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암보암2.0] 바다는 잘 있습니다

글 입력 2017.11.11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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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는 잘 있습니다. 안부 인사가 전해져왔다. 물론 작가에게 직접 잘 지내냐고 물어본 적도 없고, 내가 잘 지낸다는 소식을 전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종종 그의 글을 떠올리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악수 같은 말이었다.

 여행 산문집으로 먼저 접해서 그런지 이병률 작가는 내게 어디인지는 몰라도 언제나 여행하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여행 중인가를 궁금해 해본 적은 없다. 그에게서 방황의 냄새가 난다는 것이 방황한다는 사실보다도 중요했으므로. 그래서 바다는 잘 있다는 그의 말에, 오늘도 헤매고 있을 작가가 떠올랐고, 당신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묻고 싶어졌다. 답은 오로지 그의 글 속에만 있을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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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는 잘 있습니다>  
 




오늘도 새벽에 들어왔습니다
일일이 별들을 둘러보고 오느라구요
...
참 돌아오던 길에는
많이 자란 달의 손톱을 조금 바짝 깎아주었습니다   

<살림> 中


사람마다 살림 하는 법은 다르리라. 혼자 사는 이에게 살림은 미루고 미루다 끝내 치우지 않으면 안 될 때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린 자식들을 둔 사람에겐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병률이란 사람에게 살림은, 새벽녘부터 하늘에 박힌 별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둘러보고, 돌아오던 길에 달의 손톱까지 바짝 잘라주어야만 끝이 나는 것인가 보다. 그저 나 몰라라 하면 될 것을. 매일 스쳐가는 것들임에도 매번 힘을 다해 신경을 쏟지 않을 수 없었던 걸까. 비로소 이병률 작가의 시 속에 들어왔다는 걸 실감했다.




사람이 죽으면 
선인장이 하나 생겨나요

그 선인장이 죽으면
사람 하나 태어나지요

<사람> 中

 
 여름이 아쉬운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키우는 선인장 하나가 죽었다. 이 이야기를 지인에게 했더니, 선인장은 속에서부터 썩어간다는 답이 돌아왔다. 선인장이 되살아나 가슴을 찌르기라도 한 것처럼 죄스러워졌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선인장이 쑥쑥 컸다고 좋아했는데. 갑자기 고꾸라져 버렸다고 원망했는데. 정성을 다했다고 착각했는데. 본래 선인장의 이파리는 넓었다고 한다. 뜨거운 기후에서 살아남기 위해 좁아지고 좁아지다 가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죽으면 선인장이 하나 생겨나고, 그 선인장이 죽으면 사람 하나 태어난다는 말에 입을 앙다물고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나 속으로나, 선인장과 사람은 닮은 데가 많아서 그렇다. 선인장을 가슴에 담은 덕분에, 나와 이병률 작가도 닮은 데가 하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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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거짓말로도
밤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전체의 일부가 아니며 소설이나 시도 아닌 밤

<밤의 골짜기는 무엇으로 채워지나> 中


 밤새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소설도 시도 아닌 밤이란다. 그런 밤을 이해할 수는 없다. 어쩌면 밤은 곧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물론 혈액형이나 별자리의 특성을 읊어놓은 글들이 허무맹랑한 것임을 알지만, A형인 것 같다가도 B형인 것 같고 게자리 같다가도 처녀자리 같은 사람의 마음 역시 얼마나 줏대가 없는가. 그렇게 사람은 평생을 스스로에 대해서조차 완벽히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밤이 끝나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사람은 자꾸만 ‘생각의 강아지풀’을 꺾으며 ‘생각을 판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또 묻는다.




