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원하는 세상을 디자인하다 [시각예술]

글 입력 2017.04.30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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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상수체’로 유명한 한국의 대표적인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 안상수. 4년 전 문득 교수직을 그만 두고 학교를 세웠지만 안상수 작가의 작품 활동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번 그가 한국의 작가를 세대별로 조명하는 서울시립미술관의 격년제 프로젝트 SeMA 삼색전의 주인공으로 선정되었다. 전시는 크게 ‘날개’와 ‘파티’로 나누어져 열리며, ‘날개’에서는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의 작품들이, ‘파티’에서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세운 학교 ‘Pati’에서 탄생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날개, 파티>에서 안상수 작가의 초기 디자인부터 그가 최종적으로 그리는 목표인 학교 ‘Pati’의 디자인까지, 그의 철학이 담긴 디자인을 만나 볼 수 있었다.

 문자라는 것, 특히 창제자가 확실하고, 세상에서 가장 ‘어린’ 문자인 우리 한글은 어떤 문자보다도 인위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세종대왕이 만든 이 한글이라는 문자로 500년 이상 소통해 왔으면서도, 우리는 한글을 탐구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소통의 수단으로 여겨왔다. 안상수 작가는 이런 관성에서 탈피해 세종대왕을 디자이너로, 이상을 한국 최초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로 생각했다. 그는 한글에서 무한한 예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실제로 그 예술성을 발현했다. <날개, 파티>에서 그 놀라운 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1. 안상수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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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안상수체는 요즘 대학생들이 만드는 피피티에 쓰이기에 인기가 많은 편도 아니고,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어딘가 불안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탄생 당시를 들여다 보면 상당히 의미 깊은 글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85년 안상수체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한글은 우리 것을 휩쓸며 등장한 근대가 규정한 네모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비유하자면 모든 사진을 정사각 화면에 맞춰버린 예전 인스타그램처럼 고지식한 프레임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안상수는 모음을 길게 만들고, 받침이 없는 글자라도 틀에 끼워 맞추지 않고 공백을 유지함으로써 그 네모 틀을 깨 버렸다. 이는 가독성을 우선시했던 그 당시 상황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 실험적인 시도의 결과로 안상수체는 얌전히 읽히기만을 기다리는 글자에 역동성이라는 새로운 특성을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2. 글자를 디자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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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상수체로 시작한 안상수 작가의 새로운 시도는 계속된다. 그 예시로 ‘웃는 돌’ 로고와 포스터, 포스터 만드는 과정이 전시되어 있다. 그는 글자를 뜻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단순히 한정하는 것에서 탈피하여 글자 자체를 소통 방식과 맥락이 집약된 예술로 여긴다. 실제로 한글은 상형문자로, 구강구조를 본 따 만들었으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에 기반한 휴대폰 문자입력 체계인 ‘천지인’은 점과 수직, 수평선만으로 어떤 모음이든 만들 수 있어 대단한 효율성을 보여준다. 안상수 작가는 이러한 한글의 특성을 이용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양하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글자를 재구성한다. 그에게 재구성이란 글자의 체계를 다시 쓰는 것이며, 글자를 ‘디자인’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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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가 생각하는 글자 디자인이란, 체계를 만드는 작업이다. 따라서 세종대왕도 그에게는 디자이너로 생각되며, 시인이자 예술가였던 이상 또한 디자이너로 여겨진다. 안상수 작가의 작품 세계가 담긴 영상에서 그는 이상이 한국 최초의 타이포그래퍼라고 이야기한다. 이상은 시에서 거울이라는 소재를 주로 이용하는데, 활자 제작의 기본 방식은 거꾸로 찍어내는 원리를 기반으로 하기에 사물을 반전시켜 보여주는 거울과 깊은 연관이 있다. 안상수 작가는 그만의 통찰력으로 띄어쓰기 하나 없는 이상의 시에서 시각적인 의미를 발견한다. 세종대왕이 디자인한 한글, 그리고 한글을 다시 디자인한 이상. 나아가 작가는 디자인된 한글을 다양한 체계로 변형하고 무너트린다. 디자인을 디자인하는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한글이라는 글자에 담긴 무한한 세계를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세상을 디자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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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직을 그만 두고 마침내 학교를 디자인하러 나선 안상수 작가. 그가 추구하는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그는 글자와 같이, 학교를 디자인한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체계라 아니라 새로운 체계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며, “학교, 그리고 학교의 교육은 그 자체로 디자인이어야 한다”는 철학을 밝힌다. 실제로 전시된 “파티 용어집”을 들여다 보면 학부 과정을 ‘한배곳’, 대학원 과정을 ‘더배곳’, 한배곳이 진행되는 교실을 ‘이상집’으로 설정한다. 이처럼 “Pati”라는 학교가 신선한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파티’의 교육 과정을 보면 음성을 문자로 변환함으로써 소리와 문자의 연계성을 체험하는 ‘음악 놀이’와 같은 수업들이 정규 과정으로 존재한다. 이 수업은 시각디자인의 뼈대로서의 타이포그라피를 몸으로 체험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기존에는 따로 다루지 않았던, 문자의 끝없는 가능성을 스스로 해석해낼 수 있도록 만드는 내용이다. 이러한 실험적인 시도들이 3,4년의 정규 과정 속에 체계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이 “Pati”의 체제가 얼마나 단단한지를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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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자로부터 학교를, 세상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 안상수 작가. 그는 자신이 디자인한 학교의 정신을 담은 구호로 ‘몰입’을 뜻하는 순우리말인 “홀려라”를 내세운다. 온 몸을 던져야 창의를 이루어낼 수 있다는 생각을 담은 구호이다. 기존 생각의 틀을 깨 버린 이상을 존경한다는 작가는 처음 학교를 세우기로 했을 때 백척간두의 심정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의 학교는 2013년 개교하며 글자 이외의 세상을 디자인하는 작가의 시도를 성공시켰다. 그 원동력은 한글에 홀려, 한글에 담긴 가능성을 알아봤던 자의 특권이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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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예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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