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유산진흥원] 궁 밖에서 만나는 왕들의 발자취 (1)

글 입력 2017.05.01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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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마을은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조선시대 중인과 일반 시민의 삶의 터전 이였으며
세종대왕의 얼이 살아있는
문화예술의 공간입니다.

궁 밖에서 만나게 되는
조선시대 왕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해설을 듣고 역사문화유적지 보존에 앞장서
주변을 깨끗이 청소합니다.


이동경로
경복궁역 출발 →
통의동 백송 터 (김정희 생가 터) →
창의궁 터 (영조의 잠저) → 세종대왕 나신 곳 →
쌍홍문터 → 청와대 사랑채 →
김상헌 집터 → 무궁화 동산



서촌

경복궁 서쪽에 있는 마을을 말합니다. 조선시대 사대부 집권 세력의 거주지였던 북촌에 비해 서촌은 조선시대 역관이나 의관 등 전문적인 중인들이 모여 살던 곳입니다.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선생님께서 사셨던 곳이고, 근대에는 화가 이중섭과 이상범, 시인 윤동주와 이상 등의 예술가들이 살았던 곳이에요. 현재 북촌에는 한옥이 많이 남아있는 반면 서촌은 대부분 1910년대 이후 지어진 개량 한옥이 남아 있습니다.


창의궁 터

위치: 3호선 경복궁 역 3번 출구 약 100미터

창의궁은 조선 영조의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집으로 원래는 효종의 넷째 딸 숙희공주 부마 인평위 정제현이 살았던 집을 숙종이 사서 넷째 아들 연잉군 즉 영조에게 주었던 곳 입니다. 또한, 영조의 아들 효장세자가 태어나기도 한 곳입니다. 1754년에는 이곳에 죽은 아들인 효장세자와 정조의 형인 의소세손의 제사를 지냈습니다. 1870년에는 정조의 왕세자인 문효세자의 사당을 안국방에서 창의궁으로 옮겼고요. 그래서 영조와 정조가 행차할 때마다 자주 찾았다고 해요. 창의궁은 1900년 폐궁되고, 일제강점기에 건물이 팔려 동양척식주식회사 사택 등이 들어서는 비운을 맞았습니다.


김정희 선생 집터

창의궁 터와 나란히 있는 추사 선생의 집터가 보이죠. 영조의 딸 화순옹주는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에게 출가하였는데 바로 김정희 선생의 증조모랍니다. 영조는 김한신에게 ‘월성위’라는 작호를 내렸고, 지금의 백송터에 큰 저택을 지어 살게 했다고 해요. 이 저택은 월성위 궁이라고 불렸죠. 김정희는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김한신의 장손인 큰 아버지 김노영에게 양자로 들어가 대를 이었고 12세에 양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월성위 궁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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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의동 백송 터


그는 월성위 궁에 매죽헌이라는 서고를 만들어 김한신이 평생 모은 책을 모아 두었습니다. 이 서고는 김정희의 학문에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고 전해집니다. 1840년 김정희는 유배를 떠나 월성위 궁에서의 생활을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월성위 궁은 많은 업적을 남긴 김정희가 살았던 곳이고, 영조가 지어준 집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둘 수 있습니다. 월성위 궁 앞에는 영조가 아끼던 나무였던 백송이 한 그루 서있었는데, 1990년 폭풍에 쓰러져 죽고, 현재는 그 그루터기만 남아있습니다.
 
영조임금의 맡딸인 화순옹주는 김한신과 결혼하게 된다. 부마가 된 김한신은 인품이 뛰어나고 용모가 준수했으며 키가 크고 눈동자가 맑았다고 전해지는데 불행이도 30대에 요절을 하게 된다. 사랑하는 동갑내기 남편이 죽자 화순옹주은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굶어 죽게 된다. 젊은 나이에 아끼던 딸과 사위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임금은 몹시 괴로워했다. 지아비의 죽음을 견뎌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화순옹주의 사연은 벼락에 맞아 죽어간 고목의 흔적만큼이나 애달프다.



