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Essay] 성과사회, 우리는 왜 에세이를 읽는가

글 입력 2017.05.30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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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에세이는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사람들이 에세이를 쓰고 읽는 데에는 저마다의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편, 에세이 텍스트는 개인적인 것을 넘어서는 사회적인 요소와도 연관이 있다. 따라서 이를 바탕으로 에세이 텍스트가 어떠한 사회적 요인에 배태되어 있는지 고찰해보고자 한다.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은 현대 사회가 금지 명령을 발하고 당위를 동원하는 규율사회와 반대로, 전적으로 '할 수 있다'라는 조동사의 명령 아래 놓여있는 성과사회라고 주장한다. 그는 '할 수 있다'는 자기 착취적 표현이 무한한 착취를 가능케 함을 지적하고 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성과'에 대한 요구와 '할 수 있다'는 자기 착취적 발언으로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성과'만을 쫓는 과정 속에서 개인은 성찰의 과정이 결여된 성과주의의 주체가 되어 버리며, 이때 사회적 약자는 타자가 된다. 또한 개인은 도태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몸부림쳐야 하는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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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성과주의는 오랜 시간 지속되어 왔으며 여전히 우리 사회에 작용하고 있는 주된 기제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이들이 경쟁과 성과주의가 만연한 사회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에세이는 독자들에게 '성과 주체가 되지 말고 가치를 찾을 것'을 이야기하고, 경쟁에 지친 이들에게 위로와 조언을 건넨다. 경쟁과 성과의 압박 속에서 잊고 지내던 가치의 중요성을 환기시켜 주는 것이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화려한 주인공이 아니라 초라한 조연 같아도 슬퍼할 필요 없다. 어떤 조직이든 여러 사람이 모여 만들어지듯, 조연 없는 주인공은 쓸쓸한 존재일 뿐이다. 우리 스스로는 사소한 사람일지 몰라도, 사소함의 소중함을 누군가는 알아주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전승환, <나에게 고맙다>, 사소함의 가치 中



   화려한 주인공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이러한 텍스트는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더라도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을 향한 수많은 '사회적 기대'에 모두 부응하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또한 그에 부응하는 것이 개인의 행복을 보장해주지도 않는다. '성과'가 중심이 되는 '사회적 기대'는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나 개인의 기대와는 다소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사회 안에서 사회적 기대에 부응하길 명령받으며 살아온 현대인들은 맹목적으로 그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엔 자신에 대한 성찰이 결여되어 있었고, 이는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한계를 알 수 없도록 한다. 아래의 텍스트를 통해 이에 대한 논의를 확장시켜 보고자 한다.



주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 하게 해주시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이 구절이 어느 날 엄마의 마음속으로 들어와 박혔다.
(중략)
참 이상하지. 살면서 우리는 가끔 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는 때가 있고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때가 있어. 이 둘을 구별할 수 있다면 프란치스코의 말대로 '지혜'를 얻는 일이 되겠지. 그런데 이 세상은 말이야.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깨달아야 할 때를 훨씬 더 많이 준다. 소풍가는 날 나빠지는 날씨하고, 나 싫다고 가는 사람하고, 엄마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네 마음하고, 어떤 때는 그걸 견뎌야 하는 내 마음까지. (후략)


공지영,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제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게 해 주소서 中



   현대사회는 나르시시즘과 자기착취를 강요하는 사회이다. 나르시시즘은 자기를 아끼고 돌보는 자기애와는 구분된다. ‘자기애’는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이며, 그것은 자신의 한계에 대해 명확히 아는 것을 말한다. 이와 달리 나르시시즘은 자신의 한계에 대해 아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오히려 한계를 고려하지 않은 채 무한한 잠재력을 강조하여, 개인들로 하여금 성과를 위한 끝없는 노력을 강요한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그들의 무한한 잠재력을 헛되이 하는 부도덕을 범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기애'적 주체인가? 우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 알고 있는가? 이에 그렇다고 답할 이는 사실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항상 '노력'으로 뭐든 것을 극복할 수 있고, 더 나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학습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누구나 노력한다고 최상의 결과를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노력해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때 우리는 사회를 탓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도 한다. 에세이집은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주는 거울 역할을 하고 있다.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고 비판하면서도, 개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에세이는 개인, 나아가 사회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와 개인, 그리고 텍스트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이 오늘날 에세이집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About-Essay] 왜 지금 에세이인가 03/


[노혜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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