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주는 인생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음을 :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영화]

글 입력 2018.01.11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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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 찰리 채플린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이 영화를 처음 만났을 때를 잊지 못한다. 삼류 연극 포스터에 '혐오스런' 어떤 사람의 일생이라니. 호기심에 영화를 받아놓고도 몇 달이나 보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카페에서 우연히 보기 시작했던 이 영화는 내가 가장 아끼는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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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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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마츠코'의 인생을 보면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이 떠오른다. 영화 포스터도 그렇고, 스토리텔링의 방식도 우리가 마치 그녀의 인생을 관람하는 것과 같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일까, 그녀의 인생은 마치 연극 같다. 우리는 이 연극의 화자인 마츠코의 조카, '쇼'를 통해 그녀의 일생을 돌아보게 된다. 그녀의 일생을 소개하는 이 영화는 신나는 음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평탄하지 않은 그녀의 인생은 흥미진진하게 보이기도 한다. 아버지의 부탁으로 그녀의 죽음을 정리하게 되는 쇼도 초반에 시시한 자신의 인생에 비교해 극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던 마츠코의 인생에 흥미를 갖는다. 그녀가 몸을 팔고 살해한 것에 대해서 '대단하잖아'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녀의 살아온 흔적을 정리하면서 혐오스러웠던 그녀의 일생을 전부 돌아보게 된 그는 비로소 마츠코를 온전히 이해한다.

 마츠코의 인생은 실로 희극보다는 비극에 가깝다. 아버지의 사랑이 부족했던 그녀는 사랑이란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사랑에 최선을 다한다. 아버지를 웃게 하려고 웃긴 표정을 짓는 것부터 배신을 당할지언정 사랑을 위해 몸 바쳤던 모든 순간까지. 하지만 모든 순간은 비극적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비극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제 인생이 끝난 줄 알았습니다."라고. 하지만 삶이 계속 그녀를 넘어지게 해도 그녀는 다시 일어난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고 말하면서. 영화는 매순간 그녀의 비극적인 인생을 노래와, 삶의 희망으로 채운다. 그래서 그녀의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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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혐오스러움의 잣대는 어디에서 오는가


 어떤 사람은 이런 마츠코의 인생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 나도 그녀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었다. 마츠코의 일생은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모든 비극을 감싸 안은 비운의 여주인공의 일생 같기 때문이다. '진짜 이런 인생이 있나?' 온갖 불행을 다 모아놓은 것 같은 그녀의 인생이 너무도 비현실적이게 다가왔다. 몸을 파는 행위에 살인, 항상 타인을 위해 살아간 삶... 남들에게 귀감이 되는 인생도 아니었다. 그녀의 인생에는 찬란하고 영원했던 사랑도, 단단한 가족애도 없었다.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삶'. 그래서 그녀의 모든 인생은 '혐오스럽다'로 귀결된다.

 하지만 혐오스러움의 잣대는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가 과연 그녀의 인생을 혐오스럽다고 명명할 자격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넘어진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한, 두 번쯤이야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계속 일어서는데도 또 넘어져서 다시는 일어서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 순간 우리는 일어서길 체념하고 우리 자신을 놓아버린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말 우연한 기회로 다시 일어설 용기가 생겼을 때 잔인하게도 삶은 끝나버린다. 마츠코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감옥에서 만난 절친한 친구 메구미를 다시 만나고 마츠코는 '다시 살아가 보자'라고 다짐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녀의 다사다난한 인생을 비웃듯 정말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모든 선택이 좌절된 비극으로 남는다.

 우리는 모두 동화 속 공주님, 왕자님 같은 이야기를 꿈꾼다. 그래서 그렇게 찬란하지 않은 인생은 실패했다고 믿으며 '내 인생이 끝났다'고 말한다. 멋진 인생을 살지 못하는 자신을 혐오스러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대여, 마츠코와 같은 인생도 분명 있다. 아니,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는 마츠코의 인생이 더 현실적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혐오'스럽다고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인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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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주는 인생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음을


 마츠코는 항상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해 살아보려 발버둥 쳤고,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 그래서 영화 속 마츠코에게 행해지는 남성들의 폭력은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매번 그녀가 절망감에 가득 차 '어째서?'라고 소리칠 때 우리도 '그렇게까지 헌신했는데 도대체 왜?'라고 함께 소리치게 된다. 남자를 자신의 인생의 기준으로 삼은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나기도,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그에 대해 정답이라고 할 수 없지만,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답변을 해준다. "인간의 가치란 누군가에게 뭘 받았냐가 아니라 누구에게 뭘 해줬느냐에서 오는 것 같아."라고.
 
 영화 속 마츠코는 메구미랑 어느 순간 인연을 끊는다. 그녀에겐 "나 왔어 (ただいま)"라고 외쳤을 때, "어서 와 (おかえり)"라고 답해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해서, 나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던 마츠코에게는 아무도 사랑을 주지 않았다. 그녀가 "나 왔어"라고 나지막이 말했을 때 "어서 와"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항상 그 자리에서 "어서 와"라고 답해주기만 했을 뿐.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인생을 쉽게 혐오스럽다고 말할 수 없다. 비극적이고 미련해 보이지만 그녀를 추억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늘 찬란하게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모습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항상 그 자리에서 기다린다고 미련한 것이 아니다. 주는 인생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사랑을 받을수만 있다면 우리는 남들 눈에 혐오스러워 보이는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다. 어쩌면 나를 속이며, 나를 버리며 사랑을 갈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들 어떤가. 최선을 다했다면 충분히 아름답다. '혐오스러웠던 마츠코의 일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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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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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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