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영화 '버드맨' 비평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글 입력 2017.10.24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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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영화 '버드맨' 비평


오한울
 

버드맨 포스터2.jpg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코미디영화를 만들었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우뚱 할 것이다. 이냐리투는 ‘21그램’, ‘바벨’, ‘비우티풀’까지, 이른바 ‘죽음 3부작’을 만들며 인간 내면의 끝없는 고독과 허망을 그려왔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코미디영화는 본인의 역량을 다 펼치지 못한 실패작이 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 버드맨을 보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이냐리투가 짧고 복잡한 편집과는 정반대인 원테이크 형식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리듬이 생명인 코미디 영화를 원테이크로 찍고, 심지어 그의 장기인 편집을 최소화하여 영화를 찍는다는 건 본인의 무덤을 파는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 버드맨을 보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이냐리투는 모든 영화인들의 우려를 완벽히 씻어낸 놀라운 코미디영화를 만들었다. 가장 놀라운 점은 그가 표현해 왔던 인간본성의 암울한 비극을, 그가 표현하지 않았던 블랙코미디의 방식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왕년에 ‘버드맨’이라는 슈퍼히어로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하여 큰 사랑을 받았던 리건 톰슨 (마이클 키튼). 시리즈 출연이 끝난 이후, 그는 연기 인생 슬럼프에 빠지고 동시에 가정에도 소홀하여 부인과 이혼했으며 딸인 샘(엠마 스톤)과의 관계도 위태롭다. 리건은 이런 끝없는 내리막 인생에 큰 도전을 하게 된다. 바로 자신이 몸담던 할리우드를 벗어나 브로드웨이에서 직접 연극을 연출하고 주연으로 연기까지 하는 것. 그러나 연극을 통해 재기하려던 그의 바람과는 달리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대체 배우로 들어온 마이크(에드워드 노튼)는 말 안 듣는 사고뭉치고, 샘은 아버지에게 한없이 냉소적이며, 비평가인 실비아(에이미 라이언)는 리건이 연극을 선보이기도 전에 그에게 거대한 악평을 선사할거라 선언한다. 거기다 그의 자아 속 버드맨은 끊임없이 속삭이며 그를 괴롭힌다. “넌 무비스타였어. 기억나? 우리가 있을 곳은 이 시궁창이 아냐.”

 이렇게 그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느끼면서까지 연극에 사활을 건다. 그가 원하는 건 단순한 대중의 관심이 아니다. 그가 단지 대중에게 잊혀지는 것이 싫었다면 ‘버드맨’의 후속 시리즈에 출연하는 방법도 있었을테고, 코미디 토크쇼에서 온 출연제의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연극이라는 낮선 땅에 발을 디뎠다. 사실 그의 연극이 예술추구가 아니라 자신의 건재함을 알릴 목적이 아니냐는 샘의 말은 그의 정곡을 찔렀을 것이다. 그녀의 말처럼 리건은 예술추구에 관심이 없다. 연극을 하는 이유는 하나다. 자신을 스타로 만듦과 동시에, 그 속에 갇혀지게 만들었던 버드맨 캐릭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다. 이냐리투가 영화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리건과 자아 속 버드맨의 대결, 즉 인간내부 본성들 사이의 충돌이다. 그래서 주인공인 리건이 본성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는가? 서론에서 밝혔듯, 애석하게도 그렇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버드맨 사진 3.jpg
 

 < 버드맨 >의 결말을 살펴보자. 연극 당일 무대에 선 리건이 연극의 마지막인 자살하는 연기를 할 때 가짜 총이 아닌, 실제 총을 자신의 머리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긴다. 죽음을 불사르면서 까지 버드맨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필사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총은 그의 머리를 빗나가 코를 향했고, 그는 목숨을 건졌다. 그 후, 리건은 버드맨이 아닌 연극으로 대중들의 큰 관심이 받았으며, 악평을 쓸 거라던 실비아에게 최상의 극찬을 받고, 자신과 싸우던 본성인 버드맨의 쭈그리는 모습까지 확인함으로써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다. 그러고는 창밖으로 몸을 던진다. 그는 완벽히 돋아난 날개를 달고 딸이 볼 수 있게 하늘위로 비상한다. 그렇게 이 영화는 완벽한 해피엔딩으로 보인다, 얼핏 봤을 때 말이다. 하지만 결말 부분을 잘 곱씹어 봐야한다. 분명 그가 자살 퍼포먼스로 대중과 평단의 열광적 반응을 받아 낸 건 사실이다. 그러나 대중들이 그에게서 버드맨의 모습을 지웠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가 아무리 버드맨에게서 벗어나려 자살시도를 한다 해도 대중들에겐 단지 ‘버드맨의 자살시도’ 로 밖에는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버드맨이 없었다면 대중들에게 리건 톰슨이란 인물도 없을 테니 말이다. 또한 실비아가 그에게 극찬을 준 이유는 연극이 예술적으로 뛰어나서가 아니다. 단지 자살 시도까지 한 연극에 악평을 단다면 자신 평론인생에 먹칠 하는 꼴이 될까봐 울며 겨자 먹기로 극찬을 한 셈이다. 결국 그는 어떠한 선택과 행동을 하더라도 본성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었다. 그 이유가 바로 이냐리투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다. 인간은 자신의 본성과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원하는 것을 위해 노력하고, 설령 그것을 가지는 데 성공했을 지라도 그것이 정답인지는 모른다고 감독은 영화로 말한다. 리건은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버드맨의 환상을 뛰어넘고 이기려하지만, 사실 그것도 본인의 자아였기에, 이겨도 이긴 게 아닌 셈이다. “넌 무비스타였어. 기억나? 우리가 있을 곳은 이 시궁창이 아냐.”라고 말하는 그의 환상이, 사실은 그의 주된 본성일 수도 있다는 거다. 제이크(자흐 갈리피아나키스)가 건넨 축하의 인사에도, 변기 위에 쭈그러진 버드맨의 모습을 보고나서도 결코 리건이 웃을 수 없었던 건 자신이 절대 스스로를 이길 수 없었던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승리 불가능한 게임의 패배를 선언하며 창밖으로 몸을 던진다. 하지만 이 영화는 희극이다. 그가 암울하게 몸을 던지지만 하늘위로 멋지게 솟아오른다. 이것이 이 영화의 부제인 ‘예기치 못한 무지의 미덕(The unexpected Virtue of Ignorance)’인 것이다. 이길 수 없다는 걸 모르지만 그럼에도 자신과의 싸움에서 끝까지 이겨보려 하는 자체가 아름답다고 감독은 말한다. 이냐리투는 무섭다. 코미디의 탈을 쓰고 인간 본성의 비극을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너무 좌절하지 말라며 위로한다. 이길 수 없지만 그래도 내 자신과 한번 싸워보라고. 그래서 이토록 날카롭고 우아한 코미디에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멋진 영화다.


[오한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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