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al Top 1 - Elisabeat.

뮤지컬에 다가가기. 그리고 나만의 뮤지컬 택하기.
글 입력 2018.02.19 19:14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Musical Top1 – Elisabeat.
 

13.jpg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 쓴 정말 아끼는 책이 있다. 지인인 이동섭 작가의 '뮤지컬 토크 2.0' 이란 책이다. 이 책은 줄거리만 나열하는 인상주의적 감상을 적은 흔한 책이 아니다. 자신의 주관과 경험을 바탕으로 뮤지컬을 감상하고 작품의 해석과 해설을 적어놓았다. 그리고 독자에게도 그런 방법으로 뮤지컬을 즐길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이다. 작품을 대하는 새로운 시선을 선물한 책이라 매우 좋아하고 유독 좋아하는 부분도 많은 책이다.
 
 "Musical Big4는 물론 훌륭한 작품이다. 그러나 그 이름에만 속아서 자신이 좋았던 작품을 Big4보다 아래에 둘 필요는 없다. 특정 작품이 좋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고, 그 작품을 통해 예술과 하나가 되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작품이 당신에겐 Musical Top1이 될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고 좋아하는 구절이다. 이 구절을 본 후로부터 줄곧 내게 있어 Big4는 어떤 작품일지 한참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주머니 사정을 생각지도 않은 채 공연장을 수없이 찾아갔다. 영상과 영화를 쉬지 않고 찾아 새로운 작품들을 탐닉했다. 봤던 작품도 다시 볼 기회가 있다면 마다하지 않고 다니길 약 1년, 한 30편 정도의 뮤지컬을 봤다. 하지만 완벽 그 자체를 자랑하는 메킨토시의 Big4를 꺾는 작품은 쉽게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던 2012년 2월, 드디어 엘리자벳을 만났다. 감상하는 내내, 그리고 감상한 직후에도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최고라고 생각하는 작품을 찾은 것이다.
 
 

1. 엘리자벳
 
 엘리자벳은 세계적인 거장 콤비인 극작가 미하엘쿤체와, 작곡가 실베스터르베이가 만든 작품이다. 국내 라이선스 무대에선 로버트요한슨이 연출을 맡았고, 3인의 어마어마한 힘을 유감없이 과시하듯 대중에게도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도 대흥행을 이룬 뮤지컬이다.
 
 뮤지컬의 스토리는 이렇다. 자유로운 가풍을 최고의 자랑거리로 아는 막시밀리안 공작. 그리고 천하에 없는 한량인 아버지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은 천진하고 아름다운 씨씨는 자신 또한 아버지처럼 자유롭게 살기를 바란다. 그러던 어느 날 사촌이자 기울어가는 대제국 오스트리아의 어린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와 친언니인 헬레네의 약혼 상견례에 참가하게 되고 그곳에서 씨씨와 요제프는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정략결혼이 당연시되던 당시의 풍토를 완전히 깨뜨리고 프란츠 요제프는 씨씨와 결혼을 한다. 행복할 줄만 알았던 결혼 생활. 그러나 자유롭게만 자란 씨씨는 언제나 엄격한 시어머니 소피와 끝없이 대립한다. 저물어가는 제국의 궁전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 속에 '죽음'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을 의인화시킨 아주 매력적인 남성이 등장한다. 죽음은 너무도 아름다운 씨씨, 즉 엘리자벳에게 반해 그녀를 자신의 품에 안기 위해 끝없이 유혹하며 그녀의 주위를 맴돈다.
 

