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알베르 카뮈 [오해] 돌아보기 -5 [문학]

카뮈가 전하는 희망
글 입력 2017.07.21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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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네 달 동안 찬찬히 읽어본 알베르 카뮈의 '오해'는, 첫날 말씀드렸듯이 제가 대학교에서 연극동아리 부원으로 활동한 마지막 해에 무대에 올랐던 작품입니다. 작품을 고르고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제 시선을 사로잡았던 인물이 바로 마르타였습니다. 당시 저는 그녀를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비극적인 주인공 캐릭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전문 배우도 아니고 배우 지망생도 아니지만, 신입생 시절부터 마지막 학년까지 매해 무대에 올랐던 부원으로서, 학창시절의 마지막 연극에서 꼭 이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간 고전 희극에서 우스꽝스러운 역할만 맡았기에 진지하고 무거운, '멋있는' 인물을 맡아보고 싶다는 조금 유치한 생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르타에 매료되었던 것치고, 무대에 오른 순간까지도 그녀의 생각이나 행동에 무엇하나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르타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자취와 아르바이트를 하며 구직활동을 하면서부터였습니다. 당장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정작 그에 직접적으로 성큼성큼 다가갈 수 있는 일은 무엇하나 시도하지 못하고 있는 스스로를 인식한 순간, 마르타라는 인물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 생각을 붙잡아서 곱씹어보니, 무대에서 마르타를 연기하면서도 알지 못했던 마르타에게 조금 가까이 다가간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막연한 목표, 찬란한 이상향,
그에 비교하니 착잡하게 느껴지는 현실,
발목을 붙잡는 금전적인 문제.


  마르타처럼 절망적인 상황에 있지도 않았고, 하루하루 소소하게 웃고 떠들며 보내고 있었음에도 그런 몇 가지 요소들에 묘하게 공감을 하게 되니 조금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연극에서 너무 마르타의 비인간적인 모습만을 강조한 게 아닐까? 지금 다시 대본을 연습한다면 이번에는 마르타에게 더 입체감을 불어넣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던 와중에 '오해'에 대해 더 공부해보고,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조각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문학동네에서 출판된 '연금술사'의 첫장에 삽입된 성경의 한 구절이었습니다.



예수 일행이 여행중 어떤 마을에 들렀을 때, 마르타라는 여자가 자기 집에 예수를 모셔들였다. 그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시중드느라 경황이 없던 마르타는 예수께 와서 말했다.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걸 보고도 가만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라고 일러주십시오."
그러자 주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목을 택했다. 그 몫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누가복음 10정 38~42절]



  카뮈가 의도하고 두 여자 캐릭터에게 이같은 이름을 부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성경속 두 자매와 '오해'의 두 자매(마리아는 마르타에게 자신과 얀의 정체를 밝히며, 우리는 이제 자매지간이라고 언급합니다)에게는 닮은 모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두 캐릭터가 대표하고 있는 성격을 한 사람의 안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두 인물의 대립이 한 사람의 안에서 내적갈등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현실을 주지시키며, 행동하지 않고 외부요인을 탓하는 목소리와, 일의 우선순위를 알고, 행동하지 않음을 반성하고, 희망과 행복을 추구하는 목소리의 대립.

  전자는 마르타를 통해 나타나고, 후자는 마리아를 통해 나타납니다.

  요즈음 수많은 자기계발서들과, 명사의 강연들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마음의 소리를 따르라'는 지침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당신의 머리보다 먼저, 당신이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 이들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고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직설적으로, 끊임없이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재미있게도 이 모든 이야기들과 너무나도 거리가 멀어 보이는, 좌설과 절망이 담긴 카뮈의 부조리 연극 안에서 이들과 같은 맥락의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자기계발서들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해주는 반면, 카뮈는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보여줌으로써, 나아갈 방향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준다는 점입니다.



  '오해'는 그의 많은 작품들과 같은 명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의 모든 작품들이 그렇듯이 카뮈의 목소리를 충실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작품이 제목인 '오해'에 역설되게도 '진실'의 중요성을 외치고 있는 것처럼, 카뮈는 마리아의 좌절을 통해 마리아의 주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이에 대한 카위의 인터뷰입니다. 
 
 
-세계의 부조리에 대해 강조하는 철학이라면 그건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릴 위험이 있는 게 아닐까요?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것의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의 단계요 필요한 경험입니다. 그것이 막다른 골목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부조리는 어떤 반항을 야기하고 있으며, 그 반항은 풍요로운 것이 될 수 있지요. 반항의 개념을 분석하면, 삶에 어떤 상대적인, 그러나 항상 위협받는 의미를 다시 부여할 수 있는 개념들을 발견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194511[레 누벨 리테레르]
 
 
  이 인터뷰는 카뮈가 쓴 '오해'의 서문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나 이 비극이 끝났을 때, 이 연극이 숙명에 대한 굴복을 감싸주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릇된 판단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반항의 극인 이 작품은 정직함의 윤리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카뮈의 '부조리'를 담은 소설과 희곡들은 세상이 이렇게 부조리하다고 한탄하고 있지 않으며, 세상이 이렇게 부조리하니 포기하고 좌절하라고 종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머니의 죽음과 자신의 범죄 앞에 무심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사회에 논란과 혼란, 반발과 경각심을 던진 뫼르소처럼,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서술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부조리에 대한 반항'이라는 열쇠를 쥐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열쇠는 인생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 의심과 부조리를 물리치고, 자신의 목표를 위해 행동할 수 있는 문을 열어줄 것입니다.
[류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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