세종대왕 나신 곳

위치: 서울 종로구 지하문로 41

세종대왕은 궁궐에서 태어나지 않았어요. 아버지인 이방원이 아직 왕이 되기 전이었으니까요. 바로 여기 경복궁 서쪽 에서 태어나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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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나신 곳 표지석


세종대왕의 업적

조선왕조 제4대 왕(재위 1418~1450).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하셨어요. 세종대에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측우기와 같은 과학 기구가 제작되는 등 백성들의 생활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문화 정책이 추진되었습니다. 이름은 도, 자는 원정이에요.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비는 청천부원군 심온의 딸 소헌왕후입니다. 1408년에 충녕군에 봉해졌고, 1413년에 대군이 되었으며 1418년(태종 18)에 왕세자에 책봉되어 22세의 나이로 왕에 즉위하였습니다.

세종대왕의 업적은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첫째, 제도를 정비하여 중앙집권 체제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유교정치를 구현하였습니다. 둘째, 한글창제와 학술연구를 통한 다양한 연구서적을 편찬하였습니다. 셋째, 음악과 과학기술의 발달 시켰습니다. 넷째, 토지를 등급으로 나누어 세율을 달리하는 조세의 공평성을 도모하였고 조선통보를 주조하여 경제, 사회가 발달하도록 했어요. 대외적으로는 주변국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영토 확장에 온힘을 다 하였습니다.

세종은 정치, 경제, 국방, 문화 등 다방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아 수준 높은 민족 문화의 창달과 조선 왕조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습니다. 유교정치를 폈고, 민족의 역사를 중요시 하였으며 민족문화를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민족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대를 열었습니다.



선희궁 터

서울 종로구 궁정도 육상궁 내에 위치하고 있는 선희궁 터는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의 신주(죽은 사람의 위패)를 받들어 모신 사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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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사묘란 조선 시대 정실왕비가 아닌 후궁에게서 태어난 임금이 그의 어머니의 신위를 모신 곳이에요. 1764년에 영빈이씨가 사망하자 시호를 의열이라 추증(벼슬, 품계를 주는 일)하고 묘의 이름을 의열묘라고 하였다가 1788년(정조 12)에 선희궁으로 고쳐 격을 높였습니다. 원래는 한성의 북부 순화방에 있었는데, 1870년(고종 7)에 신주를 육상궁으로 옮겨 모셨다가 1896년 선희궁으로 되돌려 모셨고, 1908년에 다시 육상궁에 옮겨 모셨으며, 그 옛 터에는 건물의 일부가 남아 있습니다.

이 곳에 1912년 조선 총독부 산하 의료기관인 제생원의 양육부가 설치되었고 현재 국립농학교와 맹학교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전하는 바로는 영친왕이 태중에 있을 때 순헌엄귀비의 꿈에 영빈이씨가 나타나서 폐한 사당을 다시 지어주기를 간곡히 부탁하였는데 그 뒤 영친왕을 낳고 나서 꿈을 꾸었던 일을 고종에게 말하여 제자리에 사당을 새로 지어서 다시 신주를 받들었다고 하나, 1908년에 신주를 다시 육상궁으로 옮겨졌습니다.






[한국문화유산진흥원]
임지원 엮음





[한국문화유산진흥원]
소공재 소개

'소통, 공감, 재미'의 머리글자를 딴 '소공재'는 우리 문화유산을 통해 소통하며 공감을 나눔으로써 재미를 추구하는 사단법인 한국문화유산진흥원의 산하 봉사단체입니다. 우리 고유 문화에 대한 애호사항을 고취하고 회원 간의 친목과 이해를 증진시키며 문화유산 진흥을 위한 봉사활동을 통해 공익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합니다.





[ARTINSIGHT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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