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먹방, 눈물 젖은 빵의 문화 [문화전반]

글 입력 2017.11.08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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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 푸드>출처: 샤럴드 경제



먹방, 눈물 젖은 빵의 문화



1.눈물 젖은 삼각김밥

학창시절의 나는 오래 살고 싶은 마음 따위는 솜털만큼도 없었다.
그때는 눈을 감으면, 언제 어디서 죄책감이 가시처럼 돋친 채찍이 계속 눈을 후려쳤다. 매일 밤 잠자리에 누워있으면 곧 어둠이 가시고 나면 다른 하루의 시작이 된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꾸역꾸역 살아온 인생도 수능이 끝났을 때는 모래시계의 모래가 모두 흘러가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생각했던 모래시계의 모래알들은 내 수명이나 시간이라기보다, 이 끔찍한 세상을 버텨온 인내심이었다. 그 인내심이 이제는 바닥을 찍어버린 것이다. 수능이 끝나고 일주일 정도 누워있다가, 불현듯 마포대교를 가고 싶어서 저녁 8시에 마포대교로 갔다. 5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때 거닐었던 다리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는 그 날 죽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걸어가면서 왠지 죽으러 가 가는 기분이었다. 바람이 코트 안으로 계속 들어와서 추웠는데도 눈만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눈물을 흘릴까 말까 하면서 강 주변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저 멀리에서 편의점 불빛이 보였다. 편의점은 간판을 제대로 손보지도 않았는지 주변의 높은 빌딩보다 더 애매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편의점의 간판은 빛이라기보다 어두운 벽에 칠해진 노란 페인트였다. 내가 그렇게 느낀 것은 그만큼 그 빛이 약하고 흐릿했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그 불투명하고 초로한 그 빛에 식욕을 느낀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다리 끝에 있는 편의점에서 남아있는 삼각김밥이랑 라면을 쓸었다. 점원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나와 강을 보면서 입에 음식을 쑤셔 넣었다. 입에 넣으면 넣을수록 배가 고프게 느껴졌다. 가게가 닫기 전 팔리는 삼각김밥은 재앙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허겁지겁 먹고, 또 먹었다. 배가 부르고 남은 삼각김밥을 씹으니 그제야 입안 삼각김밥의 알알이 느껴졌다. 지금까지 터져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입에서 굴러다니는 삼각김밥의 알알의 감각이 내가 이곳에 살아있는 하나의 생물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나와 내 눈앞의 뚜렷이 보이는 음식, 먹는 행위는 나를 존재하게 해주었다. 내가 만들어낸 감정과 나를 압박하는 사회 이전에 나는 살아 숨 쉬는 존재였다. 나에게 음식이란, 나의 동물적 실존을 발견한 기억과 정서의 응축이었다.



2. 양껏 먹기 어려운 세상에서 대신 먹어주는 사람들

먹는 행위는 동물적이다. 우리의 선조가 고기를 뜯어 먹는 것처럼, 우리도 모여앉아 삼겹살을 구워 먹는다. 하지만 인간은 정신과 기술의 발달로 '특별한' 동물이 되었다. 선사시대와 다르게 우리는 과일을 따는 법 대신 편의점에서 가공식품을 섭취하는 방법을 안다. 일례로 우리는 닭고기와 닭을 일치시키지 못하고 있다. 도시에 계속 살아온 사람이라면, 닭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상표를 달고 목이 없는 반들반들한 상품의 모습을 생각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명이 만들어낸 사회 시스템에서 우리 스스로가 인간이 아닌 어떤 동물의 종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어렵다. 사실 인간 안의 동물성은 기술발달로 인해 인식하기 어려워졌던 것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꺼려졌던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 닭을 상품으로 만들었듯이 인간의 동물성은 늘 정복당하고 이겨내야 할 것으로 취급된다. 역사 속에서 금욕주의라는 이름으로 동물성은 늘 악덕의 모습을 띠곤 했다. 동물성은 어느샌가 무절제와 의지박약이라는 단어와 함께 엮이게 되었다. 인간은 열등해지지 않기 위해, 연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 동물성을 억압한다. 가공품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가 소외되어 보살핌을 받고 싶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도, 소리 지르기도 어렵게 된 것이다. 연약함과 욕망을 부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성보다 감성, 규율보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포스트모던의 발견으로 우리의 억압적 삶은 점차 해소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어 보인다. 지금 청년세대에 자주 사용되는 '불금' 이라는 단어는 일주일 내내 모아왔던 스트레스를 어느 한 날에 풀어버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억압된 욕망은 이처럼 극단적인 해소나 비틀린 방식으로 표현된다.



3.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적 있나요

최근 5년 사이에 먹방이라는 콘텐츠가 떠오르고 있다. 먹방은 진행자가 한 사람이 먹기에는 어마어마한 양을 먹으면서 시청자와 채팅을 하는 방송으로, 전 세계적인 현상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탄생한 고유의 콘텐츠다. 외국 연구자들은 "mok-ba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유교 문화에서 그 이유를 찾으려고 들었다. 하지만 유교 문화의 반항으로만 먹방을 설명하기엔 부족해 보인다. 물질이 풍부한 현대 사회에서 '먹는다'는 행위는 생존을 위한 행위라기보다 정서적인 행위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고칼로리 음식을 잔뜩 먹는 것이 한 사례가 될 수 있고, 폭식증과 거식증으로 대표되는 식이장애가 정서적 불안과 우울과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좋은 증거가 될 수 있다. 당장 '밥이나 한번 먹자'라는 말이 관계의 인사말이 될 수 있는 것도 음식을 먹는 행위에 어떤 정서적 개입이 있기 때문이다. 또 '위로 음식', 즉 음식과 스트레스 해소 간의 관계는 외국의 심리 실험 연구로도 밝혀진 바가 있다. 실험자는 치킨 수프를 위로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피험자들에게 치킨수프를 주고, 어떤 심리적 변화가 일어나는지 봤다. 흥미롭게도 안정 애착 유형의 사람들은 치킨 수프를 먹고 나서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것으로 보고 했다. 실제적인 연구가 아닌 이론으로서도 먹는 행위는 심리와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심리학자인 프로이트는 심리성적발달단계의 시작으로 구강기적 욕구로 설명했다. 젖을 받아먹는 아이는 세상(어머니)과의 신뢰를 쌓는다.

이처럼 음식이 어떤 심리적 기제와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에 먹방이 성행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는 다이어트나 여러 사회적 제약으로 실컷 먹을 수 없는 것들을 먹방 진행자는 마음껏 먹는다. 우리는 그들이 어쩌면 채울 수 없는 마음의 허기를 채워주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먹방을 보는 것이 왜곡되었거나,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혼자 적적하게 식사를 할 때면 먹방을 틀어 같이 식사를 하는 기분을 내기도 한다. 하지만 내 옆에 누군가가 나와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면, 왠지 "당신은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적 있나요?"라고 물어보고 싶어진다. 현대사회에서 눈물 젖은 빵은 가난함을 겪어봤냐는 관용적인 표현이 아니다. 어느 날 유독 당신이 먹은 음식이 고되고 힘들어서 달콤하게 느껴진 적이 있냐고 물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답이 무엇이 되었건, 같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누군가대신 해주지 않는 즐거운 식사를 하고 싶다.


[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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