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공.감.대] 공간04. 사랑하고, 미워하는, 나의 집

글 입력 2017.05.1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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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미워하는, 나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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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단지 세상의 끝>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자비에 돌란 감독의 작품 <단지 세상의 끝>은 내게 영화가 아니었다. 다큐였다. 우울한 주인공 루이에게서 내가 계속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것은 아마 그 얼굴에서 혹시나 내 표정을 찾게 되지는 않을까 두려웠던 건지도 모른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루이는 가출 이후 12년 동안 짧은 엽서로만 안부를 주고받았던 가족을 찾는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너무나도 오랜 시간을 건너 고향에 돌아간다. 자신의 죽음을 그들에게 밝히고 끝을 선고하기 위해. 루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그리고 많이 낯설어진 가족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무겁고 잔인한 통보다. 그래도 어쩐 이유에서인지 루이는 세상과의 이별선고를 그들과 직접 얼굴을 마주하면서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오랜만에 피붙이들과의 만남을 앞둔 복잡한 얼굴에서는 심한 두려움까지 보였다. 루이에 대한 가족들의 환대는 반짝이듯 잠시. 어색한 설렘과 반가움, 12년 간 묵혀왔던 호기심은 순식하게 걷히고 그들은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원망과 상처를 서로의 가슴팍에 집어 던지며 물어뜯는다. 그래, 그게 가족이다. 아름답고 평화롭기만 한 가정은 세상에 있을 수가 없다. 어떤 가정에게서 평화는 그저 잠정적인 휴전이거나 평화를 가장한 단절과 고립일 수도 있다.
  


왜 우리에게 무심한 거야? 

너만 잘난 줄 알아? 

어쩜 내 마음을 그렇게 몰라 줄 수가 있어? 

정말 좋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왜 이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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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단지 세상의 끝> 스틸컷 (출처: 네이버 영화)



  원망은 쏟아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결핍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다. 가족이라는 테두리 속에 있었는데 모두가 극도로 외롭다. 남편을 잃고 겨우겨우 세 자식을 키워온 어머니 그래서 어떻게든 과거를 아름답게 기억해야 했고 그 추억을 지겹도록 노래해야만 행복할 수 있는 어머니. 자존감이 낮아 자신의 존재감을 고성으로 윽박지르면서 증명하는 장남, 가족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벗어나지 못하는 막내. 혈육이라는 이유로 뭉쳐 있어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부모는 자신이 낳은 존재를, 자식들은 자기를 낳은 존재를 그리고 부모가 낳은 또 다른 존재들을. ‘나’라는 존재가 서로를 빌려 태어나고 견디고 자라왔다는 이유로 그 관계를 저버릴 수가 없다. 절연을 한다 해도 가족들의 형상은 내 육신과 정신 곳곳에서 얼굴을 들이밀 것이다. 가족은 친구나 애인 사이처럼 원하는 사람으로 선택할 수도 없고 적당히 멀어질 수도, 헤어질 수도 없다.

  루이가 집을 찾아갔던 이유는 자신이 이제 곧 죽는다는 것을 밝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진심으로 이별’을 말하는 것 말이다. 12년간의 도망을 끝내기 위해서.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더 이상의 외면도 없고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완전한 결별을 위해서.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까지 루이는 입을 벙긋하는 것조차 힘겨워 한다. 답답한 장면들이 이어진다. 중요한 말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답잖은 대화와 의미 없는 다툼만이 계속되다가 그렇게 루이는 하루 동안도 머물지 못하고 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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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 며칠간의 연휴 기간 동안 나는 고향 집에 내려가 있었다. 떨어져 있는 것이 익숙해져서인지 가족을 보러 집으로 간다는 것 자체가 무슨 큰 의미라도 되는 것 같은 게 이상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 가족들의 체취와 내 어린 시절이 가득 배어있는 공간 속으로 20대 중반의 내가 들어선다는 것이, 거기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그 기이함 속에서 익숙한 손맛의 밥을 먹고 깔깔 웃고 각자 할 일을 한다는 것에서 내가 묘한 불안과 행복을 동시에 느낀 이유를 나는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깨달았다. 내 안에는 가족들에게서 ‘나’라는 사람이 그저 편안한 이방인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일면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언제 와도 좋지만 서로가 서로의 삶에 너무 뒤죽박죽 얽히지 않는 관계. 사랑한다는 이유로 서로가 서로를 상처와 원망의 구덩이 속으로 내던지지 않는 관계. 서로를 이해하고 화목해야 한다는 강박적 의무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관계. 그런 것을 바라는 ‘나’가 있음을 느끼고 어쩐지 깊은 죄의식으로 서글퍼졌다.

  고향 집에 있는 동안 나는 엄마의 살을 쓰다듬으며 내가 당신의 속에서 나왔다는 것을 내내 상기했다. 당신도 참 연약한 살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느끼면서. 게으른 오후, 누워 있는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면서 그렇게나 꼿꼿했던 당신도 사랑받기 위해서 아기처럼 둥글어지는 구나, 생각했다. 그게 슬펐다. 내가 그것들을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도, 그리고 그런 슬픔을 느낄 만큼 내가 가족에게 깊은 애증으로 얽매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도, 벗어날 마음도 없다. 루이처럼 어느 날 갑자기 떠나지도 않을 것이고 루이의 가족들처럼 고성으로 내 상처를 부르짖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관계에서 계속 미끄러질 ‘나’를 외면할 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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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가 서로를 선택한 적 없지만 선택한 관계보다 더 강한 중력을 느껴야 하는 사랑. 그래서 충돌할 때마다 ‘내가 의도한 게 아니라는 이유’로 서로에게 더 큰 상처와 비극을 느껴야만 하는 사랑. 그것이 가족이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나의 집. 내 ‘가족’은 다른 누군가로 대체할 수 없는 처음이고 마지막인 유일한 ‘가족’이기 때문에 영원할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집 안을 퍼드덕 퍼드덕 날아다니던 새가 이리저리 뭔가에 부딪치다 풀썩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으며 퇴장한 루이도 어쩌면 인정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두는 세상의 끝처럼 아득한 ‘집’이라는 새장을 갖고 있다. 그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냘픈 새처럼 모든 것을 저버릴 수 있는 해방과 평생 손을 잡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저주일지, 축복일지는 확신할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내 사랑들은 이 비좁은 관계 안에서 부딪치고 충돌하며 크게 흔들리면서도 서로의 옷깃을 꼬옥 붙잡는다. 놓치지 않고 버티는 것이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아니까. 가끔 서로를 향해 시답잖은 농담을 하고 웃으며 돌아서는 모습에서 내 사랑들에게도 매 순간 아찔한 절벽이 펼쳐지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가 견뎌야 하는 두려움이 서로의 삶만큼이나 길다. 그러나 ‘가족’이 존재하는 이유. 싸우고, 슬퍼하고, 화해하고, 마주하고, 어색하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이. 그 ‘사이’를 믿어보는 것으로 우리는 가까스로 서로에게 닿고, 처음 태어나던 순간 맞닿은 찰나의 체온을 다시 경험한다. 어렴풋한 필연을.





+ 덧붙인다. <단지 세상의 끝>은 단순히 ‘가족’이라는 관계가 숙명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끈질긴 불안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 외에도 보고 씹을 것이 많은 영화다. 인간의 감정과 표정들을 때론 적나라하고 때론 꿈결 같은 아름다운 미장센으로 보여주며, 사랑 안에도 다양한 감정과 폭력, 결핍이 역동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추천하는 영화.





[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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