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아이텔: 멀다. 그러나 가깝다 展

고독, 그 인간의 조건에 관하여
글 입력 2017.10.24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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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고독하다. 아니 ‘현대’ 이전부터 인간은 원래 고독했다. 그 고독은 생존에 불비한 태생적 요건들을 극복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무리지어 생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채득한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무리지을수록 고독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허다한 무리 속에서 나 자신이 진정 독립된 현존재(Dasein)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타자와 관계 속에서 순간의 위로와 공감은 얻을 수 있지만, 결국 생의 궤적 전반에 걸쳐 빈틈없이 나를 지지하고 동행하는 존재는 다름아닌 나 자신이다. 타인에게 기대면 기댈수록 진정 믿을 수 있는 존재는 나 뿐이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학습한다. 타자를 통해 나의 실존을 자각하는 것. 바로 그것이 하이데거, 사르트르, 라캉이 입을 모아 역설했던 인간의 조건이다.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린 ‘팀 아이텔(Tim Eitel): 멀다. 그러나 가깝다’ 展은 그러한 인간의 조건을 다시 상기하는 기회였다. 해당 지역에서 공부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딱히 공통점이 없어 보이나, 편의상 ‘라이프치히(Leipzig) 화파’의 일원으로 거론되는 그는 정갈하면서도 고독한 현대인들의 풍경을 담아낸다. 혼란스러운 눈빛을 피할 길이 없는 극단적 추상과 그 반대인 초정밀 구상이 공존하는 동시대 미술계에서 묵묵히 재현의 길을 걸어간다. 이번 전시에서도 현대인을 관조하는 11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그가 추구하는 현대인, 고독, 그리고 사심없는 관찰은 특유의 은은하고 명료한 색조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를 연상시킨다. 100여년의 시차를 두고 동시대인들의 내적 심연에 주목했던 두 화가는 일견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워보이지만, 그 안에 드러나지 않은 무거운 메시지가 있을 것만 같은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호퍼가 100여년 전에 주목했던 고독을 아이텔이 굳이 다시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 고독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호퍼가 주목받았던 것처럼, 아이텔도 동일한 이유로 주목받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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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작품으로 「암층(Rock Formation, 2017)」이 입구 정면에서 압도적인 크기와 색감을 보여준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상승하는 기하학을 의도한 이 작품은 완벽히 통제된 단일 색조의 하늘과 울긋불긋한 기암괴석이 대조를 이룬다. 그림 속 바위는 견고한 것 같지만 가까이 들여다 보면 정확한 형태모사를 위해 캔버스에 밑작업으로 그었을 그리드가 비춰보일 정도로 투명하다. 큰 바위가 지천인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그렸지만 제목은 그저 암층이라는 점에서 인간 소외를 불러일으킨다. 본능적으로 그림 속에서 인물을 찾고, 그에게 몰입하고 싶은 관람객을 기만한다. 심지어 오른쪽의 두 사람은 바위와 비슷한 색감의 옷을 입고 자연의 일부가 되기 위해 진군하는 것 같다. 반대로 눈길을 끄는 노란 원피스의 여인은 이 거친 자연에 어울리지 않고 금새 상처를 받을 듯 위태롭다. 이 중 누가 당신의 입장인지 선택해보라는 시험일지도 모른다.

제목에서 인간 소외를 의도하기는 「파란 가방(Blue bag, 2017)」도 마찬가지이다. 형태를 알 수 없이 뭉개져버린 공원 또는 초원에 서 있는 노신사를 그린 이 작품은 모델의 성별, 위치, 행위, 연령 등 다차원적인 면에서 좀처럼 확신할 수 있는 구석이 없다. 내게는 그저 부인이 수영복 가방을 맡기고 쇼핑몰에 간 사이에 무엇을 해야 할지 혼돈에 휩싸인 노신사로 보인다. 그런 상황이라면 고독이나 상념에 빠져 있다기 보다는 그저 순수한 백지상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마치 그의 앞에 놓여진 막막한 숲처럼.

「건축학 학습(바라간)(Archtectural Study, 2017)」은 아이텔의 입장에서는 대작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크기도 크거니와 배경과 사물에도 시간을 들인 티가 역력하다. 테이핑을 통해 무결점에 가깝게 면과 면의 경계를 표현하는 그의 기법은 이 작품에서 더욱 도드라져 보이며, ‘이럴 필요까지 있어?’ 라는 과잉마저 느끼게 한다. 그러한 완벽한 경계 속에서 흐릿한 인물은 이질적으로 붙여 놓은 스티커 같지만 그렇기에 더욱 강하게 시선을 잡아끈다. 파르미자니노와 에셔를 연상케 하는 수정구슬은 작가가 단순히 정적인 이미지만을 곱상하게 포장하는 수준을 넘어 최소한의 사유 정도는 담을 수 있다는 것을 표상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나무와 가지(Tree and Stick, 2017)」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었다. 미술사 교과서에 나오는 몬드리안의 추상화 과정에서 중간 정도 위치를 점할 것 같은 기하학적 나무다. 은은한 톤 일색인 아이텔의 작품 중에서 이렇게 강렬한 주황색이 전면에 드러난 것도 이질적이지만, 수면에 비친 줄기를 묘사하는 방식이 동양화의 그것과 닮아 있다는 점도 특색있다. 마치 “나는 고독한 현대인만 그리는 것이 아니야. 나 이런 것도 해”라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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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그의 작품들은 단색의 여백을 과도할 정도로 펼쳐 놓아 인물의 고립감을 극대화시킨다. 인물은 흐릿하며, 뒷모습이거나, 표정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관람객이 각자 가지고 있는 고유의 심상을 여과 없이 흡수하기 좋은 상태이다. 배경의 강박적인 직선은 유령 같은 인물의 불안함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아리송한 의미를 내포한 것 같은 정갈한 화면은 인스타그램에서 수백개의 ‘♥’를 받는 팬시한 일러스트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공들여 계속 들여다보면 실상 특별한 의미는 없다는 것을 이내 깨닫는다. 뭔가 심오한 존재론적 고찰을 들이대보고 싶지만, 예쁘장하게 허무한 이미지들은 엉성하게 손에 쥔 모래알처럼 빠르게 흩어진다.

고독의 의미가 그런 것 아닐까. 오직 나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성이나 나르시스트적 자기연민인줄 알았건만 결국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내 곁을 스쳐지나가는 누군가에게는 그 나름의 고독한 드라마가 연출되고 있을 것이다.


[김주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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