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날들 : 기록 [문화 전반]

글 입력 2017.10.10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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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을 쉬었다. 한 달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느 애니메이션의 무기력한 주인공처럼 지하철을 타고 왔다 갔다 한 기억 밖에는 없다. 지갑에 있던 돈을 통장에 넣어두고 알찬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이 이것저것 돈이 나갔다. 쓸 데 없이 돈 쓸 일이 많았다. 감흥도 흥미도 없어서 안타깝게 보낸 기회도 있었다. 그래도 몸은 무기력했다. 머리도 뭐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선배는 내게 매너리즘이냐 물었다. 되묻기도 귀찮아서 그냥 그런 것 같다고 답했다. 할 것들을 대충 하고, 열의 없이 노력하고, 무감하게 꼬박 한 달을 보내고 나니 그제야 조금 지쳤다는 것을 알았다.  뭐, 그러려니 했다. 사람이 언제나 열의를 가지고 뜨겁게 살아갈 수는 없는 거니까.

 친한 친구의 연애 소식과 지인의 유학 소식, 잊고 있던 인물들과의 재회가 있었고 예측했던 상황들과 조우했다. 날씨가 추워졌으면 하고 바랐지만 날씨는 여전히 더웠고 배고프지 않았음에도 폭식했다. 불명의 바이러스가 온몸을 차지하는 중은 아닐까, 하는 이상한 생각도 조금은 했던 것 같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정말 꾸준히 흘렀다. 조금은 천천히 흘렀으면 싶었는데 생각보다 더 빠르게, 그러나 실수는 없이 흘렀다. 그래서 한 달이라는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보낸 첫사랑 같은 날들이었다.

 10월이 되고, 연휴가 끝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뭘 했는지도 생각나지 않지만 어쨌든 후회는 없었다. 매일 뭔가를 하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인 거고, 때때로 인간에게는 휴식기가 필요한 법이니까. 겨울이 되면 동물들이 동면을 취하듯, 내게도 동면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게는 전환점이 필요했다.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하다못해 누군가를 질투하거나. 뭐든 다시 타오를만한 일이 필요했다. 가장 쉬운 것은 미워하거나 질투하는 것이지만 딱히 미워할 만한 사람도, 질투할만한 사람도 없어서 무산됐다. 남은 것은 사랑인데, 사랑만큼 어려운 것이 어디 있을까. 그래도 가능성 있는 것은 사랑이라 노력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앞에 말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누군가'에서 '무언가'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을 "무언가를 사랑하는 일"로 말이다.

 노력은 지진부진했지만 그래도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것에 몰두했다. 사랑은 아닐지 몰라도 취미 정도는 붙인 수준이었다. 그러는 동안 몸의 무기력함은 그나마 조금 나아졌고, 정신의 무기력함은 몸보다는 더 나아졌다. 만족할만한 것은 아니지만 불만족스럽지도 않았다.

 그래서 상담사가 말한 '상담의 필요성'이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상담을 받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공손하고 예의 바르던 상담사의 말에 자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내게는 뭔가 필요했고 그것이 극적인 감정이든 치료이든 뭐든 있어야 했다.
 "아무도 믿지 못한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잖아요." 내가 꺼내둔 이야기에 상담사는 안타까운 듯 말했다. 그래, 누군가를 믿지 못한다는 건 확실히 외로운 일이기는 하다. 기댈 수 없음은 물론이고 항상 경계하고 의심해야 하니까. 상담 후에야 나는 믿지 못함으로 생긴 피로에 대해 깨달았다. 항상 경계하고 의심하고 체념한 상태를 유지했으니, 몸이든 정신이든 방전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냥 버텼어요.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그냥."
 그동안 어떻게 버텼냐는 상담사의 물음에 '그냥 버텼다'라고 답하고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내 몸을 채우고 있는 것은 섬유질과 체액, 뼈나 수분이 아니라 공허함이나 고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전형적인 문과의 상투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상담실을 나오면서 멍하니 구름이 지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친구를 만나러 제기동역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 꽉 찬 사람들의 면면을 보고 그들이 향하는 목적지를 가늠하면서 인정했다. 나의 외로움과, 공허와, 존재의 필요성을. 버스를 내려 카페로 향하면서 조금은 웃을 수 있었다. 허탈이었다.

 아직도 모든 것은 진행 중이다. 나의 공허도 외로움도 진행 중이고 당연하지만 나아지고 싶은 마음도 진행 중이다. 감정은 인간의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가장 힘겨운 존재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감정을 그냥 놔두기로 했다. 언젠가는 나아질 거라는 믿음은 그래도 꽤나 쓸모 있는 생각이니까.
 벌써 10월이다. 두 달 후에는 새로운 해가 되고 나는 자유로 한 걸음 더 가까워진다. 낙엽이 물드는 달에는 한가롭게 시간을 떠내려 보내고자 한다. 아, 가을이다.


[김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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