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참을 수 없는 허세의 가벼움 : 뮤지컬 < 홀연했던 사나이 >

뮤지컬 < 홀연했던 사나이 > Review
글 입력 2018.03.01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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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 관념 캐릭터 비틀기

관념 캐릭터는 신비로운 장치이며, 많은 뮤지컬은 이것으로 관객들을 곤경에 빠뜨렸다. 관념 캐릭터는 특정한 관념을 육체화한 캐릭터다. 허무주의가 될 수도 있고, 살의가 될 수도 있고, 죽음이 될 수도 있고, 글을 향한 욕망이 될 수도 있다. 뮤지컬 <사의 찬미>의 사내(해석의 다양성이 있지만), <아가사>의 로이, <엘리자벳>의 토드, <팬레터>의 히카루 등을 떠올려보시라. 이들은 서사엔 동력을 선사하고, 관객에겐 즐거움을 선사하는, 잊기 힘든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닌가. 대다수의 관념 캐릭터는 극의 재미를 보장함과 동시에, 주제의식으로 나아가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다. 그래서 국내 뮤지컬에선 관념 캐릭터를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으며, 거의 매번 그들은 극의 관람 포인트로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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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홀연했던 사나이>는 관념 캐릭터를 재미있게 비튼다. 샛별다방에 등장하는 이 사나이는 분명 관념 캐릭터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관념 캐릭터의 속성을 읊으며 자신을 수식하고, 그의 등장은 늘상 보던 관념 캐릭터의 모호함과 신비로움으로 치장된다.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한참 밖이 소란스러워지면, 한 사나이가 다방에 들어온다. 그 모습은 신비로워 보이지만, 교사 태일은 (사나이의) “솔로곡이 시작되는 것 같으니 조용히 해다오!”라며 비틀기의 밑밥을 깐다. 분위기는 다른 의미로 심상치 않다. 사나이는 제 입으로 ‘그가 다방에 들어온다'라 말하며 등장하는데, ‘빈티지 풍의 매니쉬함, 버건디 컬러 자켓에, 시크한 코발트블루 빛 셔츠 사이로 예민한 털 몇 가닥 빠져나온’  그의 모습은(그걸 제 입으로 말하는 것 역시) 역으로 코믹하다. 잔뜩 멋이 들어간 움직임과 긴 솔로 넘버에 샛별다방 사람들은 “이럴 수가! 이제 겨우 한 계단 내려왔어!”, “주인공이니까 몇 소절 더 하겠죠, 뭐”라며, 황당함과 왠지 모를 경외감을 내비친다. 사나이는 잔뜩 멋이 든 몸짓으로 허세를 부리지만, 그의 언어엔 찌질함이 그득그득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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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시즌 간, <사의 찬미>의 사내로 분했던 배우 정민은 이 비틀기에 적격이다. 같은 사내지만 달라도 너무 다르다. 멋짐과 모호함과 미스터리로 중무장했던 정민은, <홀연했던 사나이>에서 그 모든 걸 역으로 뒤집는다. 멋짐에선 찌질함을, 모호함에선 허술함을, 미스터리에선 사기꾼 기질을 보여주며, 그는 능수능란한 코믹 연기로 작품에 홀연히 안착한다. <사의 찬미>의 사내로 정민을 만났던 관객이라면, 그가 제대로 비트는 사나이에게도, 매력을, 정확히 말하자면 자존심 상하는 매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


   
허세로 꽉 찬 슬랩스틱 뮤지컬

사나이의 등장과 동시에 극의 분위기는 슬랩스틱 코미디로 돌변한다. 사나이는 다방에서 무위도식하기 위해, 샛별다방 사람들을 영화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겠다 선언하고, 소시민적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사람들은 점점 그에게 빠져들기 시작한다.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는 승돌은 사람들을 막으려 노력하지만, 사나이가 불어 넣어주는 환상은 달콤한 아편이 되어, 맥을 못 추게 만든다. 이때, 서사를 채우는 건 눈물 빼는 일상의 고통이 아니고, 사기꾼의 치졸함도 아니다. 허세로 가득 찬 사나이처럼, 서사 역시 허세로 꽉 찬 슬랩스틱 코미디로 채워진다. 웃음은 올드하다. 사나이가 ‘헤이 미스터 탐!’이라 말하면, 태일이 ‘탐이니?’라 부연 설명하는 식의 소위 ‘유우머’다. 센스 있다 말하긴 어렵지만, 피식거릴 수 있는 정도? 무엇보다 말도 안 되는 B급 유머는 배우들을 통해 생명력을 얻는다. 배우들의 표현은 말이 안 되는 걸, 말이 되는 것 같이 재창조하는 수준이다. 이 역시, 자존심 상하지만, 웃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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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정돈되지 않아 어수선하고, 단순한 수준이라 유치하다. 이때, 넘버는 <홀연했던 사나이>의 혼란한 맥을 다잡는 유일한 끈이다. 초반부 넘버는 작품의 장르와 넘버의 장르를 의도적으로 다르게 구성하고 있다. 음악 감독 다미로가 밝혔듯, 넘버는 웅장하고 규모 있는 소위 '대극장스러운' 선율에 기반을 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에 담긴 가사는 허세와 말도 안 되는 설정들로 채워져 있다. 주인공이 신을 찾으며 고통을 부르짖는 것 같은 선율엔, 라면과 김치와 식후땡을 요구하는 사나이의 뻔뻔함이 담기는 식이다. 여기에 학교 종소리, 탱고, 운동권의 선율이 적절히 섞이고, 'We are the one'이 흘러나오는 등, B급 코드는 많이 들어본 멜로디를 타고 촌스럽지 않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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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넘버는 극작의 가벼움마저 커버하며, 작품의 드라마를 강렬하게 담으려 노력한다. 넘버가 나오는 씬은 일단 지루하지 않고, 작품 후반부로 갈수록 극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재미와 주제, 모두를 잡아내기 위한 노력은 넘버가 거진 다 하는 셈이다. 그러나 넘버의 '하드캐리'에도 불구하고, 전개는 그 발치를 따라가지 못한다. 이끌 서사에 개연성이 없으니, 넘버의 에너지도 금방 소진되고 만다.



