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미(美)란 무엇일까 [문학]

< 고뇌의 원근법 >을 읽고 나의 미(美)에 대한 관점 되돌아 보기
글 입력 2017.09.17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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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뇌의 원근법’을 읽으며 미(美), 아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기준과 가치관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이루어졌으며, 이 가치관이 남들에 의해 형성되었는지, 아니면 내 자신의 정확한 주관인지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작가의 독일 여행으로 많이 접해보지 못했던 독일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며 당시 사회의 흐름과 작품에 대한 미적기준을 살펴보았다. 독일의 나치정권은 ‘대독일 미술전’과 ‘퇴폐 미술전’이 있었다고 한다. ‘대독일 미술전’은 ‘땅과 피’로 표상되는 나치 이데올로기 선전을 목적으로 ‘노동’, ‘가정’, ‘전쟁’, ‘이상적 육체’ 라는 주제의 작품만을 진열하였고 ‘퇴폐 미술전’은 나치즘의 이념에 반하는 예술을 공중에게 드러내 공개적인 조롱거리가 되게 할 목적으로 열렸다. 나치 정권들에겐 진정한 독일 예술을 타락시키고 독일 민족을 몰락으로 이끄는 것이라며 퇴폐 미술전이라 부르며 비난을 쏟아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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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의 생애> 연작중 <예수 탄생>, 1912


 에밀놀데(Emil Nolde)는 이러한 사회적 흐름 속에서 비난을 받았던 작가 중 한명이다. <그리스도의 생애>라는 연작은 지금까지 본 종교화 중에서 가장 자극적인 색채를 쓰고 붓 터치 또한 거친 느낌을 받았다. 이전에 접해 보았던 종교화들은 작품의 배경이나 색채를 표현함에 있어서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을 주어 신성함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에밀놀데(Emil Nolde)의 작품은 격렬한 색채와 자극적인 인물들의 표정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충분하였다. 당시에 “흑인 같고 야만스럽고 신앙심이 없는” 거짓 종교화라는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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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1929~1932


 또 다른 오토 딕스(Otto Dix)라는 작가도 기존의 관념을 깨는 신선한 작품을 그렸다. <전쟁>이라는 작품은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함을 사실적이게 표현하였다. 사망한 병사의 머리, 희생된 병사의 시신, 턱 밑이 날아간 얼굴 등 잔인하고 끔찍한 모습을 그대로 묘사하였다. 당시 시대에 전쟁에 대한 비참함을 강조하면서 조국에 대한 배신을 선동한다는 비난을 받으며 역시나 ‘퇴폐 미술’로 분류되었다.

 이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감상할 때 아름답지 못하고 기존의 틀을 벗어나는 파격적이고, 격렬하다는 이유로 퇴폐 미술로 일컬어졌다. 이 들이 말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화려하고 안정감을 주는 색채와 부드럽고 균형적인 인물이 묘사된 그림만이 아름다운 작품인 걸까? 아름다움의 기준은 작품을 감상하는 다양한 사람들 마다, 작품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작품이 어떤 의미를 반영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각자의 취향에 따라 부드럽고 온화한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다소 자극적이고 격렬한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한 작품을 감상하면서, 다양한 방면으로 생각해 자신의 생각과 작품의 의미가 같다고 느끼거나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면 그 자신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작품이 사회적 상황이나 문제를 담는 작품을 그려 의미를 담아내고 표현의 수단이 된다면 이 역시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다움’, ‘미(美)의 기준을 규정해서는 안 된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듯 미적기준 역시 다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적기준이 다양한 만큼 작품들도 다양해지는 것이 맞다. 작가들이 작품을 그릴 때 그들의 기준과 표현의 자유를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주제에 대한 억압이 작품의 다양성을 파괴하는 요소이다. 오로지 ‘예쁜’ 작품만 강요하고 보기에 ‘좋은’ 작품만 강요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예쁨’과 ‘좋음’의 기준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보편적으로 완벽성과 조화를 이루는 그림을 보고 사람들은 ‘예쁜’,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곤 한다. 보편성을 깨트려 다양하고 특수한 그림도 충분히  ‘예쁜’,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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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의 불신>, 1601~1602


 카라바조(Caravaggio)의 <토마스의 불신>이라는 작품을 보면 기존 작품과 달리 흥미로움을 느낄 수 있다. 토마스가 예수의 상처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있다. 예수의 표정은 덤덤하고 생기가 없지만 토마스를 포함한 세 명의 표정은 생생하고 동적이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예수가 아니라, 보고 만지고 확인하려는 욕망에 마음을 빼앗긴 토마스 이다. 신에 관련된 이야기를 시각화하는 화가들이 보고 그리는 쾌락에 빠지게 되었다. 한 번 알게 된 쾌락을 버리는 것은 불가능 하다. 오히려 쾌락을 추구하는 일에 철저하게 충실한 자야말로 훌륭한 예술가인 것이다. 작품을 표현하고 구성하는데 있어 일정의 기준을 두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위의 작품처럼 쾌락을 추구하는데 철저해 좋은 작품이 나오고 감상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확실히 전달할 수 있다면 옳은 방식이다. 작품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기준 일정한 고정 관념을 가지면 안 된다고 느꼈다.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일정한 틀’ 이란 없는 것이다. 미적기준이나 관람방식을 하나로 고정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여러 방면으로 감상해보고, 생각해보고, 제작해보는 것이 작품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느꼈다. 예술이란 어렵고 접근하기 힘든 존재가 아니라 다가갈수록 보이는 존재라고 말하고 싶다.


[고지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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