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동정하기 힘든 그들, 연극 < 스테디레인 >

묘사가 수놓은 사건의 현장
글 입력 2017.11.23 17:44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REVIEW
 연극 <스테디레인>



*
극 중 중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520x770_정리_1027.jpg
 
 

묘사로 전개하다


연극은 2인극이며, 무대 위에는 책상과 의자가 전부다. 2시간가량 펼쳐지는 충격과 혼란의 사건들은 오로지 두 배우의 말로써 진행된다. 그야말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다. 무대 위 재현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그들의 설명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만 들었을 땐,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연이 끝나고 난 뒤, 우리의 머릿속엔 그들이 겪었던 파란만장한 사건의 순간들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마치 하나의 영상을 보고 나온 것처럼 말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대화에 수없이 등장하는 묘사이다. 그들은 마치 내가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현장감 있는 말투를 사용하며 상당히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특히 대니의 묘사는 그의 성격 특성상 더욱 적나라하고 1차원적이어서, 관객의 상상을 더욱 자극하고 이입하게끔 한다. 수많은 비유와 이를 소화하며 연기하는 두 배우 덕분에, 연극은 지루하지 않게 긴장감을 살리며 전개된다.


22709067_1911645159162261_2489596119751852032_n.jpg
 


그들을 이해하는 것


사실 극 중 인물을 이해하는 것이 언제나 몰입의 첫 단계였던 나로선, 순간순간 이것이 저지당해 그 공감을 온전히 행하지 못하였다. 참 물음을 부르는 그들이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대니가 종교적 경험을 운운하면서 론다의 유혹에 냉큼 넘어간 것이나, “포주들에겐 필요조건같이 똑같은 냄새가 난다. 나는 그것을 도덕성이 썩은 냄새라고 부른다”라고 정의를 운운하는 것처럼 말했음에도, 여자들 뒤를 봐주며 그들에게 돈을 받고, 상품 쳐다보듯 묘사하는 그에게 도덕성은 과연 어떤 기준인 것인지 궁금했다. 가족을 위해서라는 명목이 이 같은 그의 행동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며, 애초에 아내가 힘들어하는 상황에서 이에 최우선으로 집중하지 않는데, 그가 말하는 가족을 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는 그 강박에 너무나 사로잡혀서 그가 정말 추구해야 하는 방향으로부터 엇나가게 되고, 이것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른 채 무식하게 자기 고집을 펼칠 수밖에 없는 인간이 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는 나는 대니라는 인물에게서 도무지 동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조이는 어떠한가. 조이, 이름과는 참 대비되는 인물이다. 그는 센 대니의 성격에 매사 구박받고 혼자서 삭히는 캐릭터로, 연민을 갖기 쉬운 사람이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에 대니가 적어도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최고의 가치이자 삶의 이유였던 가족을 통째로 가져간 것은 조이다. 그의 소심한 성격상, 처음에는 자신만 없으면 된다며 멀어지려고 했으나,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흘러가자 이를 거부하지 않고, 욕심을 차린다. 그는 바깥에서 집안을 바라본 모습, 아름다운 론다와 아이들, 그리고 개가 어우러져 있는 그 행복한 그림에 자신이 들어가기로 선택한다. ‘대니만 없으면’이라는 생각이 고개를 든 것이다. 이런 그가 자살 하려고 하는 대니 앞에서 보이는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물론 코앞에서 친구가 죽으려는 데 아무렇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던 것은 사실이다. 극은 대니가 조이에게 테이블 위로 넌지시 권총을 건네면서 끝난다. 조이는 과연 죄책감에 시달려 그 상황을 끝냈을까? 나는 그가 그저 평생토록 죄의식에 괴로워하고 또 혼란스러워만 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는 계속해서 힘들어 할 것이 분명하지만, 눈앞을 행복을 벗어나거나 상황을 종결시킬 용기가 없다.

두 사람의 상반된 성격으로부터 나는 그들 사이 통하는 무언가를 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특별히 그런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극이 전개될수록 둘 사이는 꾸준히 멀어지는 듯 보였다. 대니는 갈수록 자신 안에 갇히고, 조이는 반대로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 부분은 특정한 상황 안에서 서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것이 그들을 가깝게 하지는 않았으며 이 변화가 서로를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형제처럼 다정하게 말하곤 하는 “내가 네 뒤를 봐주고, 너는 내 뒤를 봐주는 거지”라는 말 또한 어떤 부분을 자극하려 한 것인지 당황스러웠다. 앞으로 벌어질 반대 상황을 암시라도 한 것인지. 어찌 됐건 둘 사이가 벌어질 대로 벌어진 상황에서도 대니가 죽음을 앞두고 말한 이 대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민했다. 인물 자체에 갖는 공감의 어려움이 관람을 방해했다는 아쉬움이 들면서도, 좀 더 시간을 들여 그들을 이해해보려 노력해야겠다는 마음 또한 들었다. 어찌 됐던 현실에도 이처럼 혼란을 주는 인물들을 여럿 만날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b0dd767cc8eed4e72b9a906afcfbf8dc_qnPHW1Jh2gNvG16uQbpvkta.jpg
 


비의 역할


장비의 이용 측면에서 아쉬웠던 것 한 가지는, 의 표현이다. 작품 설정상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있다. 하지만 배우들이 비를 언급하지 않는 이상 나는 전혀 그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 단 한 번의 사운드로 들어가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비를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중간중간 배우들이 “지긋지긋한 비”와 같이 대사에 표현할 때에야 비로소 비의 존재를 인식하곤 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극 전반에 걸쳐 일반 사물 및 상황의 묘사가 매우 구체적이었기 때문에, 비 역시 그 정도로 설명되는 느낌이었다. 물론 비의 소리나 냄새를 기계적으로 재현하지 않는 이상 구현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적어도 극의 분위기를 잡아주는 중요한 소재라면 그에 해당하는 장치를 두는 것이 좋았을 것 같다.





사진 및 이미지 출처: 구글



IMG_6443.JPG
 

[염승희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