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문학]

단편집 '쇼코의 미소'를 읽고
글 입력 2017.05.28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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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오피니언은 단편집 <쇼코의 미소>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人間) 이라는 단어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사람 인(人)에 사이 간(間) 을 쓴다. 즉 인간이라는 말 자체에 '사람과 사람 사이'라는 뜻이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를 지칭하는 '인간'이라는 단어를 만들었을 먼 옛날부터 우리들이 결코 다른 사람 없이 혼자서 살아갈 수는 없는 존재임을 알고 있었나보다. 우리는 '인간'에 담긴 뜻처럼 평생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그 사이에서 살아간다.
 
  최은영 작가의 단편집 <쇼코의 미소>는 그 모든 인간관계와 그것이 남긴 흔적들의 이야기이다. 각 단편에는 다양한 종류의 관계가 등장한다. 할머니와 손녀, 엄마와 딸 같이 흔히 볼 수 있는 관계에서부터 할아버지와 일본의 펜팔친구('쇼코의 미소'), 낯선 타국에서 만난 다른 국적의 가족들('씬짜오, 씬짜오')처럼 결코 흔치 않은 관계까지. 세상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형태의 관계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어떤 관계는 그 당사자와 상대방 둘만 있을때는 왜곡되어 보이다가 제3자가 개입해야만 비로소 제대로 보이기도 한다. '쇼코의 미소'에서 할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나'가 쇼코라는 인물과의 관계를 계기로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듯 말이다. 전혀 상관없을 것만 같던 사람들이 사소한 일로 필연처럼 교차하는 순간도('미카엘라'), 누군가의 죽음으로 가까워지는 관계도 있다.('먼 곳에서 온 노래') 관계는 거미줄처럼 넓고도 촘촘하게 퍼져 서로를 얽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89쪽, '씬짜오,씬짜오' 中


  이렇듯 다양하게 존재하는 인간관계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끝이 난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관계도 영원하지 않다. <쇼코의 미소>에 수록된 단편들은 그 수많은 관계의 끝을 보여준다. 끝은 한 쪽의 일방적인 단절로부터 올 수도,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멀어져서 올 수도 있다. 슬프고 안타깝지만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죽음이 관계를 끊어놓는 경우도 있다. 꼭 오해가 생겨서 큰 싸움을 해야만 관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한지와 영주' 에서 한지와 영주의 관계처럼 아무 일이 없어도 그냥 어느 순간 이 관계는 끝났구나 마음으로부터 깨닫게 되는 수도 있다.

  어떤 식으로 맺어지고 또 어떤 식으로 끊어지든 관계는 타인과의 접촉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 접촉은 반드시 우리에게 무언가를 남긴다. 선명하게 그려지는 특정 장면이든, 뭉뚱그러진 감정의 덩어리이든 관계가 남긴 부산물은 마음 속 바다 밑바닥에 켜켜이 쌓여서 어느날 문득 수면 위로 솟아오른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상념에 잠긴다. 그 상념 속에서 긴 시간을 보내 봐도 영영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쪽의 결과, 듣지 못한 대답, 끝내 가려져 볼 수 없던 상대방의 마음 한구석 같은 것들이다. 부산물은 나이를 먹을수록 늘어만 가고 그것들을 언어로 표현하려 할수록 '모르겠다'라는 말이 습관처럼 입에 붙는다.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억은 현재를 부식시키고 마음을 지치게 해 우리를 늙고 병들게 한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 말을 언제나 기억한다.

164-165쪽, '한지와 영주' 中


  <쇼코의 미소>에는 극적인 장면이나 설정이 거의 없다. 각 작품의 인물들은 그저 독자와 같이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을 살아가고 그 속에서 불쑥 불쑥 올라오는 관계의 부산물들-기억과 감정-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런 부산물들은 혼란스럽지 않고 오히려 흙탕물에서 흙이 모두 가라앉은 후에 윗물을 떠 낸듯 맑고 순수하다. 그렇게 단편 속 인물들은 누군가 자신에게서 빠져나간 흔적들을 담담하게 바라본다. 평범한 인물을 등장시켜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소박하게 풀어놓는데 읽다 보면 코끝이 찡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그들의 이야기 속에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남겨지고 또 누군가를 떠나온 기억이 고스란히 들어있기 때문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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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라처럼 나도 선배를 잊어가고 있다. 이 노래를 선배와 함께 불렀을 때의 마음이라는 것도 이제는 희미하기만 하다. 선배가 떠나고 반년동안은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안타까운 마음도, 선배에 대한 분노에 가까운 그리움도 옅어졌다. 노래가 끝나고 테이프가 회전하는 소리를 잠시 듣다가 정지버튼을 눌렀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율랴가 나를 보며 애써 웃고 있었다. 노래는 끝났고, 우리에게는 선배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시간이 남아 있었다.

210쪽, '먼 곳에서 온 노래' 中


  인간관계도 수입,지출을 계획하듯 '몇 월 몇 일부터 저 사람과 이만큼 친해져야지' '저 시점부터는 멀어져야지' 하며 계획할 수 있다면 어떨까. 다양한 관계와 그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을 보니 인간관계가 계획한대로 굴러간다면 삶이 조금 더 편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삶이 재미있는 이유는 예상대로 되는 게 많지 않기 때문이다. 오래 친구로 지낼 줄 알았던 사람과 사소한 다툼으로 영영 멀어져버리기도 하고 인상이 더러웠던 사람과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나를 거쳐갔던 다양한 사람들과 그 관계를 떠올려보면 흥미롭다. 1년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사람과 친해져 있기도, 멀어져 있기도 하다. 한 관계의 끝은 또 다른 관계의 시작이다. 지난 일은 흐려지고 새로운 사람은 앞에서 다가온다. '먼 곳에서 온 노래' 의 소은과 율라처럼 우리는 끊어지는 관계의 수만큼 새로운 관계를 계속해서 맺어가기에 지난 관계의 슬픔과 미련에 파묻히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다. 힘들고 고민스러워도 평생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헤매이는 것은 결국 人間의 숙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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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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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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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민
    • 안녕하십니까 '두레'에 참석중인 이승주입니다.
      소원님의 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글을 읽고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인간관계에서의 필연적인 끝과 그것을 보는 관점, 생각이 책과 조화를 잘 이룬것 같습니다.
      특히 힘들고 고민스러워도 평생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헤매이는 것은 결국 인간의 숙명이라는 부분에서 드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힘들고 고민스러운 부분들이 많고 결국엔 끝나고 지나갈 일들이지만 그사람을 통해 여러 감정을 느끼고 행복하기도 슬프기도 충족받기도 하기이 계속해서 사람과의 관계를 기대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신 부분에서 독자들에게 궁극적으로 바라는 점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긍정적으로 보고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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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yeonjg
    • 안녕하세요! 두레에 참여하고 있는 쓰다듬다, 조현정입니다:-)
      친구가 쇼코의 미소 읽어보라고 했었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몰랐거든요.
      소원님 글로 쇼코의 미소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이라는 걸 알게됐어요.
      극적인 장면이나 설정이 거의 없다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소원님의 글덕분에, 쇼코의 미소에 관심이 가네요.
      쇼코의 미소가 인간관계, 그리고 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게 될 계기가 될 것같아요.
      글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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