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리움 미술관의 「동서교감」 전시에서 만난 스기모토 히로시와 존 배 [시각예술]

“지금”의 제약을 초월하고자 하는 역동적인 열망
글 입력 2017.06.22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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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신이 사는 세상에서, 그리고 자신이 사는 ‘지금 이 순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한 사람이 아는 세상의 전부이다. 이 때 미술은 호기심 넘치는 인간으로 하여금 이 경계를 넘어설 수 있게 해준다. 조각, 회화, 건축, 그리고 사진이 담아내는 세상은 먼 이국 사람들의 세계일 수도 있고,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신들의 세계일 수도 있다. 한편으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세상 속의 작은 귀퉁이를 재조명할 수도 있다. 이처럼 미술은 한 사람이, 혹은 하나의 집단이 알고 있는 세상 너머에 있는 것들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시각과 세계관을 넓혀주는 매개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처럼 미지의 세상을 만나고 싶어하는 인간의 모험심을 미술이 해소해 주었다면, 동시에 인간은 자신보다, 심지어 한 문명보다, 오래 살아남는 미술을 보며, 자신의 세계가 얼마나 작은지,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보편적인 인간의 감성을 표현하고 분출하는 장으로서의 미술”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는 글귀가 「동서교감」 전시 입구의 벽면에 적혀있었다. 미술가의 입장에서 이 ‘보편적인 감성’은 호기심 가득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소개하고 싶은 열망, 그리고 자신의 시대가 지나간 후에도 오래도록 기억되고자 하는 열망일 것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이들이 자신보다 오래 살아남을 작품을 만드는데 매진하는지도 모른다.

리움 미술관의 「동서교감」 전시에서는, 작품 속에 “시간의 흐름” 그 자체를 담아내고자 한 작가 두 명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들의 작품들을 보며, ‘지금’의 시공간을 초월하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에, 한 시대의 제약에서 벗어나 세상을 새로이 직시하고자 했던 그들의 통찰에 닿을 수 있었다.

조용한 전시실에 들어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하얗게 빈 극장 스크린을 담은 흑백 사진 하나에 사로잡혔다. 스기모토 히로시의 「극장」 연작의 일부인 「Sameric, Pennsylvania」였다. 프레임 속에는 샘에릭 극장의 어두운 상영관이 담겨있었고, 극장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휑한 공간에 스크린만이 새하얗게 채워져 있으니, 자연스레 시선은 사진 정중앙에 자리잡은 극장의 스크린으로 제일 먼저 향했다. 처음에는 그 스크린이 비추었을 수많은 영화들과, 그 극장을 거쳐갔을 수많은 관객들의 환영이 보이는 듯했다. 그 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었을 것이라는 확신, 혹은 앉아 있었기를 바라는 희망이 투영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관객 (즉, 대상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자) 없이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예술의 본질을 담은 사진인 듯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그 극장은 무언가 결핍된 것처럼 황량하고 쓸쓸해야 할텐데, 스기모토가 담은 샘에릭 극장은 그런 인상을 전혀 주지 않았다. 사진 속의 모든 것이 멈춰 있는 듯한데도, 엄청난 역동감이 느껴져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B018531.jpg
작품 1. 「Sameric, Pennsylvania」
스기모토 히로시 (Hiroshi Sugimoto, 1948 - )
1978
젤라틴 실버 프린트
152 x 182


스기모토는 자신의 「극장」 연작을 “한 편의 영화를 사진 한 장에 담아내려는 시도의 산물”로 소개한다. 이 사진을 찍기 위해 그는 객석 한가운데에 앉아 그 아르데코식 극장의 스크린을 정면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카메라 조리개를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열어두었을 것이다. 그 결과, 일반적으로 사진이 담아내는 찰나의 순간들 - 영화 속의 어떤 장면이나, 같은 시간 객석을 채웠을 관객들의 표정이나 몸짓들 - 은 남지 않고 스쳐 지나가버렸다. 이를 통해 스기모토는 사진 속에 순간을 포착하는 대신 ‘흐르는 시간’ 그 자체를 담아낸다.