 
2. 완벽한 도면. 그리고 건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역사적인 배경을 두고 만든 작품에서 주인공이 당시 역사의 주체들의 주변인인 작품은 대체로 좋은 작품들이 많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변인은 '엘리자벳'의 엘리자벳이나, '황태자 루돌프'의 루돌프를 예로 들고 싶다. 황후와 황태자가 왜 주변인일까 의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확실히 주변인이다.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던 시어머니와 아버지. 역사의 주체인 절대자에게 좌지우지되고 자신의 이상은 항상 가로막히고 좌절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상을 가로막은 역사의 주체를 시대 정신적 측면에선 정반대 편에 서 있으면서, 물리적으로는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사람도 주변인인 그들이다. 즉, 사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작품에서 빠져서는 안 될 쌍방향적 역사관이나 시대관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는 말이다.
 국내 작품들의 경우, 작가들이 사고가 편협한 것인지 역사물 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작품들은 항상 주인공으로 명성황후나 안중근과 같은 인물을 내세운다. 마치 쉽게 가려고만 하는 것 같다. '영웅'의 경우만 봐도 스토리를 풀어나간 작가적 시각이 ‘편협’ 그 자체였다고 본다. 항상 주인공은 외부의 적과 대립하고, 자신 스스로와 싸우고 고뇌하는 구시대적 연극 갈등만 잔뜩 가져다 만든다. 오히려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면, 친일을 했던 의사의 아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아버지를 관찰하고 반목하는 모습을 내세웠다면 조금은 더 멋진 갈등구조를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오면 주변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스토리 구조는 관객으로 하여금 다양한 시각에서 작품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또한 주변인인 주인공이 라이벌인 주체와 다투는 모습 안에서 더욱 강한 갈등을 느끼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엘리자벳은 참 좋은 작품이었다.
 
 다음으로 말하고 싶은 극적 완성도를 높인 요소는 '해설자'의 적극적인 활용을 들고 싶다. 해설자는 '지킬 앤 하이드'에서 어터슨 같은 역할을 두고 하는 말인데, 이 작품에선 무정부주의자인 루케니가 그 역할을 맡고 있다. 주인공은 엘리자벳이지만 극을 이끌어가는 느낌을 주는 인물은 루케니였다. 그는 극의 적재적소에 등장하여 엘리자벳을 희화화시킨다. 그리고 그 장면마다 관객에게 시대적인 상황을 설명해준다. 즉, 무대 위 관찰자로서 무대 아래의 관객이 공연을 이해하는데 적극적인 도움을 주는 극적인 장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 속 루케니는 다른 작품의 해설자보다 비중이 더욱 커서, 극의 전개에 있어 중요한 인물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하고 있다. 버리는 캐릭터가 없다는 느낌도 주었고, 생소한 오스트리아 황후의 생애를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 준 극작 기술이었다. 
 
 지금까지 극작적인 측면에서 좋은 부분을 들었다면 이번엔 연출적인 요소를 들어 이 작품을 자랑해야겠다. 건축이라는 또 다른 장르의 어휘를 빌리자면 극작가가 쓴 희곡은 도면이고, 연출은 건설을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로버트요한슨은 쿤체의 완벽한 도면을 가장 잘 공사한 건설업자라고 말하고 싶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이 작품에는 죽음이라는 추상적인 존재를 의인화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그는 추상적 존재이기에 어떠한 장면에도 쉽게 등장할 수 있다. 반면, 등퇴장이 용이한 점은 극작을 할 때 매우 좋은 무기였지만, 막상 작품을 만들 때는 판타지적인 인물이기에 유치해 보이기 쉽기도 했다. 유치하고 촌스러운 건물이 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조명과 의상, 헤어 등을 이용하여 음산한 분위기를 잔뜩 풍긴 연출을 통해 죽음은 치명적인 섹시함을 가진 캐릭터가 되었고 극은 한 단계 더 성숙되었다. 또한 '죽음의 사도' 혹은 '죽음의 천사'라고 불리는 앙상블들의 몽환적인 안무가 죽음을 줄곧 따라다니며 무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 결과 자칫 유치할 수 있었던 도면은 가장 원숙한 건축물로 탈바꿈하였다.

 
 
3. 플레이리스트.
 
 쿤체와 로버트요한슨이 완벽한 극과 연출로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면, 르베이는 내게 1년 내내 플레이리스트에서 사라지지 않는 최고의 음악들을 선물했다. 음악적인 측면에서 라이선스 뮤지컬치고 나쁜 뮤지컬은 없을 거라 본다. 그렇다면 좋은 음악들이 넘쳐나는 라이선스 뮤지컬 넘버들 사이에서 다른 작품들의 넘버에 비해 이 작품의 넘버가 더 좋게 느껴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음악의 구조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구조라는 점이다. 가수의 음성이 나오지 않을 때 오케스트라의 연주만으로 곡의 분위기가 절정으로 흘러가는 형태의 곡을 좋아하는데 이 작품 속 중요한 넘버들이 대부분 이런 구조를 보인다. 곡의 구조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데, 숨소리 하나까지도 노래하고 연기하는 김선영이 노래를 하니 더욱 좋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김선영과 함께 국내 최고의 뮤지컬 배우라고 생각하는 류정한의 미친 실력은 작품 속 남성들이 씨씨의 미모에 반해 사랑에 빠진 것처럼, 나를 엘리자벳에 빠져들게 하였다.
 