희극이 되지 못한 유머

결국, 꿈을 주던 사나이는 떠난다. 그에게 매달렸던 샛별다방 사람들은 현실로 복귀해야 했다. 그러나 할리우드에 가지 못하는 꽃님도, 절뚝거리며 배달 일을 해야 하는 만태도, 힘든 상황 속에서도 시대의 가치를 지키려는 태일도, 승돌을 홀로 키우며 다방을 운영할 미희도, 환상이 아닌 현실에서 씩씩하게 살아가고자 한다. 그리고 사나이는 승돌에게 어설픈 가르침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승돌은 '수족관의 금붕어가 바다를 바라보듯, 현실은 변하지 않을 테지만, 꿈꿔야 한다', '금붕어는 바다를 기억해야 한다'는 사나이의 가르침을 따르고, 작품은 마무리 된다.

초반부는 슬랩스틱 코미디로, 후반부는 묵직한 감동과 메시지로. <홀연했던 사나이>는 희극을 표방하고자 했다. 김태형 연출이 밝혔듯, “희극은 단순히 웃기고 유머를 주는 게 아니라, 현실 세계를 단순화해서 현실에 대한 비판, 냉소 등 구조적 문제를 웃음으로 가볍게 보여주며, 현실의 문제를 드러내는 장르다.” <홀연했던 사나이>는 꿈을 꾸기 힘들었던, 그리고 여전히 힘든, 소시민적 현실을 유머 속에 담고자 했을 것이다. '금붕어처럼 순식간에 까먹는다 해도, 사나이처럼 홀연히 사라진다 해도, 꿈을 꾸어야 한다.' 이 같은 작품의 메시지는 초반에 깔아둔 B급 코드와 후반부 드라마를 타고 드라마틱하게 전달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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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희극은 희극이 되지 못하고, 유머는 그저 유머로 남는다. 유머는 마냥 웃겼고, 작품은 혼란한 심사만을 남겼을 뿐이다. 주인공 승돌에겐 극작이 큰 공을 들이지 않았으니, 작품의 큰 맥인 승돌의 변화가 제대로 전달될 리 없다. 그렇다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인 사나이라도 살아남아야 했을 텐데, 사나이는 중반 이후부터 전개를 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위치한다. 사기를 칠 땐, 그렇게 익살스럽던 캐릭터가 중후반부부턴 홀연한 감정 전개에 이리저리 휩쓸린다. 거기에 어설픈 교훈만 남기고 사라지는 엔딩으로 사나이는 홀연히도 촌스러워진다. 매력적이던 사나이가 그저 코믹했던 어중이떠중이로 남아 진한 아쉬움을 남긴다. 

또한, 극의 구도만 따져보면, 사나이가 대표하는 예술가는 꿈을 일깨우는 존재, 샛별다방 사람들이 대표하는 대중은 꿈을 깨닫는 존재가 아니던가. 제 욕심으로 꿈을 선사하고는 맘대로 뺐고, 등쳐먹을 다른 다방을 찾아 떠나던 그를 어항 속 금붕어라 포장하다니. 사나이에게선 언뜻 예술가의 자의식 과잉이 느껴진다. 꿈을 선사한다는 명목으로 일상의 것들을 착취했던 사나이와 끝까지 화해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그에게서 수많은 현실 인물이 겹쳐 보였다면, 오히려 냉소적으로 현실을 바라본 건 관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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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담 남은 건 코믹뿐. ‘허세에 1%의 실속이 있다면 기세가 된단다!’. 자기변호를 위한 대사인진 모르겠으나, 허세에 1%의 메시지를 담는다고 기세가 되는 건 아니니, 희극은 희극이 되지 못하고, 유머는 그저 유머로 남았듯, 허세도 그저 허세로 남을 뿐이다. 한때 유행했던 개그 프로의 구호가 떠오른다. 그 문장을 조금 비틀어 볼까. "허세는 허세일 뿐, 포장하지 말자!"



공연정보





INTRODUCTION


공         연
뮤지컬 ‘홀연했던 사나이’


일         시
2018년 2월 6일 ~ 4월 15일


장         소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공 연 시 간
평일(화~금) 오후 8시
토요일 오후 3시, 7시
공휴일 및 일요일 오후 2시, 6시


런 닝 타 임
110분(인터미션 없음)


관 람 연 령
만 7세 이상 (미취학 아동 관람 불가)


등급 및 가격
R석 60,000원 / S석 40,000원



CREATIVE STAFFS
 

스        텝
프로듀서 안현석 | 책임 프로듀서 정경진
연출 김태형 | 작곡, 음악감독 다미로 |
안무 이현정 | 무대디자인 김미경
조명디자인 이주원 | 음향디자인 김성익 |
분장디자인 정서진 | 소품디자인 권민희
무대감독 전정화


출        연
정민, 박민성, 오종혁, 유승현
박정원, 강영석, 임진아, 임강희
박정표, 윤석원, 백은혜
하현지, 장민수, 김현진


제작, 주최   ㈜두번째생각


기획, 홍보   컴퍼니 연작






프레스 명함 업로드.jpg


[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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