하얗게 비어버린 스크린을 보다 지치면, 시선은 천장의 샹들리에를 비롯한 사진의 주변부로 이동하게 된다. 비록 영화를 보느라 관객들은 눈길을 주지 않았겠지만, 스기모토의 사진만큼은 화려한 극장의 내부를 선명하게 비춘다. 흑백의 색감은 극장의 고풍스러움을 더욱 부각하는 한편, 그 극장과 그곳의 영화들이 누린 전성기는 이미 지나갔음을 암시한다. 스크린만 오롯이 빛나는 어두운 극장은 관객에게 영화의 세계에 집중해 줄 것을,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만큼은 눈 앞의 ‘지금’에 충실할 것을 주문한다. 영화의 순간순간에 울고 웃는 것이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라면, 스크린에서 시선을 돌려 극장의 내부를 관찰하는 것은 ‘지금’의 제약을 직시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사진의 중심에 놓여있는 스크린과, 주변부의 극장 풍경이 역전되는 것 역시, 시간을 초월하여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스기모토의 의도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스기모토는 여러 ‘순간’들을 걸러내고, 그 순간들을 무심히 관통하며 흐르는 ‘시간’을 담고자 했다. 나아가 이 극장의 사진을 통해 여태까지 흘러 왔고, 앞으로도 흘러갈 시간의 ‘영원성’을 담고 있다. 프레임 속에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이 응축되어 있기에, 스기모토의 사진은 멈춰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역동적이다. 스기모토는 디지털 조작사진이 현대사진의 큰 축을 형성하고 있는 시대에, 아날로그식 작업을 고집하는 스스로를 “시대착오주의자”라 부른다. 하지만 나는 순간밖에 담지 못하는 사진의 본질적인 제약을 극복한 그의 작품을 보며, 시간과 시대를 초월한 통찰을 할 수 있는 작가라고 생각했다.

「인간 내면의 전시실」을 지나 「근원으로의 회귀」 전시실에 들어서서, 미니멀리스트들의 작품들을 구경하다가 나는 다시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똑같이 생긴 격자 칸 모양의 얇은 철판들을 위아래로 쌓은 커다란 탑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 조형물은 격자 칸들을 관통하는 얇은 철사들로 고정이 되어 있었는데, 그 철사들은 곧지 않고 모두 휘어 있었다. 작품명이 「신화의 흔들림」임을 알고 나서야, 나는 시간과 함께 흘러 온 신화를 보았다. 똑같이 생긴 격자칸의 철판들은 어느 시대 속 어느 문화권의 ‘순간’들을 형상화한다. 배는 격자 칸의 형상을 통해 그 ‘특정한 시공간’의 이미지를 더욱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그리고 하나 하나의 특정한 순간들을 관통하는 철사들은, 한 시대의 이야기들이 후대에 전해지고 읽히는 길고도 연속적인 과정을, 그 시간의 궤적을 표현한다. 한편으로는 무심히 흐르는 시간을 잘라낸 횡단면이 곧 하나의 격자 칸이 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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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2.「신화의 흔들림」
존 배 (John Pai, 1937 - )
2009
강철용접
233.7 x 99 x 73.7cm


