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상상으로 채워가는 60분, '이불'

글 입력 2017.05.30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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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언극 <이불>을 보러 들어간 극장에는 흔히 떠올리는 무대 대신에 그저 텅 빈 넓은 공간에 둥그렇게 두 줄로 놓인 의자들만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자들 앞에는 아예 바닥에서 방석을 깔고 앉아 보는 자리도 있었다. 눈에 보이는 소품이라고는 이불 한 개와 작은 테이블에 놓인 알 수 없는 잡동사니들이 전부. 게다가 무언극이라니. 어떤 공연이 펼쳐질지 예상도 되지 않았다.



내가 세상에 나오기 전, 엄마 아빠는 늘 돌아누웠고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커다란 홍수가 나기 전까지는... 어느날, 커다란 홍수가 나서 모든 것이 떠내려갔다. 자고 있던 엄마 아빠도 물살에 휩쓸려 멀리멀리 떠내려갔다. 달랑 이불 한 채와 함께... 탐험가가 된 엄마 아빠는 날아다니는 양탄자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때 구름 위에서 자고 있던 나도 그 양탄자를 타고 엄마 아빠 옆으로 왔다. 그리고는 이불 안에서 뿅 튀어 나와 마침내 눈을 활짝 떴다.



  위에 적은 부분이 <이불>의 시놉시스이자 극에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대사이다. 시작과 함께 어둠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등장한 배우가 저 대사를 말한 후부터 무대를 채우는 건 배우들이 손수 연주하는 음악과 마임, 그리고 이불 한 장 뿐이다. 여기에 어느 소품보다도 중요한 게 있으니 바로 관객들의 상상이다. 관객석과 무대가 이렇게 가까이에, 그것도 같은 눈높이 선에 있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실감나는 소품은 아무것도 없는 무대지만 어느새 차오르는 물넘실대는 바다를 건너는 배가 머릿속에 그려진다면 이미 우리는 <이불>의 일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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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의 제목이 <이불>인 만큼 이야기는 이불로 시작해서 이불로 끝난다. 이불은 배가 되었다가 양탄자가 되었다가 상황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며 관객을 새로운 세상으로 이끈다. 늘 돌아누워 있던 엄마와 아빠는 이 새로운 세상에서 모험을 떠나고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기도 한다. 갈등상태를 넘어서 아예 서로 무관심하던 두 사람이 이불을 매개로 점점 마주보는 빈도가 높아지고 서로를 향해 웃어보일 때마다 부드러운 이불을 덮고 있는 것처럼 괜히 내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중간 중간 배우들의 뛰어난 마임과 절묘한 효과음으로 웃음이 새어나오는 건 덤이다.


이불_장면사진2.jpg
 

  두 사람을 따라 귀여운 모험을 하다보니 어느새 6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분명 60분동안 내 눈앞에 펼쳐진 건 두 배우의 마임과 한 장의 이불이었지만 내 머리속에는 훨씬 더 큰 세상이 다녀갔다. 아마 다른 관객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세상은 각자의 상상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이었을 테다. 같은 공연을 봤지만 모두 저마다의 색이 스민 세상을 머릿속으로 창조해낼 수 있다는 것이 무언극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나의 경우 그 세상은 포근하고 한계가 없는 곳이었다. 거기서 60분을 머무는 동안 정말 행복했다. 문득 어렸을 때 이불을 깔아놓고 동생과 놀던 생각이 났다. 우리의 상상에 따라 바다도, 들판도, 땅 속도 될 수 있었던 이불. 한참 놀다가 와락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으면 이불 밖과는 분리된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무거운 이불의 감촉, 웅웅대는 소리, 이불에 스미는 전등불빛. 오랫동안 잊고 있었지만 생각해보니 다른 세상으로 가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불 한 장만으로도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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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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