도장을 갖고도 거대하고도 육중한 한 시절의 어디에다
도장을 찍어야 할지 모르는 나는
온통 여백뿐인 청춘이었다

여백이 무겁더라도 휘청거리지 말고
그 여백이라도 붙들고 믿고 수고할 것을

그 여백에라도 도장을 찍어놓을 것을

<미신> 中
 

 필명을 갖고 싶은데 여백이 많아 비싼 돈을 주고 도장을 파듯이, 가진 게 없어서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있다. 뭐든지 할 수 있는 게 20대라고는 하지만, 열정과 노력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게 젊음이기도 하다. 인생이 무겁고, 꿈의 부피가 버거워 휘영청 인생을 배회하는 것이 청춘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여전히 드넓은 여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최선이 억울해질 때도 있다. 그런 젊음을 향해 작가는 이야기 한다. 여백이라도 붙들고 믿고 수고할 것을 그랬다고. 여백에라도 도장을 찍어놓을 걸 그랬다고. 그렇게 내게도 필명을 쓸 날이 있을 거야-라고 하며 마치 ‘미신’인 냥 믿어 볼 것을. 아직 이룬 게 아무 것도 없는 20대가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는 방법 하나를 일러주는 것인 가보다.




잡다한 모든 것들이 좌르르 길 한가운데로 쏟아졌다
나는 그것들을 주섬주섬 길가로 옮겨놓고는
다니던 회사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
여전히 나는 지금까지도 벌레일 것이나
기어서 도착한 곳이 아직 없으며
고작 비를 피하려 거기로부터 멀지 않은 데서
기웃거리기나 하고 있다는 사실뿐

<비를 피하려고> 中
 

 굳이 나이 대를 따지자면, <미신>은 20대의 이야기, <비를 피하려고>는 30대의 이야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무언가를 이룬다고 하더라도, 아니 이뤘다고 믿었음에도, 뒤를 돌아보니 결국 모래성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시와, 모든 소설과, 모든 발언이 늘 희망과 용기만을 노래할 수는 없다. 누구나 자존감이 높은 것은 아니며, 가끔은 어린 아이의 미소처럼 해맑음 마저 거북할 만큼 깊은 어둠 속에 침잠하기도 한다. 때문에 억지로 밝은 척, 긍정적인 척 하는 것보다 스스로를 벌레라고 느끼며, 도망쳐 나온 곳에서 멀리 가지도 못한 채, 우산도 없이 시 속을 기웃거리는 게 속 편할 때도 있다. 우리는 있는 힘껏 고독해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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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내가 쓰려고 쓰는 것이 시이기보다는
쓸 수 없어서 시일 때가 있다.

<내가 쓴 것> 中

 
 여러 번 깎아내고 다듬고 지우고 또 다시 쓰기를 거듭한 글이 좋은 글이 될 수도 있고, 어떻게든 해보려고 쥐어 짜낸 글이 좋은 글이 될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냥 쏟아져 나온 재채기 같은 말들이 좋은 글이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찌 할 줄 모르는 마음을 종이 위에 어설프게 내려놓은 것이 시라면, 이병률 작가에게 시는 참 간절한 것인가보다.





시집의 맨 마지막 시는 무엇으로 할까
언제 어느 때의 환절기를 떠올려야 할까
끓이게 될 배춧국 국물에 대해 한없이 준비해야 할까
...
몸만 부리고 갈 수 없는 암담함을
이 무엇으로 대신해도 되냐고 적어야 하나

<착지> 中


 바다는 잘 있군요. 그럼 당신은 잘 있나요? 라는 질문에, 작가는 마지막 시 <착지>로 답한다. 그는 여전히 방황 중인 듯 하다. 밤하늘을 훑어 새벽까지 내달리고, 이상에서 현실로 쿵 떨어지기도, 산으로 갔다 호수로 가거나, 내시경으로 갔다가 불화덕으로 옮겨 붙기도 하면서, 시집 속에서 작가의 시선과 마음은 이곳저곳을 기웃댄다. 마지막 시도 정하지 못한 채, 손을 떼지 못하는 망설임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시집을 끝맺는다. 불안정한 착지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어수선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바다는 잘 있습니다>는 그러한 기웃거림으로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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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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