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파도소리를 닮은 음악으로 꿈의 언저리를 경험하다

글 입력 2017.04.08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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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인상은 단촐 했다. 기억이 나는 건 벤치와 쓰레기통 정도. 배경이 바다니까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바다는 보는 것이라기보다는 듣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바다의 푸른빛도 좋지만 철썩 거리는 파도 소리, 갈매기들의 울음소리, 고운 모래가 밟히는 소리가 바다를 표현하기에 더 적절하다는 생각. 바다를 연상시킬 만 한 건 작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바닷소리뿐이었지만 충분했다.

 극은 사실 약간 지루한 감이 있었다. 바닷가에서 만난 중년 남녀와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재치 있었지만 예상 가능한 것들이었다. 바닷가를 앞에 두고 맥주 한 캔 홀짝이다 술집으로, 방으로 장소를 옮겨가며 술을 마시고 또 마시는 일은 통속적이었다. ‘삼일’이라는 시간은 낮과 밤을 오가며 성실하게 흘러갔으며 불필요한 성실함은 나를 극장 밖으로 끌어내어 책상 앞에 앉혀 놓을 것만 같았다. 그나마 나를 구제해 준 건 소박한 무대 뒤에 숨겨진 ‘무박’이라는 시간을 채운 그들의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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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로 도망쳐 나온 중년의 여성이자 엄마인 그녀는 늘 기타를 들고 다니며 도피처를 만들어내는 중년의 남성이자 아빠인 그에게 끊임없이 이렇게 말한다.

 
“파도소리가 노랫소리 같아요.”


 그래서 산도 아닌 도시도 아닌 바다로 흘러들어 온 것일까. 음악을 사랑했던 과거로 잠시라도 돌아가고 싶어서? 파도 속에서라면 후회 없이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유야 어찌됐든 그를 만난 그녀는 음악을 하고 싶었던 젊은 날의 꿈과 꿈은 물론이고 자신의 이름까지 가물가물한 현재를 술과 함께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들은 잠 한 숨 자지 않고 파도소리만큼 시원한 목소리와 거침없는 음악으로 꿈속에서 꿈을 이룬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꿈이 마음에 들었던 건, 벼랑 끝에 선 꽃처럼 위태로워 보이기만 했던 그녀의 생을 더욱 단단히 동여매어 벼랑 안 쪽으로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한 곡을 세 번이나 반복해 불렀던 게 아쉽긴 했지만 두 배우의 노래와 연주가 마음에 들어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하지만 그건 오로지 내 입장에서 음악이 좋아서였지 만약 누군가에게 그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무대 자체가 곤욕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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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하면 자신을 잃어가는 것 같다는 그녀의 말에 가슴 깊이 공감하지는 못했다. 삶에서 가장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야하는 나이대인 만큼 안타깝긴 하지만 한편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아직 중년이 되어보지 않아 쉽게 말할 수 있는 거겠지만. 그렇게 머리로만 감동을 느끼던 중 극의 마지막에서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아 버렸다. 두 사람이 이별하던 순간, 그의 핸드폰에서 울리던 벨소리가 꿈에서 그렇게 애타게 불렀던 그 노래였다는 걸 알게 된 순간에 말이다. 극 중에서 명확히 분리되어 있었던 현실과 꿈은 경계를 가볍게 무시한 채 뒤엉키기 시작했다 ‘무박’의 시간에서만 등장했던 그 음악이 ‘삼일’의 끝에서 흘러나왔을 때 모든 게 현실로 바짝 다가왔다.

 역사가 짧은 나로써는 여전히 어렵지만, 결국 중년의 나이에 필요한 건 마음껏 상상할만한 여유가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상상하고 꿈꾸는 법을 잊기 쉬운 나이가 중년이구나. 그래서 그것만으로도 삶이 좀 더 행복해질 수도 있구나. 겨우 20대밖에 되지 않은 나도 벌써 상상하고 꿈꿀 용기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으니, 가끔가다 하는 공상에도 즐거워지기도 하니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결말에서 왜 그들의 음악이 꿈과 현실의 연결고리가 된 것일까. 극장에 함께 있었던 중년의 관객들, 나의 어머니 아버지와 같은 그들에게 두 사람의 꿈은 그들의 젊음이고, 꿈이고, 아련함이고, 무엇보다도 불가능이었을 거였다. 꿈은 꿈이니까. 그와 그녀에게 무박은 무박이고 삼일은 삼일이었듯이. 하지만 무대를 울리는 벨소리를 듣는 순간 꿈에서라도 꿈을 이루었던 두 사람에게나, 그 모습을 바라본 같은 중년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나 '무박삼일' 이전과 이후는 어쩌면 달라질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물론 두 주인공도 관객들도 수많은 이름표에 걸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또 다시 고군분투해야겠지만 적어도 현실은 더 이상 이전의 현실이 아닌 꿈의 언저리처럼 느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과거의 꿈을 직접 이루진 못하더라도 다시 떠올려보고 상상해보는 일은 극 속의 그녀에게 그랬듯이 살고 싶어지는 힘이 될 수도 있다.
 
 비록 아쉬운 점이 몇 가지있었지만 파도 소리를 닮은 음악으로 꿈이라는 물줄기를 넌지시 마음 속으로 흘려 들여보내 준 연극 <무박삼일> 이었다.





공연정보

공연기간ㅣ2013년 3월 3일(금) – 2017년 4월 30일(일)
공연시간ㅣ금 20시 토,일 16시
공연장소ㅣ대학로 스튜디오 76(구.이랑씨어터)
관람연령ㅣ만 15세 이상(고등학생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ㅣ75분
관람료ㅣ30,000원
문의ㅣ010-9484-7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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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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