 배운다. 민규와의 연기 수업을 통해 수진은 자신감을 찾고, 가면 쓰는 법에 익숙해져간다. 그런데 이때 회사에 뜻밖의 구조조정 소식이 들려오는데…….



작품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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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화기 너머, 감정노동자의 현실을 비추다
 
2016년 서울연극센터 유망예술지원 NEWstage 선정작으로 공연되었던 연극 <전화벨이 울린다>가 다시 무대에 오른다. 이 연극을 쓰고 연출한 이연주 연출은 현실을 살아내는 가운데 잊혀지는 자신에 대한 질문과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생존을 위해 살아가면서 그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계층, 계급, 관계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어쩌면 그 속에서 모두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눈을 감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내 얼굴을 보았을 때 다른 얼굴의 ‘나’를 발견했을 때,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진실 앞에 눈은 애써 감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제 우리에게 눈을 감는 행위는 더 이상 애쓰는 행위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존의 문제 앞에서 얼굴이 달라지는 것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살아내기 위해 너무 많은 일들을 목격하고도 지나치고 있다. 그럼에도 잠시나마 드는 순간의 고민이 우리를 다시 인간답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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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노동과 연기, 완전히 다른 듯한 두 가지 일의 교차점을 찾다
 
“매일 거울로 내 얼굴을 보면서도, 눈을 감고, 목소리만 남았어요. 누구 목소린지도 모르는 소리만.”

<전화벨이 울린다>는 콜센터의 감정노동자의 일상을 통해 현대의 생존과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의 현실 속에 생존만큼 아니, 생존을 넘어서는 문제가 있을까? 그럼에도 인간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에게 실존적 질문이 절실하다. 우리의 삶을 위해서도, 주변의 죽음을 위해서도. 극 중 배우의 연기수업을 통해 던져지는 오이디푸스의 질문은 지금의 현실에 접목시키기에 너무나 운명론적 질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실존적인 질문에 <전화벨이 울린다>는 실존적인 접근을 위해 다시금 원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오래된 질문이 답답한 현실을 버티게 하는 또 다른 출발일 수도 있다. 또한 섬세하게 쌓인 관계 속에서 현실의 날카로운 면을 포착해냄과 동시에 우리의 민낯을 마주한다.
 
2017년 초연 당시 받았던 호평에 힘입어, 이번에는 두산아트센터와 함께 이전보다 더욱 입체적이고 완성도 높은 무대를 선보인다. 지난 공연에 출연했던 배우 신사랑, 이선주, 최지연, 서미영, 이지혜가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추고, 새롭게 박성연, 우범진, 이세영 배우가 합류하여 새롭게 콜센터 직원들의 삶을 보여 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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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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