문득 “모든 위대한 문학작품은 일리아스거나 오뒷세이아”라는 레몽 크노의 말이 떠올랐다. 모든 문학 작품은 ‘모험’과 ‘전쟁’이라는 큰 테마로 거슬러 올라감을 반영한 구절이다. ‘신화’는 시공간을 관통하며 변주되어 왔다고 할지언정, 오늘날의 철학과 현대인들의 세계관에 여전히 중요한 문법으로 작용한다. 「신화의 흔들림」의 각각의 격자 칸을 연결하는 철사들이 곡선의 형상을 띄는 것은, 시대의 가치에 따라 재해석되거나, 일부분을 잃거나, 아예 배척되기도 하는 ‘신화’의 궤적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소아시아 문명권의 영향력 아래 들어서면서, 그리스 신화 속 헤라의 주권은 탈각되고 제우스가 절대권력을 갖게 된다. 그리스 신화는 로마 시대에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가, 중세 시대의 유럽에서는 힘을 잃고, 이후 고전주의와 함께 다시 각광을 받는다. 이 때 「신화의 흔들림」 속 철사들이 휘거나 비틀린 정도가 구간마다 제각각인 것은, 한 시대에는 유독 사랑받았는가 하면, 다른 시대에는 더 압도적인 가치에 밀리곤 했던 ‘신화’가 겪은 다양한 굴곡을 구체적으로 담아낸다.
여러 순간들이 곡선으로 엮였기에, 처음 보았을 때 이 구조물은 행여 쓰러지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불안정할 것만 같은 이 조형물은 오래 볼수록, 여러 각도에서 볼수록, 상당히 안정적이다. 배는 시간 속에서 흔들리는 듯 보이지만 끝내 제 모습을 잃지 않는 ‘신화’의 역동적이고 안정적인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무엇보다도 이 신화는 우리의 시대 이후로도 계속 전해질 것이니, 「신화의 흔들림」 역시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시간이 흐르며 더욱 확장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더욱 역동적이다. 배는 「신화의 흔들림」을 마주하는 관객들로 하여금, 미래의 격자 칸에는 어떤 모습이 담길지 몹시 궁금해하도록 하는 한편, 우리의 세상은 어디에서 태동했는지에 대해 숙고해보게끔 한다.
레몽 크노의 말은 우리로 하여금 시의 출발점을 돌아보게 하는 한편, 후대 사람들의 사고와 후대 예술가들의 작품들은 호머가 만들어낸 틀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함을 함의한다. 「신화의 흔들림」도 마찬가지로, (흐르는 철사로 표현된) 시간 속 ‘신화의 서사’에서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사는 현실의 ‘격자 틀’에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 관념의 한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작가의 탐구심을 담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는 「Myth’s Sway」라는 영제가 더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Sway”는 시대에 따라 ‘흔들릴’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세계를 ‘지배’하며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신화의 속성을 잘 품고 있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배의 「신화의 흔들림」은 사람들과 함께 흘러 온 신화의 힘을 담아내는 동시에, 신화의 문법에 따라 만들어진 현실의 세계에 구체적인 형상을 준다. 그리고 그 형상에, 신화와 현실의 제약을 초월하여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본인의 열망을 투영한다.
 
이처럼 스기모토 히로시와 존 배는, 미술의 힘을 빌려 인간 관념의 한계선을 명확하게 그려낸다. 스기모토를 가두는 ‘현재’는 스크린에 시시각각 비춰지는 하나의 영화라면, 배를 가두는 ‘현재’는 신화의 흐름에서 이탈할 수 없는 세상이다. 두 작가 모두 추상적인 시간에 ‘하나의 사진 프레임’, 혹은 ‘합금 조형물’이라는 시각적인 형상을 부여하고, 이 형상 속에 ‘흐르는 시간’을 가두어버린다. 고정된 형태 속에서 느껴지는 두 작품의 역동성은, 이 시간성의 제약에 안주하지 않고자 하는 두 작가의 힘찬 열망을 더욱 강조한다. 「신화의 흔들림」은, 미술의 힘을 빌려 현실과 신화의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나들고자 하는 배의 강렬한 의지를 표출한다면, 스기모토는 「Sameric, Pennsylvania」의 프레임에 담기는 찰나의 시간을 영화의 러닝타임만큼 늘림으로써, 사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
 
스기모토는 관객을 매혹하는 스크린의 영화는 사실 빛의 조합에 지나지 않음을 폭로하는 듯하며, 배는 ‘지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신화’의 문법은 (그 본질은 변하지 않을지언정) 시간과 함께 흔들릴 수 있음을 함의한다. 시간을 초월한 통찰을 작품에 녹여 낸 두 작가는, ‘지금’의 세상을 맹신하는 근시안적인 관객들에게 일침을 날린다. 「Sameric, Pennsylvania」와 「신화의 흔들림」은, 어제보다 더 빠르게 달려야 ‘오늘’을 따라잡을 수 있는 시대를 살며, 불안감과 피로감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더욱 깊은 울림을 남긴다.


[강희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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