 
4. 예술과 하나가 되는 일체감.
그 주체할 수 없는 즐거움과 감동, 그리고 먹먹함.
 
 작품 외적인 얘기를 잠깐만 하자. 혹시 영화 '친구'를 본 적이 있는가? 개봉 당시 50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큰 흥행을 한 영화이며, 곽경택 감독을 세상에 확실하게 각인시킨 작품이다. 그러나 친구의 흥행 이후 곽 감독은 친구의 망령에 헤어나지 못한다는 평을 받으며 드라마, 영화 속편, 연극까지 줄줄이 말아먹었다. 특히, 드라마는 억지로 20부작을 만들어 내용 전개에 필요 없는 스토리가 너무 많다는 등 온갖 악평을 다 들었다. 그런데 나는 영화에서 장동건 씨가 연기했고, 드라마에선 현빈 씨가 연기했던 한동수라는 캐릭터의 심리 묘사 때문에 드라마화된 '친구 - 우리들의 전설.' 이란 작품을 굉장히 좋아한다.
 극의 초반, 동수는 자신의 운명을 강하게 거부하듯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간다. 그러나 사랑을 차지하고 친구와의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 친구를 버리고 점점 어두워지고 외로워진다. 동수는 점점 자신을 옥죄이며 나락으로 떨어져 간다. 그렇게 괴로워질 때마다 동수는 미술관에 들러 거센 파도가 치는 기암 위에 홀로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소년의 뒷모습이 그려진 그림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림을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자신과 끝없이 대화한다. 그림은 단지 하나의 작품으로써 그림이 아니라 자신의 심리를 투영하는 거울인 셈이다. 이런 곽 감독 특유의 심리 묘사 때문에 나는 이 작품이 좋았다.
 그리고 내게 엘리자벳은 동수가 하염없이 보던 그림과 같다. 나는 엘리자벳 안에서 두 명의 소년을 만날 수 있었다.
 
