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여성에겐 공감을, 남성에겐 알아감을

글 입력 2018.02.12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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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은 대학로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혜화동 로터리에 위치한 선돌 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큰 길에서 살짝 안 쪽으로 들어가 있어 한번에 보이지 않는 은밀한 극장이었다. 여자 친구와 함께 극장을 찾은 남성 몇 명을 제외하면 연극 < 그녀들의 첫날밤 >의 관객은 8할이 여자였다. 사회로부터 밀려난 여성들이 또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금요일 밤을 연극 < 그녀들의 첫날밤 >에 바치기로 한 모양이었다.

 제목에 걸맞게 무대는 어두컴컴하고 음침했다. 소박하고 깔끔하게 꾸며진 원룸을 재현하고 있긴 했지만 벽면에 걸린 다트판에는 칼이 꽂혀있었고, 무대 뒤편에 설치된 블라인드는 불길해 보였다. 심지어 무대 앞쪽 위에는 스크린 한 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극장 출입구 앞에 CCTV를 설치해 놓은 것 같았다. 이처럼 스산한 무대 위로 어둠이 내리자,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가 동시에 울려퍼졌다. 다소 긴장된 분위기 속에 시작된 연극은 끝을 향해 달려갈 때까지 줄곧 불안하고 위태로운 공기를 유지하며 진행되었다.



시놉시스

생계형 살인청부 업자인
‘코카’와 ‘트리스’
그녀들은 킬러지만
공과금과 아이들의 교육에 얽매여 살고
친구의 결혼식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하는
"보통사람"이다.

그들은 쪼들리는 생활 때문에
의례적으로 살인이 아닌
한 남자의 납치를 맡게 되고,
납치를 마치고 쉬고 있는 그녀들의 사무실에
그 납치를 의뢰한 ‘노비아’라는 여자가 찾아온다.

그녀는 오늘이 결혼식이었다는 말을 하고
코카와 트리스는 그 결혼식의 신랑이
자신들이 납치해 화장실에 넣어둔
남자란 걸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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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노비아, 트리스, 코카


 킬러로 나오는 코카와 트리스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김보경 배우가 연기한 코카는 카리스마있고 똑 부러지는 성미의 킬러였고, 김현주 배우가 연기한 트리스는 코카와는 정반대로 발랄하고 활기가 넘치는 인물이었다. 이들에게 예비 신랑의 납치를 부탁하고 사무실에 찾아온 의문의 여성 노비아 역시 그랬다. 김진희 배우가 보여준 노비아는 공포, 혼란, 자괴감, 분노를 비롯한 갖가지 감정을 때로는 세밀하게, 때로는 폭발적으로 분출해냈다. 블랙 코미디를 표방하는 만큼 이들 간의 케미가 중요했는데, 각기 개성 있는 캐릭터들이 핑퐁처럼 주고받는 대화 속에 웃음은 자연스레 배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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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 중 노비아는 코카와 트리스에게 고백한다. 남자친구의 단체 카톡방에서 여성에 대한 품평이 오고가는 것을 보았으나 거기서 남자친구가 뭐라고 답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상대를 향한 불신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그가 성폭행범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 상태로 결혼식장에 들어갈 수는 없다고 판단했고 결국 납치까지 의뢰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를 이렇게까지 의심하는 나한테 있는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아직 확인된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두렵다.

 연극 < 그녀들의 첫날밤 >은 노비아의 고백으로 시작해, 커다란 사건 없이 순전히 대화로만 이루어지며 코카와 트리스의 과거도 다룬다. 그런 적 있지 않은가. 절친한 친구나 지인 앞에서는 하기 껄끄러웠던 이야기가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오히려 술술 쏟아졌던 일말이다. 세 명의 여자는 마치 ‘첫날밤’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그들이 겪어야 했던 끔찍한 일들을 서로에게, 아니 관객들에게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사건의 발단에 여성 혐오가 개입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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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전의 프리뷰에서 이 연극과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졌을 때 세간을 어지럽힐 목소리들이 “그래도 납치는 안 된다”파와 “납치는 잘못이지만, 노비아를 이해한다”파로 크게 양분될 것이라 적었더랬다. 아마 이 연극에 대한 의견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중립적으로 서술하려 했으나, 솔직히 말하면 후자의 여론이 대중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우세하기를 내심 바랐다. 물론 살인청부업자에게 납치를 의뢰한 일은, 코카와 트리스가 노비아에게도 말했듯이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법적으로 처벌받을 수 있는 일이고 도덕적으로 그릇된 행동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연극이 보여주고 싶은 진짜 이야기는 납치나 살인에 대한 것이 아니다. 납치를 의뢰해놓고 남자에게 미안해하는 노비아든, 돈 받고 사람을 죽이는 코카와 트리스든, 각자가 처한 상황과 그에 대한 반응이 달랐을 뿐이지 일련의 사건을 이끌어온 동력은, 그들의 삶을 잔혹하게 짓밟았던 여성 혐오였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봇물 터지듯이 터져나오는 페미니즘 역시 역시 그것이 과격한 형태든 온건한 형태든지 간에 가부장제와 여성혐오에 대해 진절머리가 난 여성들의 울부짖음이라는 점에선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연극 < 그녀들의 첫날밤 >은 픽션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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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듯 여성들이 직접 자신의 속내를 상세히 풀어내는 방식은 여성 혐오를 이야기하기에 굉장히 효과적이다. 페미니즘을 향한 혐오와 반감은 여성들이 여성 혐오적인 사회에 살면서 직면하는 상황과 매순간 느끼는 감정들을 ‘알 수 있다면’ 일정 부분 해소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 명의 여성들이 무대 위에서 펼치는 일종의 '수다' 속에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는 여성 혐오로부터 파생된 여러 가지 질문들도 내재되어 있다. '그 남자가 모든 걸 뉘우친다고 하면?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는데?', '법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면 상관 없을 수도 있는거 아냐?'와 같은 발언들이 그렇다. 코카와 트리스, 노비아의 대화는 고민과 신세한탄, 그 이상이다. 그리고 이것이 무대 위에서 공공연하게 이루어졌기에, 또 하나의 투쟁이다.

 서지현 검사의 용기로 시작된 '미투(Me Too)' 운동이 직장인들 뿐만 아니라 대학생, 바로 내 옆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여성들이 고백하는 성희롱과 성추행, 피해를 역으로 조롱하는 움직임도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 그녀들의 첫날밤 >과 같은 연극이 절실하다. < 그녀들의 첫날밤 >은 무대에서 펼쳐지는 또 하나의 '미투'다.

 극 중 눈물을 흘릴 만큼 슬픈 장면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연극을 보는 중간중간 갑자기 울컥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넘어졌을 때 하나도 아프지 않다가 피가 나는 걸 보는 순간 통증이 밀려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연극을 같이 보러 갔던 남자친구 역시 연극이 전하는 메시지로 많은 걸 느낀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 그녀들의 첫날밤 >은 여성들에겐 공감을, 남성들에겐 알아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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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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