 첫 번째 소년은 역시 엘리자벳이었다. 나는 야간자율학습이라는 이름의 강제교육을 하는 게 죽는 것보다 싫을 정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에 구속받는 것을 혐오한다. 항상 자유로움을 추구했고, 그런 성격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 성격의 내가 이 작품을 처음 만났을 때는 심리적으로 매우 위태로울 때였다. 22살, 군대를 앞두고 있었을 시기였다. 새로운 세계로 간다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친구를 만나면 '이제 군대 가면 어떡할래?'라는 조소 섞인 말을 듣는 게 싫어 친구들도 만나지 않았다. 하나 있는 아들 군대 간다고 노심초사하시는 부모님을 걱정시킬 수 없었고, 유일하게 속을 털어놓던 여자친구에게도 나의 혼란스러움을 말하지 못했다. 굉장히 외로울 때였고, 심리적으로도 움츠러들어 있었을 때였다. 그런 상태에 이 작품을 만났고, 음악으로 소소한 위로를 받던 중 입대를 했다.
 훈련, 잠을 적게 자는 것 등등 군 생활 중 힘들다는 것을 참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힘든 것은 따로 있었다. 갇혀 지내야 한다는 것과 오직 시키는 것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시시각각 내 목을 졸랐다. 그렇게 죽음과 점점 가까워지던 때, 나를 구해준 노래가 극 중 엘리자벳이 불렀던 '나는 나만의 것'이라는 노래였다. 노래를 잘하지 못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항상 흥얼거렸고 힘들 때면 종종 가사를 종이에 적곤 했다.
 계급이 점점 높아짐에 따라 전역이 다가오면서 나에게도 극 중 엘리자벳처럼 자유가 조금씩 찾아왔다. 그러나 자유를 찾더라도 행복해지진 않았다. 더 큰 세상에 관한 두려움이 씨씨가 자유를 찾고도 공허함을 느꼈던 것처럼 나를 괴롭혔다. 딱 이 지점까지가 엘리자벳이라는 인물에게 일체감을 느꼈던 지점이다. 씨씨는 결국 삶을 포기하고 행복해지는 것을 택했다. 그런 선택을 따를까 했던 적도 아주 가끔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렇게 작품 속 인물과 일체화하면서 느낄 수 있는 예술적 성취를 더 많이 느끼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뒤 하고 싶은 바가 생겨 열심히 사는 길을 택하면서, 엘리자벳과의 일체감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첫 번째 소년이 자유를 갈망하던 엘리자벳이었다면, 두 번째 소년은 이 글을 쓰는 현재까지도 감정이입하고 있는 씨씨의 아들인 루돌프이다. 작품 속 루돌프는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불쌍한 아이이자, 결국 자살을 하는 비극적인 캐릭터로 묘사된다.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나의 부모님은 하나 있는 자식을 잘 키워보고자 하셨고, 하여 맞벌이를 하셨다. 자식을 하나만 낳은 것도 나에게만 사랑을 주기 위해서 그러셨던 거로 알고 있다. 그런 맞벌이와 독점적 사랑이 내게 트라우마 아닌 트라우마를 준 사건으로 연결된 적이 있다.
 내가 6살 무렵, 고향인 포항에는 태풍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양의 비가 내렸던 적이 있었다.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직장에 발이 묶이셨고, 어린아이는 폭풍우 치는 넓고 어두운 집안에서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전기도 전화도 되지 않는 집 안에서 어둠에 두려워하면서 되지도 않는 전화를 부여잡고 힘을 다해 엉엉 울다 쓰러지고 깨길 반복하며 엄마를 찾았다. 이때의 충격 때문인지 아직도 난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극 중 루돌프도 나와 같은 모습을 보였다. 항상 혼자였고, 엄마의 품을 그리워했다. 어린 루돌프가 처음 죽음과 맞이하는 순간에는 ‘엄마 들려요. 어디 있어요. 너무 추워 안아주세요. 엄만 너무 멀리 있죠. 왜 날 혼자 두나요.’라는 가사의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루돌프가 자살하기 직전에도 궁을 떠난 엄마를 찾아가 ‘내가 어머니의 거울이면 좋겠어요. 날 바라볼 테니, 말을 걸어줄 테니까.’라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며 모정을 구애하지만 거절당하고 이내 자살한다. 어린 시절의 나도 루돌프처럼 엄마를 많이 그리워했다.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기에 항상 의연했지만, 방과 후에 집에 가면 간식을 해놓고 기다리는 엄마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리고 폭풍우 치던 그 날 죽음을 앞둔 루돌프처럼 절박하게 엄마를 찾았던 것 같다.
 지금은 어머니께서 먼저 다가와 스킨십해주시고, 말을 걸어주신다. 그러나 내가 어색해서, 그리고 따뜻하게 대해 드리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인지 무의식적으로 어머니를 약간 거절하고 있는 것 같다. 아직까지는 엄마의 사랑을 그리워해서 외로웠던 루돌프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지만, 나는 끝까지 불쌍했던 루돌프와는 달리 어머니께서 먼저 다가와 주셨으니,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그 결말은 뮤지컬과는 확실히 달라질 거로 생각한다.
 
 그와 그녀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나는 외롭고 힘들 때마다 정신세계 속에서 그들을 내 친구로 만들어 수없이 대화했다. 작품과 인물 덕분에 웃고 울었으며 어떨 때는 그 인물이 되어 작품을 더욱 가깝게 느끼는 예술적인 일체감을 느낄 수 있었다. 행복했고, 때론 씁쓸하기도 했으며, 가끔은 가슴 한 곳이 먹먹했다.

 
 
5. 또 다른 엘리자벳을 위하여.
  
 힘든 시기를 버틸 용기를 주었고, 작품과 하나가 되는 예술적 성취감을 느끼게 해준 작품. 항상 내 귀를 즐겁게 해주고 위로가 되는 ‘엘리자벳’ 과 같은 작품들이 또다시 나에게 찾아와 나만의 Musical Big4를 완벽하게 구성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본 기사의 메인 이미지는
EMK MUSICAL COMPANY 작품
Elisabeat 의 공식 이미지임을 밝힙니다.


[최혁희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